with 앙리 루이 베르그송 Henri Louis Bergson
포근한 봄바람 속에 버스가 담양 시외버스터미널에 멈췄다.
진우는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페달을 밟았다.
길 양옆의 메타세콰이어들이 연둣빛으로 물들어, 마치 초록빛 터널을 달리는 듯했다.
꽃가루가 바람에 흩날렸고, 나무 사이사이로 햇살이 깜빡이며 내려왔다.
잠시 달린 후, 그는 길 옆 벤치에 자전거를 세우고 앉았다.
따뜻한 아인슈페너의 초콜릿빛 크레마 위에 설탕이 반짝였다.
딸기를 올린 크로플에서 달콤한 향이 났다.
진우는 몇 시쯤 됐을까 스마트폰의 시계를 확인했다.
그때, 옆자리에 시원한 머리의 눈빛이 선명한 사람이 잔잔한 미소로 앉았다.
베르그송: “시간은 시계로 재는 게 아니야. 너의 의식이 흐르는 대로야.”
진우: “… 혹시 베르그송?”
베르그송: “그렇다네. 자네는 시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진우: “시간은 흘러가는 거 아닌가요?”
베르그송: “그건 시계가 재는 추상적인 시간일 뿐이지.”
진우: “그럼 진짜 시간은 뭔가요?”
베르그송: “경험 속에서 흐르는 시간, 나는 그것을 ‘지속(durée)’이라 부른다네.”
진우: “지속이라…”
베르그송: “사랑했던 5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1시간보다 길게 느껴지지 않나?”
진우: “맞아요. 즐거울 땐 시간이 빨리 가고, 지루하면 길게 느껴져요.”
베르그송: “그게 바로 의식이 느끼는 시간이지.”
둘은 자연스럽게 앉은 자세를 고쳐 서로를 바라보았다.
진우: “그렇다면 시간은 측정할 수 없는 건가요?”
베르그송: “측정할 수 있는 건 ‘양’ 일뿐, ‘질’은 측정할 수 없다네.”
진우: “양과 질의 차이라…?”
베르그송: “양은 시계의 눈금처럼 균등하지만, 질은 경험의 무게와 깊이에 따라 다르지.”
진우: “그럼 사는 것만이 시간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군요.”
베르그송: “그래. 살아있다는 건 흐름 속에 있다는 뜻이니까.”
진우: “기억도 시간이랑 같은 원리인가요?”
베르그송: “그렇다네. 기억은 단순한 저장이 아니라, 감정과 얽혀 축적된 시간이지.”
진우: “그래서 어떤 음악은 듣자마자 눈물이 나는 거군요.”
베르그송: “그건 음악이 아니라 네 안에 남아 있는 지속의 울림 때문일 걸세.”
진우: “울림…”
베르그송: “네 과거의 한 순간이 현재로 스며드는 거지.”
바람이 멈춰진 자전거 바큇살을 스쳤다.
진우는 크로플을 베어 물었다. 바삭한 식감 뒤에 퍼지는 딸기 향이 봄 공기와 섞였다.
베르그송에게 권하자 베르그송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우: “지속이라는 건 붙잡을 수 없죠?”
베르그송: “그렇지. 붙잡을 수 없지. 다만 느끼고 살아갈 뿐.”
진우: “그럼 사진이나 영상은 그걸 붙잡으려는 시도인가요?”
베르그송: “시도일 뿐이지. 그 순간의 질은 오직 그 순간에만 있다네.”
진우: “그러니까 현재가 중요하군요.”
베르그송: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살아있는 다리이지.”
진우는 문득 베르그송의 눈이 그의 얼굴에 비해 깊고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진우: “지속을 아는 게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주나요?”
베르그송: “우린 흐름 속에서 창조하며 살아간다네. 지속을 이해하면 매 순간이 창조의 기회임을 알게 되지.”
진우: “그럼 시간 낭비라는 건 없나요?”
베르그송: “의식 없이 흘려보내는 시간이 바로 낭비이지... 의식하는 순간, 그 시간만 너의 것이 될 걸세.”
베르그송은 아인슈페너 잔을 비우고 일어섰다. 그의 콧수염에 휘핑크림이 살짝 묻었다.
베르그송: “흐름은 붙잡을 수 없지만, 그 속에서 사는 건 네 몫이다.”
진우: “오늘부터 더 의식하며 살아야겠네요.”
베르그송: “그게 지속을 사는 법이지.”
그는 자전거 도로 끝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양쪽에 가득한 메타세콰이어가 주는 원근감이 누군가의 그림과 같았다.
꽃가루가 바람에 흩날렸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진우는 생각했다.
“버스로 와서 자전거를 타고 달린 길, 바람이 부드럽게 볼을 스쳤다.
벤치에서 마신 아인슈페너의 달콤 쌉싸름함, 딸기 크로플의 향, 자전거 바퀴소리, 그리고 베르그송의 말.
시계로 잰 시간이 아니라, 내가 느낀 질과 무게가 나의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움도, 행복도, 고통도 모두 내 안에서 흐르는 ‘지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