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 악이란 의도인가, 구조인가
카페 디알로고스에서
진우가 한참 바라본 밖의 풍경은
유난히 불길한 잿빛 구름이 몰려오더니
결국 비를 세차게 내렸다.
진우는 빈 설탕통을 채우다 말고,
문득 손을 멈췄다.
단맛과 쓴맛 사이에서,
인간은 어떤 쪽으로 더 기울기 쉬운 존재일까?
첫 번째 손님은 한나 아렌트.
검은 목폴라, 단단한 턱선, 조용한 눈빛.
그녀는 앉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악은 괴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유하지 않는,
너무도 평범한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라빈이 물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악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아렌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없이 명령을 따르는 행위.
그것이야말로 가장 일상적인 악의 얼굴이죠.”
곧이어 두 번째 손님이 들어왔다.
지그문트 바우만.
회색 셔츠, 손에는 작은 다이어리.
그는 우산을 접고 외투를 벗으며 침착하게
아렌트의 말을 받으며 말했다.
“현대 사회는 악을 ‘합리화’합니다.
분업, 문서화, 책임의 분산,
이 모든 시스템이 악을 익명화시킵니다.
악은 의도가 아니라, 구조 속에서 작동합니다.”
진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알지 못한 채 악에 가담할 수도 있는 건가요?”
바우만은 씁쓸히 말했다.
“이미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죠.
단지 우리 삶이 너무 분절돼 있어 알아차리지 못할 뿐.”
그 순간, 세 번째 손님이 조용히 들어왔다.
도스토예프스키.
깊게 팬 이마 주름, 감정이 머문 듯한 눈동자.
그는 오래된 회색 코트를 입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악은 인간 안에 있습니다.
그건 절망과 무력,
죄책감과 욕망이 뒤엉킨 혼돈입니다.
나는 신을 믿지 못하면서,
악마는 믿었습니다.”
라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악은 의도인가요, 비극인가요?”
도스토예프스키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에는 머리카락에서부터 흐른 빗물이
속눈썹에 맺혔다가
마치 눈물처럼 얼굴의 주름을 따라 흘렀다.
“둘 다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사랑받지 못한 외로움이 악이 되기도 합니다.”
가지고 있는 손수건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주며 아렌트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사유는 책임을 부릅니다.”
바우만은 비를 맞아 조금 젖은
다이어리 표지의 빗물을 털어 내며 말했다.
“그리고 구조를 바꾸려는 자각이 필요하죠.”
바깥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었고,
비는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진우도 오랜만에 자신을 위한 커피를 한 잔 탔다.
커피는 평소보다 썼다.
메이플시럽 대신
오랜만에 설탕의 단맛이 필요했다.
왠지 아이스아메리카노에는 시럽을
뜨거운 커피에는 설탕이 맞는 것 같았다.
금색으로 도금된 작은 설탕스푼으로
고운 설탕을 흩뿌리며 넣었다.
뜨거운 커피 속에 설탕이 마치
'스르륵' 하고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이제야 커피의 맛이 생명을 받아 살아났다.
커피를 음미하며 진우는 노트에 적었다.
'설탕이 죽은 커피에게 생명을 줬다면
이 커피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성분 중에 분명히 '악'은 있을 것이다.
드러나냐 드러나지 않느냐...
단지 함량의 문제일 뿐일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생명 안에 악은 있다.
커피가 중독되는 이유는 아마
'악'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