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강화도북단 - 끝없이 이어진 철조망
강화도는 서울에서 1시간 정도의 거리이다. 오늘은 동우회와 함께 한 번도 걸어보지 않았던 강화도 북단길을 도보해보려 한다.
강화도에 여러 번 갔었어도 창후항(교동 선착장)은 처음이다. 강화도 선착장은 외포리와 교동 선착장 2곳이 있다. 오전 9시 30분부터 강화대교 북단 철조망 길로 도보여행은 시작되었다.
월곶돈대의 군사적 요충지인 연미정(燕尾亭)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데, 강화해협으로 흘러가는 물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제비 ‘연(燕)’, 꼬리 ‘미(尾)’자를 써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 정자는 높다란 주초석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정자 양쪽에는 오백 년 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우리를 맞이한다. 정자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개풍군, 파주 동쪽으로는 김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연미정은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한 장소이다. 조선은 오랑캐라 여겨온 후금 즉, 청나라를 형제처럼 대우해야 하는 굴레를 지게 되었다. 안타까운 굴욕의 역사를 지닌 연미정은 이곳에서 바라보는 달 풍경이 아름다워 강화 8경(마니산 단풍, 전등사 해 질 녘 종소리, 적석사와 장화리의 서해 낙조, 손돌목 조수, 연미정의 달맞이, 보문사 석불, 갑곶돈대 대교, 초지진 포대) 중 하나이다.
북쪽 해안도로를 따라 4km 정도에 길섶에 ‘숭뢰리’라 새겨진 장승이 서 있다.
숭뢰리는 이조시대 문인 송강 정철이 말년에 묶었던 집터가 있다. 이곳에서 머문 지 한 달여 만에 이조 최고의 시인이었던 송강 정철은 영양실조로 죽었다.
한때는 서인의 거두로서 서슬 푸른 권력을 휘둘렀던 송강이 대체 어쩌다가 강화섬으로 흘러들어 겨울 저녁 풍경처럼 스산한 말년을 보내다가 홀로 쓸쓸히 죽었을까?
임진난을 맞자 선조는 유배 중인 송강을 불러 명나라 사신으로 보냈으나, 사신을 다녀온 후 모함을 당하자 송강은 스스로 임금에게 사면을 청하고는 강화로 은거했다. 그가 은거처를 강화로 정한 것은 당시 강화에 살던 그의 문인 권필이 있었기 때문이고, 나라에서 급히 부를 때 바로 달려가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이어서 그를 보살펴 줄 이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 청렴한 성품과 정적 많은 그였기에 한 나라의 정승이었으나, 사면된 신분이었던 그의 말년은 비참하게 종말을 맞았다. 말이 영양실조이지 굶어 죽었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일행은 일정으로 송강 정철의 집터를 둘러보지 못했다.
강화 평화전망대는 강화도 최북단 양사면 제적봉에 있는 전망대이다. 남한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육안으로 볼 수 있어 이북 실향민과 관광객이 많이 찾는 강화도의 명소이다. 민족 동질성 회복과 평화적 통일의 기반구축을 위한 문화관광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민통선북방지역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건립되어 2008년 9월 5일 개관하였다.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대성면 삼달리까지의 거리는 2.3km로 해안가를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황해도 연안군 및 백천군으로 넓게 펼쳐진 연백평야가 있으며, 우측으로는 개풍군으로 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송수신 탑, 송악산 등을 조망할 수 있다.
처음 가보는 평화전망대 - 북한 사람들까지 육안으로 보이고 연백평야도 풍년으로 황금 들녘이었다.
정말로 가까이 보이는 북녘땅~ 간조에는 물이 빠져 걸어서도 닿을 듯하다는 느낌이라 한다.
강화도 북단에서 북한이 이렇게 가까울 줄은 몰랐다. 아직 이곳을 찾지 못하신 분은 강화평화전망대를 가보시기 바란다. 이렇게 가까운 한쪽의 절반을 남겨놓고 나머지 절반만 걷는다. 통일이 온다면 북한 곳곳을 걸어보고 싶다. 통일이 오면……
일행은 철조망 길을 계속 가고 있다. 가다 보니 서슬 퍼런 군사분계선 경고판이 보인다. 이곳은 민간인 출입이 쉽지 않은 민통선 구역이다. 일행은 그곳을 지키는 군인들(해병대)에게 몇 번의 출입 통재를 받았고 허락을 받아 도보여행을 할 수 있었다.
이중 철조망이 길게 그어져 있다. 휴전선이 그어진 지 72년째이지만 깊이 파인 골짜기는 매워지질 않는다.
북한과 남한이라는 철조망의 나라는 21세기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형국이다.
이 것은 형벌이 아닌 천형(天刑)이다.
골짜기가 깊은 만큼 봉우리도 높은 법이니 한반도는 끝 모르는 눈물의 양만큼 행복한 웃음의 나라가 되리라.
무태돈대를 지나니 해병 초소가 있어 어디 가냐고 묻는다. 24명이 전망대로 걸어간다고 하니 일단 통과해 주었다. 그러나 조금 더 가서 군 막사가 있고 안에서 지켜보던 행정관이 우리 일행을 제지한다. 군사통제지역이라 출입 허가를 받았어야 한다는 거다. 얼마 전에도 허가받지 않고 지나간 적이 있다며 사정을 하니 사진 촬영하지 말 것과 철책선 밖으로 나가라고 주의를 주며 겨우 통과시켜 주었다.
얼마 전인가 장마 때 떠내려와 이 우도에 갇혔던 이북의 황소를 구출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오른쪽이 애기봉이고, 그 가운데 희미하지만 멀리 삼각산(북한산)이 보인다. 개성에서 삼각산이 보인다더니 정말 그럴 것 같다.
구등곶돈대와 인화돈대를 지나면 창후리 여객터미널이 나온다. 이 길은 구릉이 많아 쉽지 않은 길에 속한다.
황금 들녘, 공활한 가을하늘, 하늘하늘 억새가 지천이다.
온몸이 가을로 물들었다. 가을은 찬란했다.
그러나 코스모스도 민들레도, 민들레씨도, 기러기도, 자유롭게 펄펄 날아다니는 곳,
사람만 오고 가지 못하는 천형의 이곳. 북한이 이리 가까운 줄 몰랐다.
통일이 오면……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 마음껏 걷고 마음껏 대화하고, 형제들 모두! 그렇게.
언젠가 인제에서 썼던 시가 떠오른다.
전 영 칠
어제는
보석가게 쇼우윈도처럼 반짝이던
크레모아의 밤하늘이었다
다시 우리는 누님을 찾아 마을을 등지기 시작하였다
떡갈나무 숲이 계곡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고
우리는 잠시 눈길 속에서 방향을 잃고 있었다
소매 자락을 흔들며
뒹굴어 가는 이 눈보라는
철조망 어디쯤에서 또
남으로 겨눈 병사의 쇠붙이를 퉁기고 있을까
5년 전 폐교된 누님과 내가 배우던 가갸거겨의 냉이골 분교와
쇠창살 꽂힌 담벼락, 굳게 닫힌 교실 문, 굴뚝같은 복도,
기억도 흐릿한 반쯤 개조된 한옥
반세기를 불어도 멈출 줄 모르는 바람과
가족사 3대
그 빛깔처럼 푸르게 멍든 칠판에 서서
지워도 지워도
다시금 그어야 하는 <38선>과 <휴전선>의 국사시간도
잠든 채 눈을 맞고
또다시 머리 큰 조카아이의 검은 테이프 칭칭 감은 크레용 곽과
그가 그린 진한 눈썹의 병사가 내게 아른거리기 시작하였다
광산의 아이는 검은 산을 그리고
인재 냉이 골 아이는 진한 눈썹의 병사를 그리는 것일까
아직도 미국제 중공제 군화 썩어 가고
무너진 참호
그 위에 핏기 잃은 잡초 몇 포기 동이동이 흔들리며
영국, 터어키, 오스트레일리아-
이방인들의 시체도 남으로 북으로 흙이 되고
일사후퇴에 나뒹굴어진
누님의 젖가슴에 묻은 지문도
지워지고
목발의 이웃 삼촌은 기웃기웃 노을 물든 눈으로
저잣거리로 두 홉 소주에 젖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기어가도
여전히 강토는 절반인 채
대를 이어 번들거리는 눈빛들
전선은 지금도 살아
긴 시간을 이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쏟아지는 바람 눈을 맞으며
또 하나의 언덕을 넘었다
이윽고 페인트칠처럼 반도의 한끝을 덮는
회오리바람과 눈 더미 사이로
누님의 무덤을 발견하였다
나는 쿨럭거리는 아우를 부추겨
무덤을 싸안았다
아득히 暴動의 하늘에는
철조망도 없었고
DMZ도 없었다
그러나 한치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듯
거뭇거뭇한 회색의 갈기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