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영은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다.
언제부터였는지 받은 만큼 되갚아야 마음이 풀렸고,
세상사를 자신 중심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컸다.
누군가 병들어 죽으면 순영을 괴롭히더니 신의 벌을 받았다고 믿었다.
심지어 누군가 늙어 죽어도 그랬다.
한 번은 동남아에 쓰나미가 닥쳐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을 때,
“그 나라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벌을 받았다”는 억지 논리를 펴기도 했다.
이렇듯 자기 세계에 갇힌 순영이 이제 할 수 있는 건 자신의 딸들을 서울대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진우를 포함한 자신을 무시한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자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순영이 교육을 위해 했던 실천적, 실질적 노력은 거의 없었다.
가끔 빈민가를 지나거나 전단지를 나누어주는 사람들을 가리켜 저렇게 안되려면 공부하라는 정도였다.
서울대 출신 아버지를 둔 딸들은 공부를 시작도 전에 이미 가난했는데도 말이다.
다행히 순영의 큰 딸은 공부를 잘했다.
그러나 서울대에 가지는 못했다.
객관적으로 좋은 학교에 들어갔다.
둘째는 공부에 취미가 없어 삼수 끝에 간신히 대학에 갔다.
셋째도 좋은 학교에 들어갔지만 순영의 기준에는 부족했다.
이러면 이혼한 남편에게 크게 큰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순영은 자식 교육을 책임 질 능력이 없었다.
순영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은 자식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 줄곧 말했다.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어서 말하고 또 말했다.
순영의 이십여 년 동안의 일관성 있는 교육 덕분에,
이 딸들은 이미 충분히 좋은 학력을 가졌음에도 마음속에 학벌 콤플렉스가 쌓여갔다.
이보다 슬픈 일이 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