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

by 김바람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


아빠가 없는 아이들의 시간이,
배우자가 없는 나의 시간이.


이렇게 무뎌지니

보기 싫은 일도,
짜증 나는 일도 없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 마시던

남편을 보지 않아도 되고,
회식에 절어

인사불성이 된 몸뚱이를
눕혀둘 일도 없다.


저녁이 하기 싫으면
아이들과 외식을 하면 되고,
설거지가 귀찮으면

다음 날로 미뤄도 된다.

주말 아침엔 눈치 보지 않고
아이들과 늦잠을 잘 수도 있다.


이렇게 몇 년을 지내다 보니,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법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만 무뎌지는 건 아닌가 보다.
남편도 어느새 무뎌졌다.


불륜을 저지른 일도,
아빠라는 자리를 놓아버린 일도,
우리 가족에게 남긴 상처도
이젠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가 죄책감 대신 평온을 선택했다는 게,
그게 참 별거 아닌 사람 같아서.

화가 나기엔

값어치가 없다.


사람들은 우리가

성격이 맞지 않아 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양육비를 보내며
착한 아빠로 남았고,
나는 그저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여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무뎌진다.
억울함도,

분노도,

설명하고 싶은 마음도

다 희미해졌다.

누군가가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잖아”라고 말해도
더 이상 정정해 줄 힘조차 남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해명하려는 마음보다

그냥 흘려보내는 법을 배웠다.

그게 무뎌짐의 시작이었다.

처음엔 슬픔이 줄어드는 게 두려웠다.
내가 너무 쉽게 잊는 건 아닐까,
그 시간들이 아무 의미 없는

흔적이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알게 됐다.
잊는 게 아니라,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내려놓는 거라는 걸.


누구는 죄책감 없이 평온을 택했지만,
나는 상처를 끌어안은 채로

평온을 만들어가고 있다.


억울함 대신 평온을,
분노 대신 무뎌짐을 택한

지금의 내가
어쩌면 그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모든 것이 그렇게,
조금씩 무뎌지며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 무뎌짐 속에서
나는 다시 내 삶을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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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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