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기준이야?
3년 회사생활을 하고 11년동안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쳤다.
처음부터 학원을 했던건 아니다.
처음에는 작은 원룸에 살며 소규모 그룹으로 수업을 하다가,
아이들이 불편하게 공부하는게 싫어서 옆원룸까지 자습실로 꾸며주다가.
방 3개짜리 아파트에서 수업을 하다가
강의실이 너무 좁은거 같아 넉넉한 강의실 2개가 나오는 공간으로,
그리고 꿈의 전자칠판까지 갖춘 교실 3개짜리 학원으로 확장을 했다.
누구에게는 너무나 미세한 몸짓이지만
나는 한해한해 자라고 있었고
처음부터 내 이름을 걸고 수업을 했기 때문에
매일매일이 치열했다.
친구중에는 외국에서 오래 공부한 친구도 있었고
한국에 들어와 취업이 안되자 엄마아빠가 영어학원을 내줄테니까
학원이나 하라는 친구도 있었다.
이 친구는 한방에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영어연수 한번 받은적 없는 내가
도태되지 않고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커가는것이 나름의 자부심이었다.
매일을 뒤쳐지지 않게 교육 컨텐츠를 만들고
아이들이 조금 더 효과적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아이들과 몇년을 지지고 볶으면서 공부하다보니
성적문제, 가족과의 갈들, 학교폭력, 이성문제, 진로문제.
아이들 편에서는 쉽게 풀기 힘든 문제들이 많다는걸 알게 되었다.
고등부 아이들은 속상한 일이 있던날은 내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미 애들이 문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뭔일이 있구나하고 직감이 온 나는
“오늘도 걔가 너한테 무례하게 굴었어?” 라며 앞에 수업 끝나자마자 말을 건냈다.
“쌤 어떻게 하셨어요? 진짜 오늘은요!!”
애들은 무슨일이 있으면 숨길수가 없었다.
들어와서 내 앞에 앉자마자
“니네 둘이 싸웠지?”
“오늘 얼굴이 왜이렇게 그늘이 져 있어?”
애들은 화들짝 놀라며 “선생님 어디서 보고 계신거 아니죠?” 물었고,
“니들이 암만 숨겨봐라 안보이나.”하며 나는 낄낄 웃었다.
일만 죽어라 하던 나에게 애들은 제자이기도 친구이기도 했다.
어떤 날은 언니가 됐다가, 어떤날은 엄마가 됐다가 또 어떤날은 도사님(?)이 되곤했다.
그렇게 11년.
아이들과 주말없이 공부하던 날은 아무리 피곤하도 하루 이틀 푹자면 다시 힘이 솟곤 했는데.
일을 좀 더 잘하고 싶은 욕심과
학부모들의 무례함들이
점점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버티고 버티다
내가 마음의 병이 온걸 자각했고,
내가 원하는 이상만큼 수업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아이들을 다 내보내고 학원을 접었다.
내가 잘 할 수 없는데 돈을 벌기위래 애들을 그냥 데리고만 있는건 죄처럼 느껴졌다.
최소한 아이들이 믿고 있는 만큼은 내가 가르치고,
학부모님들이 내시는 수업료만큼은 내가 역할을 해야된다고 생각해서
내가 나의 기능을 제대로 못하게 됐음을 인지 했을때
아이들을 더 나은 선생님에게 보내줘야 한다는건 당연했다.
나의 번아웃은 생각보다 심했고
돌파구를 찾다가 심리상담을 받게 되었다.
8번의 상담을 받으며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아이들에게 항상 하던 이야기를 상담선생님이 나에게 하시고 계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담을 하던 날.
상담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상담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봤어요.
선생님처럼 마음을 치유하는 상담가가 되고 싶어요. 이걸 현실적으로 하려면 제가 제일 먼저 뭘해야 할까요?“
“대학원을 가야죠.”
호기심어린 눈으로 봐라보는 나를 선생님은 즐거워 하시면서 기본서가 무엇인지 어느학교가 커리큘럼이 괜찮은지 신나게 이야기 해주셨다.
나는 그날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직 서류전형을 하고있는 학교가 있는지 찾아보았고
딱 1개 특수대학원이 원서 마감이 끝나지 않을 것을 확인하고 원서를 쓰고 공부를 시작했다.
면접까지 4주 남짓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학교는 구술면접 시험범위가 사악하기로 유명했다.
심리학개론, 상담이론과 심리평가, 이상심리학, 발달 심리학까지.
책으로 대략 6권 정도 였다.
면접에서 대답만 다 해도 승산이 있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 픽업하고 밥먹이는 시간 빼고 공부에 매달렸다.
6권에서 중요내용을 빼서 수첩에 나의 언어로 다시 정리를 했다.
면접 날.
심장이 입밖으로 나올 만큼 떨렸지만
교수님들이 물어보신 내용에는 모두 맞게 대답을 했다.
물론 너무 떨려서 나는 내가 염소가 된 줄 알았다.
달달달달 떨림을 눌러가며 답을 하였다.
네명이 한조였는데 시험 범위가 넓어서 그런지
2가지 질문에 다 대답을 못한 지원자도 있고, 한가지만 짧게 이야기 한 지원자도 있었다.
비록 염소였지만 나와서 모두 제대로 내용을 이야기한걸 확인하고 나는 조금 들떠있었다.
몇주 후 결과는 불.합.격
며칠 결과에 정신이 나가 있었지만.
공부가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었기에 다음학기에 제대로 도전해보자고 마음을 다독였다.
겨울 내내 도서관으로 출근을 하며 공부를 하였고
어떤학교는 토익점수 없이는 원서 접수가 안된다기에 내 인생에는 다시 없을꺼라 여겼던 토익공부도 하였다.
사실 항상 먹고사는 것이 걱정인 내 인생에 대학원은 범접불가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 쪽 문화가 어떤지 아는게 없어서 주변에 대학원을 다니는 동생과 대학원생들의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를 접했다.
나이가 있는터라 입학이 더 어려울것 같아서 입시 컨설팅하는곳에 약간의 비용을 내고 상담을 요청했다.
다른건 몰라도
11년동안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느낀 현실적인 청소년들의 고민과 그리고 2-30대를 치열하게 보낸 청년으로서의 고됨을 알고 있는게 나의 강점 이라고 생각했다.
컨설턴트는 무미건조하게 이야기 했다.
“3년 회사 생활 하셨고, 11년은 공백이시네요?”
“공백이라뇨? 저는 11년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는 걸요.”
“자영업은 여기서 경력으로 안쳐요.”
무슨 논리인지는 모르지만 그렇단다.
‘아니. 나처럼 바닥에서 몸으로 뒹구며 처절하게 배운 사람이 어디있다고 저런말을 하지?’
심리 쪽은 상위 몇개대, 그리고 외국대 아니면 경력으로 안친단다.
‘아니 머리좋고, 공부도 할 줄 알고, 명문대에 딱 붙는 행운도 있고, 외국에가서 공부를 시켜 줄 수 있을 정도로 부모가 경제적이 능력 있는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그렇게 문제 겪을 것이 있나?’
버스비, 라면값도 모르는 국회의원들이 민생경제를 안정화 시킨다며 떠들어대는 뉴스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해 할 수 없는 그 룰들을 듣고나니
내가 얼마나 나의 경험을 예쁘게 포장해야 교수들이 매력을 느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입을 맞춘듯, 미리 보낸 컨택 메일에 교수들은 다 읽고도 답이 없었다.
좌절하기 이르다고 생각하고 리마인드 메일을 보냈다.
여전히 읽고 대답이 없었다.
‘우리학교에 관심가져주어서 감사합니다. 면접날 봅시다.’ 이 정도의 인사도 보내줄 수 없었던 것인가
심리학을 하는 사람들이라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실망감이 커졌다.
그렇게 교수들의 답문을 받지 못한 채 두달을 꼬박 쓴 학업계획서를 제출했고,
면접 4일전에 나는 대상포진에 걸리고 면접 3일전에 오른쪽 턱 마비가 왔다.
작년 늦가을 부터 올해 봄까지
몽글몽글 자라던 새싹은 작은 새싹도 못틔우고 그렇게 꼬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