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언증

고의는 아니었어.

by 솜사탕수박라떼

연애를 많이 해 본건 아니었지만, 한 사람을 만나면 진득하게 만나는 편이었다. 참 변화무쌍한 성격이었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온 마음을 그에게 쏟았다. 그래서 그런지 헤어짐이 사무치게 힘들지 않았다. 나는 열렬히 사랑했고 그것이 끝에 달았다고 하니 미련없이 돌아설 수 있었다. 기나긴 연애가 끝나고, 서른이 갓 넘었을 때,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그 놈이 그 놈이다.'

사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다. 어떤 사람은 누추하고 어떤 사람은 화려해도 다들 각자의 숙제와 남에게 쉽게 내보이지 못하는 질투심과 열등감을 가지고 산다. 다만 그걸 들어내보이느냐 마느냐의 차이일 뿐.

비싼 옷에 넓은 고급 아파트에 사는 사람도 안씻으면 냄새가 나고, 꽃향기가 날 것 같이 아름다운 사람도 대변을 본다. 그건 똑같다.


서른쯤 되니 친구들이 하나 둘씩 짝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부럽다기 보다는 신기했다. 어떤 매력이 있어서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저 사람을 얼마나 믿길래 결혼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부모님의 쉽지 않았던 결혼 생활을 보며, 결혼생활이 얼마나 힘든것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나는 친구들에게 항상 물었다.

"어떻게 결혼까지 결심을 하게 됐어?"

친구들의 대답은 다들 별반 다르지 않았다.

"좋으니까."

"그냥 결혼 할 때도 됐고, 마침 옆에 있으니까."


내가 제일 신기한건 때가 됐다는 거였다. 나는 그때 혼자 작은 개인과외를 꾸려나가며 에너지를 불 태우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그 때가 뭔지 모르겠더라.

결혼할 준비가 됐다는 건가? 그냥 나이가 찼다는 건가?

객관적으로 봐도 난 결혼을 준비할 만큼 돈도 없었고, 우리집에 그런일은 바라기 힘들었다.

그리고 나이라.. 음.. 나이는 계속 먹기만 하는데 계속 차지 빠질리는 없지않은가.


그래서 내린 결론은 ' 아! 나는 결혼은 못하겠다' 였다.

자신이 없었다. 내 인생을 맡길만큼 뜨거운 사랑을 하기엔 '그놈이 그놈이라는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세상에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들었다. 먼저 결혼한 친구들을 보면서 아무리 우리 사회가 남녀평등 이라고는 하지만 여성이 일을 하고 결혼하고 가정생활을 꾸린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희생이 필요한 것도 알고 있었다.


비혼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나는 결국 '비혼' 일 수 밖에 없겠다 싶어서.

친구들이 소개팅 좀 하라고 하면 나는 우리 솜이랑 재밌게 살겠다고 머리검은 짐승은 거두는거 아니라며 농담조로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한 이삼년. 친구들이 등떠밀어 나간 몇번의 소개팅에서 나는 이렇다 할 유쾌한 사람을 찾지는 못했고 겉으로 표현을 안했지만. '난 진짜 외로운 팔자인가봐.' 라고 결론을 내리며, 더 비참해 지지 않기위해 결혼 안한다고 이야기 하고 다녔다.


근데 이게 웬걸?

다음해 봄에 결혼을 앞둔 친구가 예비 남편에게 "내 친구 외로운데 자기 주변에 좋은 사람없어? 노력 좀 해."

라며 핀잔을 주었는데, 친구 남편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 진짜 괜찮은 형 있는데, 만나볼래요?" 라고 물었다. 나는 그 전에 이미 자포자기 상태였기 때문에 "네네. 누구든지요. 저 주말에 시간 남아요."하고 대답을 했다. "그럼 제가 연락처 드릴게요."


그리고 이틀 뒤,

그 남자에게 카톡이 왔다.

"뭐야? 뭐 좀 신기한 사람이네?" 첫 문자가 내가 일하던 곳 바로 앞에 있던 카페의 커피 쿠폰을 보낸 것이다. 소개팅 앞 둔 남자가 원래 이렇게 바로 선물을 보내나 참 신기하기도 하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틈틈이 보내는 카톡에 그 사람의 서투름과 어색함 그리고 따뜻함이 묻어나왔다.

때가 잔뜩 묻은 30대 중반을 달리고 있었던 터라, 그 서투름이 투박해서 좋았다.

메시지는 하루종일 중간중간 이어졌고, 나는 이러다간 만나서 할말이 없겠다는 생각에 "그냥 괜찮으면 오늘 일 끝나고 보는건 어때요? 저 10시에 수업이 끝나는데."라고 보냈다.

"아... 그게 제가 아직 세차도 못했고 머리도 안잘랐는데. 허허"

뭐 이렇게 싱겁냐. 나는 궁금한건 못참는 성격에 "그래서 못 봐요?" 내 질렀고,

"아니에요. 일 끝나는 시간에 맞춰 갈게요." 라고 대답했다.


까만 얼굴에 호리호리한 남자가 안절부절하며 서 있었다.

"저 만나러 오신거죠?"

"아! 네... 타세요."

"차 한잔 해요."

나는 시골에 살아서 그 시간에 문을 연건 강변 투썸밖에 없었다.

커피를 앞에두고 그 남자는 이말저말 아무말이나 열심히 했다.

내가 커피를 좋아 한다니까, "저도 커피 좋아하는데, 제가 타면 다들 맛이 없다고 하더라구요. 허허허허"

너무 열심히 아무말이나 해서 속으로 "얘는 뭐지?" 라는 생각을 했는데 참 이상하게도 웃을 때 반달로 내려가는 선한 눈꼬리가 마음을 갈고리 처럼 잡아끌었다.


만나는 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리숙함과 세상물정 모르는 듯한 모습이 내 마음속에서 'go'를 외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 만날거에요 안만날거에요?"

"예?? 아... 만나야죠 근데 천천히 알아가면서..."

"아니 바쁜 30대 남녀가 시간을 내서 만나는데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을 뭐하러 천천히 알아가면서 만나요? 만날 명분이 없잖아요? 알아가려면 만나야하지 않겠어요?"

나는 맞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빠르게 직진이라 어안이벙벙한 그를 보며 쏘아 붙였다.

"전 당연히 만나고 싶죠."

"아니 그러니까 만날거에요 안만날 거에요?" 쓸데없이 선생님 기질이 나와서 되물었다.

"만나요!'


그 후 삼개월 뒤,


커피를 마시다가 내가 문득 물었다. "근데 오빠 그래서 나랑 결혼 할거야 안할거야?"

"아니. 내가 아직 준비가 안되서..."

"준비 다하고 결혼하면 관속에서 해야돼. 누가 결혼 준비를 다하고 결혼하니?"

"해야지!!!!"


그 후 3개월 뒤,

작은 집을 얻어 이사를 하고 혼인 신고를 했다.

만남부터 결혼까지 6개월 남짓.


친구들은 신나게 나를 놀려댔다.

"야. 쟤 허언증이야. 결혼 안한다더니 초고속이잖아. 아니 남친 생겼어 다음 대사가 나 결혼해야 이게 말이 되니? 이제 제 말 믿지마."


나는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 뒤로 허언증으로 불렸다. 근데 그 허언증이 시리즈가 아직 남았다는 것이 더 골 때리는 일.

더 이상 단언하지 않는다. 사람일은 진짜 모른다.

근데 친구들아 진짜 고의는 아니었어.


그리고 그 까맣고 호리호리한 남자는 나와 한 집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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