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거리 마라톤
'갈까?, 말까?' 며칠 전부터 내 마음을 흔들어대는 단어다. 밀양마라톤이 다가올수록 흔들림은 더 격해졌다. 남편의 한마디에 예고 없이 올해 버킷리스트 목록에 올려둔 10킬로미터 달리기가 어느새 내일로 다가왔다. 접수한 그날부터 헬스장에서 시작된 달리기는 할 만했다. 기록도 나쁘지 않은 탓에 ‘해 냈다.’ 보다는 ‘잘 달렸다.’라는 쪽으로 욕심을 내 점점 속도를 높여갔다. 단축된 기록의 희열 끝에 매달린 과욕이 결국 사고를 쳤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족저근막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몇 번 달리기를 시도해 보았지만 야속하게도 그때마다 통증은 되살아났다. 달리기를 중단한 지 한 달가량 되어가니 고민은 더 깊어 갔다. 참여 여부를 망설이는 내게 남편이 몇 번에 걸쳐, "걷는 사람도 많아. 걷더라도 같이 가자."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반복된 권유에 이끌려 결국 이른 아침 밀양으로 향했다. 밀양 종합운동장에서 만난 날씨는 흔히 접하는 이월이 아니었다. 바람 한 점 없이 무심하게 내리쬐는 햇살의 강렬함은 이른 초여름을 불러온 듯했다. 날씨보다도 뜨거운 현장의 열기까지 더해지니 여기저기서 참여자들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는 것이 보였다.
행사장임을 알리듯 종합운동장과 보조경기장 내에는 설치된 부스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부딪히지 않으려고 조심해서 다녀야 할 만큼 인파로 넘쳐났다. 젊은이들 사이에 달리기 크루가 인기라고 하더니 삼사십 대가 유독 많이 눈에 띄었다. 같은 색상의 옷과 모자와 등 뒤에 새겨진 단체명이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햇살 담아 빛났다. 달리기라는 취미가 불러온 밝은 웃음소리와 카랑카랑한 외침은 자원봉사자들의 부스에서 펼쳐진 지역 농산물 시식회와 더불어 현장의 활력을 더했다.
'뛸까?, 말까?' 다시 한번 갈등 위에 섰다. 달리다가 멈추고 혼자 되돌아서 걸어오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여기저기서 풍겨오는 에너지가 나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여기까지 왔는데 달리는 이들을 바라보기만 해야 할까. 중간에 멈추게 되면 어떡하지. 올해 나의 첫 버킷리스트인데 포기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남편에게 들었는지 오랜만에 만난 동호회 회원들까지 천천히 뛰다가 아플 때 걸으면 된다며 참여를 독려했다. 연습한 지난 시간이 억울하게 느껴지는 순간 날아가 버릴 목표 하나가 떠올랐다. 현장 분위기마저 그런 나를 일으켜 세웠다. '시도도 해 보지 않고 포기한다면 남은 한 해를 잘 버텨낼 수 있을까. 그래. 해 보자.' 나는 달리기로 결정했다.
출발선에서 '1시간 10분'이라고 적힌 풍선을 허리에 매단 페이스메이커 뒤에 섰다. 욕심을 내려놓고 천천히 그들 뒤에서 나만의 속도를 찾아 달려보기로 했다. 출발 총성이 들리자, 뒤에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부딪힐 듯 스치며 세차게 내 앞으로 내달리는 것이 아닌가. 완주만을 생각하고 그들의 등 뒤를 바라보며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종합운동장을 벗어나 도로를 달리다 보니 이내 소로로 들어섰다. 메마른 논밭이 끝없이 펼쳐졌고 어디선가 거름 냄새도 풍겨왔다. 시골의 흙 내음과 낯선 풍경은 잘하고 있다는 격려로 다가왔다. 곳곳에서 메아리치는 지역 주민들의 응원을 받으며 반환점을 돌 무렵 하나둘 걷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을 지나치며 어느새 나는 자연의 품에서 느린 달리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8 킬로미터 지점임을 알리는 푯말을 지나칠 무렵 앞서가는 한 사람이 지친 나의 시선을 끌었다. '헉, 저 노인 뭐야'라는 외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약간 휘어진 왼쪽 다리와 가냘픈 오른쪽 다리로 휘청거리듯 달리고 있는 칠 팔십 대의 왜소한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불편한 자세지만 달리기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달리면서 보지 못했는데 아마 그가 나보다 앞선 출발선에 있었나 보다. 자신만의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는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길 위에서 인생의 스승을 만난 듯한 감탄스러운 눈길로 그를 쫓을 때, 멈추고 싶다는 나의 얄팍한 잔꾀는 소리 없이 녹아내렸다. 마지막 오르막길이 힘겨울 수도 있는 그를 떠올리고, 보내주지 않은 그의 응원에 힘을 내어 결승선을 통과했다.
해냈다는 성취감이 밀려들었다. 느리게 달린 탓인지 다행히도 발에 통증은 나타나지 않았다. 망설일 때 지금과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누리지 못했을 순간이라 더 소중하게 다가왔다. 많은 이들이 이런 맛에 어렵고 힘든 쪽을 선택하고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1:10:19'라는 기록을 받았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렇게 올해 나의 목표 하나를 소리 없이 건넜다. 그날의 달리기를 떠올리면 결승선을 통과할 때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지금도 뛰고 싶은 마음이 이는 걸 보니 나의 달리기는 계속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