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과 권위보다 소중한 것들
그 당시만 해도
선생님이라는 권위는 참으로 컸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기르다 보니 알게 된다.
아이들은 엄마의 인내심을 바닥 내고 시키는 건 꼭 반대로 하는 청개구리가 따로 없다.
그런데, 내가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은 달랐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내가 하는 말을 고스란히 잘 따라왔다.
아이들이 참 착하구나 생각만 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아이들이 선생님이라는 권위 앞에서 자신들의 속내를 인내했겠구나 생각이 든다.
그런 아이들이 보여준 순수한 마음은 지금도 생각이 난다.
어느 날, 은숙이가 두 손을 등 뒤에 감춘 채 자꾸만 선생님! 선생님! 부르기만 하면서 쑥스러워하길래 "괜찮아 뭔데?" 하고 물었더니 수줍게 작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직 채 여물지 않은 조그만 사과 한 개가 들려 있었다.
선생님 주고 싶은 마음과 쑥스러운 마음 사이에서 얼마나 망설였을까?
순수하고 수줍은 그런 마음들이 내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은 그렇게 조그만 빵이나 과자 같은 소소한 선물을 수줍게 내밀곤 했다.
하지만, 교실에서 생활지도는 언제나 순탄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그렇듯
매일 새로운 문제들이 끊임없이 생겨났다.
수업 중 누군가 손을 들고
"선생님, 화장실 갈래요!" 하면
여기저기서 저도요! 저도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다 보면
수업 분위기는 순식간에 흐트러지곤 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수업 시간에 복도를 오가는 아이들은 대부분 우리 반 아이들이었다.
서너 명만 오고 가도 수업 분위기는 금세 어수선해졌다.
다른 반 아이들은 수업 중에 밖에 나오지 않은 걸 보니, 내가 아이들에게 너무 느슨한가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제안을 했다.
"쉬는 시간에 모두들 화장실 다녀오세요.
이 시간 이후부터는 수업 중에 화장실 가는 건 안됩니다!."
아이들은 대부분 그 말을 따랐다.
그런데 서너 명 아이들이 화장실을 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너희들은 화장실 안 가니?"
내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오줌이 안 마려운데요?"
"그래, 담 시간부터 수업 중에 화장실은 안 된다."
다시 당부를 한 후
'이젠 우리 반도 수업 분위기가 잡히겠구나'
기대 속에 수업이 시작되었다.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맨 앞자리 정환이가 손을 들었다.
"선생님, 오줌 마려워요!"
수업 시작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고,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 화가 났다.
"이번 시간부터 수업 시간 화장실 금지라고 했는데 화장실 안 갔니?
그러기로 모두 약속했잖아. 이번 수업 끝나고 가기로 하자!"
어제 일도 아니고, 불과 한 시간 전에 했던 약속을 어기는 걸 용납하면 안 될 거 같았다.
그리고 학교 화장실 가기 싫어서 하루 종일 소변을 참은 기억이 많았던 나는, 한 시간 소변 참는 일이 힘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뒤돌아서 칠판에 판서를 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교탁 아래로 무언가 흥건하게 흘러내려왔다.
설마...
놀라서 돌아보니, 잔뜩 찡그린 채 눈을 내리깐 정환이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너무 당황했다.
결국 수업은 중단되었다.
친구들 앞에서 무안할까 봐 정환이에게 다가가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많이 급했니?"
다행히 정환이는 집이 근처라고 했다.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올 거냐고 했더니 그러겠다고 한다.
정환이 부모님이 아셨으면 많이 속상하셨겠지만. 학교로 연락은 오지 않았다.
부모님이 안 계신 사이에 갈아입고 왔는지 모를 일이지만, 다행히도 정환이는 집에 다녀와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남은 시간을 이어갔다.
그날 하루 일과가 끝날 때까지 생활 지도의 어려움에 막막한 심정이 되었고, 정환이가 마음에 걸려 몇 번이나 정환이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요즘 같았으면 큰일이 났을 일이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정환이 역시, 어디선가 그 일을 이야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일 이후로 나는 더 신경을 썼다.
아이들 말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남의 반과 비교하기보다 아이들의 마음을 더 헤아리려 노력했다.
규칙과 권위를 앞세워 아이들 마음에 상처를 주는 건, 진정한 교육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 이후로 "수업 중 화장실 금지"라는 말은 우습게 사라졌고, 아이들은 허리에 손을 하고 다시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지금 정환이를 만날 수 있다면 아무 말 없이 꼭 안아주고 싶다.
아니, 한마디 사과로는 부족하다.
정환이가 좋아하는 밥이라도 한 끼 사줘야 될 거 같다.
"정환아, 친구들 앞에서 얼마나 창피했니?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잊지 않고 있단다.
그땐 정말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