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로부터의 자유 VS ~로의 자유]

`~로의 자유'를 위해 `감히` 던지는 제안


`에리히 프롬`은

1900년 태생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대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으로

사회심리학자이면서 정신분석학자, 인문주의 철학자이다.

저서로 <자유로부터의 도피>,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 등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900%EF%BC%BFScreenshot%EF%BC%BF20250618%EF%BC%BF220505%EF%BC%BFGoogle.jpg?type=w966 구글 이미지 -에리히 프롬-


`에리히 프롬`은 자신의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사회심리학적으로 파시즘을 분석하면서 권위주의의 성격을 설명한다.


보통 파시즘이 확산된 것은

대중이 나치 지도자들에게 속거나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의 사상가 `빌헬름 라이히`는


대중이 속은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파시즘을 욕망했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고 1933년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책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


`빌헬름 라이히`는

1897년 태생의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이다.

정신분석과 마르크스 이론의 통합을 꾀하는 동시에 억압적인 성도덕을 비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현재에도 파시즘의 기본 문헌으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900%EF%BC%BFScreenshot%EF%BC%BF20250618%EF%BC%BF220602%EF%BC%BFGoogle.jpg?type=w966 구글 이미지 -빌헬름 라이히-


이러한 관점을 토대로 `프롬`은

사회적 성격이란 하나의 집단에 공통된 성격을 뜻하는데

파시즘 특유의 사회적 성격으로 권위주의적 성격을 들면서


`프롬`은

권위주의적 성격은 권위를 찬양하고 힘 있는 자에게는 복종하지만 힘이 약한 자는 강압적으로 지배한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프롬`은 더욱더 강력한 경고를 한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나치 지도자들의 성격만이 아니라 대중의 심리 구조이기도 하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고 말하고 있다.


그 원인을 `프롬`이 밝히는데

중세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이행되면서


근대인은 `중세 사회의 전통적 신분으로부터의 자유`는 얻었지만
`개인에게 고독과 고립의 감정`을 유발했다고 하면서
고독과 무력감을 해결하기 위해서 `파시즘`이 필요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즉 강력한 지도자에게 복종함으로써 고독과 무력감을 해소하려고 한다.


고 주장한다.


중세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나타난 현상은

중세 사회에는 많은 위험이 존재했지만

인간은 그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다고 느꼈다.


수백 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 끝에 인간은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물질적 부를 쌓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인간은 세계 곳곳에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했고,

최근에는 전체주의의 새로운 책동에 맞서 자신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인은 아직도 불안하다는 것이다.

[출처] 자유로부터의 도피 -휴머니스트 출판사 서평-


이러한 근대인의 불안은 현대인 곧 우리에게도 이어져 오고 있다.

이렇게 불안한 우리는 자본주의와 권위자들에게

우리의 자유를 넘겨주고 있고

스스로 기계의 부품이 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한편으로 꼭두각시 같은 인간이 되는 것을 오히려 편안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도망갈 곳도 없이 그저

꼭두각시처럼 사는 것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한때 그랬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주었고 해결해 주었다.

부모님의 그늘막이 너무나 편안했고 무엇을 해도 자유로웠다.


꼭두각시였지만 부모님의 방어막 아래 행할 수 있었던 자유는

지금 돌이켜보면 무엇이라고 말로 할 수 없는 평온함과 행복, 자유였다.


누군가 강력한 어떤 존재가 내가 무엇을 해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어준다는 그 자체가 신라시대의 소도와 같은 존재였다.


이제는 바뀌었다.

부모님도 캐어해야 하고 자식도 캐어해야 한다.

세상은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살아가야만 한다.


참 어쩔 수 없는 고민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꼭두각시다 되어서라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스스로 대박 나지 않으면 `~로의 자유`는 없을 것이기에 말이다.


그렇다고 권력자들이 어떻게 잘 이끌어 주길 바라는 것도 답은 되지 않는다.

권력자들이 우리들에게 베푸는 것은

한순간의 만족과 기쁨일 뿐 장기적인 방책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각 가정마다 매달 100만 원씩 준다면

각 가정은 이자를 갚고 생활하면서 지금보다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빚을 위해서 우리는 지금 보다 더 강제적으로

어떤 일에 동원될지도 모른다.


먹고사는 것은 좀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더 기계적으로 어쩌면 더 강제적으로 움직여야만 하는 삶이 우리를 휘어잡을 것이다.


그래서


감히 제안해 본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곧 FED 가 `돈을 뿌리고 거두고 하는 방식`처럼

거둔 세금으로 우리들에게 주지 말고


피라미드 제일 꼭대기 층에 분포되어 있는 자들이 매달 받아 가는 돈으로

소득세니 상속세니 등등 거두지 말고


그 돈으로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길 바란다.


그러면


피라미드 제일 꼭대기 층은 그래도 끄떡없을 것이고
우리들은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조금은 수월할 것이고
우리들이 일을 하려는 마음도 힘이 날 것이므로
노조활동이 줄어들 것이고
기업들의 일이 좀 더 효율적으로 돌아갈 것이고
국제적인 수출에도 탄력을 받을 것이고
동네 골목상권도 살아날 것이고
그래서 세금도 잘 낼 것이고
기업의 제품도 잘 살 것이므로 기업의 매출이 올라갈 것이고


결국에는 피라미드 상위권의 월급이 다시 두둑해질 것이다.

당연히 국가의 부채는 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피라미드 중간층은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들은 먹고사는 정도는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먹고사는 정도는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라미드 하위층이 저 돈을 받는다면 일단은 먼저 국내에서 돈을 써야 한다.


그렇게 국내에서 돈이 유통되도록 한 후 그래서 국내의 경제 경직성이 줄어들어

경제의 혈맥이 원활하게 돌아가면 그때 해외로 눈을 돌려야 될 것이다.


아울러 이들 중 일할 능력이 되는 자는 일자리를 구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하위층이 일할 능력이 되는데 무위도식한다면 안 될 것이다.

만일 일할 생각이 없다면 저 돈을 받으면 안 된다.


피라미드 중간층이 자발적으로 받지 않으니

사회주의이거나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멀 것이고 피라미드 하위층도 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함정인 `편중되는 부`를 아래쪽으로 분산시켰으니 조금은 공평해졌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대안에도 함정은 있을 것이다.


더 나은 대안을 바랄 뿐이다.










keyword
이전 10화[칼럼][실용주의 VS 화용론話用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