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생활 세계 VS 체계]

우리 모두가 `동시에` 움직여야 하는 이유

위르겐 하버마스는

1929년 태생의 현역이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심리학자이며 언론인이다.

소통 행위의 이론에서 공공 영역의 개념과 공론장과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주장하고 있다.

저서로 <소통행위이론>, <커뮤니케이션 행위이론>, <의사소통 행위이론> 등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900%EF%BC%BFScreenshot%EF%BC%BF20250619%EF%BC%BF173707%EF%BC%BFGoogle.jpg?type=w966 구글 이미지 -위르겐 하버마스-


하버마스는 그때까지 지배적인 `도구적 이성`이라는 개념을

`의사소통적 이성`으로 개념을 전환하여 사고하면서


`도구적 이성`을 `성과 지향적 행위`로

`의사소통적 이성`을 `양해 지향적 행위`로 구별한다.


`성과 지향적 행위(전략적 행위)`는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자연과 사물, 다른 사람들을 조작하고 지배하는 것이고

`양해 지향적 행위`는
다른 사람들의 상호 이해를 구하고 행위하는 것을 뜻한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이처럼 이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깊어지게 된 이유는

근대에 발생한 `이성에 의한 폭력`이 발생하면서부터인데


말하자면

이성적인 사람이 `아우슈비츠` 같은 야만적인 행위를 한 것에 대해

올바른 이성이 어떻게 이와 같은 행위를 하게 됐는지 그 원인을 찾으면서 비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이 찾은 답은

이성에 의한 억압 곧 이성의 폭력 때문이라고 원인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이러한 이성에 대한 비판에는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미래를 파국적 모습으로 전망하면서
아무런 희망도 제시하지 못하거나, 전근대적 해법에 의존하고 있다.

[출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 읽기 - 하상복, 세창미디어 출판-


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근대 이성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것,

하지만 그 이성을 떠나거나 부정하지 말고 새롭게 사유하며 재구성할 것

[출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 읽기 - 하상복, 세창미디어 출판-


을 강조하면서

하버마스는 `생활 세계의 <의사소통 합리성> 원리`에 의해 이성을 조명한다.

이러한 <의사소통 합리성>이 동작하는 무대가 바로 `생활 세계`이고


이 `생활 세계`는

그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인 조건이다.

[출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 읽기 - 하상복, 세창미디어 출판-


라고 말하면서

타인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나 자신에 대한 비판도 동시에 해야만

의사소통이 올바르게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우리는 흔히 타인은 비판에 노출하지만

자기 자신을 비판에 노출하지는 않으므로 의사소통 합리성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출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 읽기 - 하상복, 세창미디어 출판-


이는 지금 우리 언론들이 새겨들어야만 하는 말이다.

공공언론이든 유튜브와 같은 개인 언론이든
타인은 비판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비판하지 않는다.

그리고 타인이 옳은 말을 하여 할 말이 없으면
그것은 주장이지 사실이 아니다면서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이렇게 해서는 절대로 우리 사회가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다.

내가 비판을 받을지라도 타인의 옳은 말에는 인정할 줄 아는 자세가 있어야만 한다.


이어서 하버마스는 ‘생활 세계’와 ‘체계’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데


`생활 세계`는
반드시 언어적 의사소통을 통해서 행위 조정이 이루어져야 하는 영역을 말하고

`체계`는
권력과 화폐와 같은 비언어적 매체를 통해 행위 조정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한다.

[출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 읽기 - 하상복, 세창미디어 출판-


쉽게 말하면

`생활 세계`는 우리가 살면서 행하는 사적인 영역이고

`체계`는 국가의 시스템이 돌아가도록 하는 공적인 영역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러면서 하버마스는

근대 사회의 구조적 특징이 바로 `생활 세계`로부터 `체계`가 분리된 것이라면서

사회가 커지면서 다양성이 커져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체계`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되면

`체계`는 더 큰 기능적 역량을 갖게 되고

`생활 세계` 역시 더욱더 언어적 의사소통의 고유한 논리에 따를 수 있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체계`와 `생활 세계`가 분리되기는 하지만

`생활 세계`는 여전히 사회의 기본이 되는 세계이므로

어떤 영역을 어느 정도까지 `체계`의 논리에 맡겨둘 것인지를 정하는 것은

`생활 세계`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체계`는 `생활 세계`로부터 분리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생활 세계` 안에 닻을 내려야 하므로


`체계`와 `생활 세계`가 분리되면서도
동시에 `체계`가 `생활 세계`에 닻을 내릴 수 있으려면,
`체계`와도 연결될 수 있고 `생활 세계`와도 연결될 수 있는 특수한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출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 읽기 - 하상복, 세창미디어 출판-


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연결고리가 `법`이 되어야 한다


고 하버마스는 말하고 있다.


`생활 세계`에서 개방적 의사소통에 따라 합의된 규범이 `법`으로 구체화되고

`체계`가 이런 `법`에 따른다면, `체계`의 독립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강력한 힘이 된 `체계`는 `생활 세계`의 의사소통을 왜곡하고
오히려 `생활 세계`를 `체계`의 기능적 부속물이 되도록
강제하는 경향을 가질 수가 있다고 경고하면서
자본과 관료제가 `생활 세계`에 깊숙이 침투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을 하버마스는 <생활 세계의 식민지화>라고 한다.


`체계`가 `생활 세계` 합리화의 결과이면서,
또한 합리화된 `생활 세계`를 위협하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는 모순이 발생한다면서
`자본주의 경제`도 `사회 합리화`의 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출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 읽기 - 하상복, 세창미디어 출판-


말하자면

개인과 집단이 생활하면서 규모가 커지게 되어

국가와 같은 `체계`와 `자본주의`가 성립하게 되었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법`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바로 이 `법`이
`체계`가 `개인과 집단`을 `식민지화`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정리해 보면 하버마스가 말하는 `이성`은

이성이 `체계`의 도구가 되어 `성과 지향적 행위`를 해서는 안 되고

서로 상호 이해를 구하는 `양해 지향적 행위`를 하는 이성이 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나타난 `의사소통의 행위`가 규모가 커짐으로 해서

어떤 `체계`가 탄생하여 `법`을 통해 `의사소통 행위`를 조정한다는 말이다.


`법`으로 `의사소통 행위`를 조정하는 가운데

자본과 관료제 그리고 자본주의가 개입하여 개인과 집단을 `식민지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양해 지향적 행위`를 단계적으로 설명하는데
먼저 누군가가 의뢰를 하면 그 의뢰에 대해 반문을 하든지 응답을 하게 되는 것처럼

`토의`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또한

하버마스는 `토의`가 수행되는 조건을 명확하게 제시하는데


참가자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조건 아래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러한 조건에서 참가자들의 합의에 따라 승인된 것을 진리로 여겨야 된다고 주장한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rte 출판-


하버마스가 대안이라고 제시한 '토의'가 너무 이상적이고 이론적이다.

모든 학자들이 지금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

국가와 국가의 관계, 한 국가 안에서의 국가와 개인의 관계,

기업과 기업의 관계, 기업과 개인의 관계 등을 보고 현황을 분석하면서 모두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표현하는 단어와 범위는 조금씩 차이는 나지만 그들의 주장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대부분 같다.


그러면서 제시하는 대안은

이상세계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이론만을 내세우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이 너무 얽혀있어서

첫 단추를 찾기가 어려운

아니 첫 단추가 아예 없을 수도 있을 것이기에 말이다.


대안이 눈앞에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집단들은 반드시 외면할 것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 답을 찾지 않으려고 궁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할까?


혼자서는 절대로 되지 않는다. 다 같이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부산까지 전기를 보내어 전구에 불을 켠다고 했을 때

서울에서 스위치를 켜면


서울에 있는 전자들이 부산까지 달려가서 불을 켜는 것이 아니라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전속 속에 있는 전자들이 동시에 움직여서 부산에 있는 전구에 불을 켠다고 한다.


전자들이 동시에 움직여야만 불이 켜지는 것처럼
우리 앞에 산적해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동시에 움직여야만 한다.


나의 대안은


소위말하는 '윗물'들이 받아 가는
'월급'을 1년 동안만이라도 줄이자는 것이다.


다음을 보면 윗물들의 월급을 줄여야 하는 이유가 나온다.


https://brunch.co.kr/@52168600bfee4e5/41

https://brunch.co.kr/@52168600bfee4e5/38

https://brunch.co.kr/@52168600bfee4e5/37



[여담] 철학자들에게 바라는...


철학자들은 말을 너무 어렵게 한다.

자기들만의 이상한 용어를 만들어 장황하게 설명한다.


과학자들이 어떤 개념의 용어를 만들면 전 세계적으로 그 용어로 통일해서 사용하는 것처럼

철학도 이런 `용어의 동일화`작업을 하여 개념을 정리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마다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정도가 다를 것이므로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새로운 용어를 자꾸 만들지 말고


학문적으로나마 개념을 정리해 놓은 것이 있다면

여기에다가 첨삭을 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간다면

지금의 중구난방 격인 용어의 범람으로 인한 혼돈은 줄어들 것이다.










keyword
이전 11화[칼럼] [~로부터의 자유 VS ~로의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