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인정 VS 책임]

`전부 인정`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


악셀 호네트는

1949년 태생의 현역으로 독일의 철학자이다.

개인에 대한 사회의 인정 부재가 개인의 자아실현을 막고,

이러한 개인의 자아실현 좌절은 사회 갈등을 유발한다는

'인정 투쟁 이론'을 세상에 내놓았다.


호네트는 이러한 '인정투쟁' 개념이 푸코의 '투쟁'과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을

종합하는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저서로 <분배냐, 인정이냐>, <권력 비판>, <인정 투쟁> 등이 있다.

[출처] 나무위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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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의 사상을 `언어적 전환`이라고 한다면

호네트의 사상은 `인정론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인정`이라는 개념은 `헤겔`이 종교 사상과 사회철학을 구축할 때 사용한 개념이다.


헤겔이

`절대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의 `상호 인정`이 성립할 때 이루어진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 arte 출판-


고 주장한 것을 받아들이면서

현대사회 속에서 `인정` 개념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호네트는

개인의 '주격 나'가 '목적격 나'에 반응하여 자아를 형성하는 데는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 주체들, 즉 개인과 타인의 '상호 인정'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은 상호 인정 관계에서 자아를 형성할 수 있고,
상호 인정 관계에서 자아를 형성한 개인은 사회적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긍정적 자기의식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상호 인정 관계에서 개인이 사회적 '무시'를 경험하면,
해당 개인은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기의식이 파괴된다.

[출처] 나무위키


고 말하면서


개인은 이를 회복하기 위해

사회에 형성되어 있는 '인정 질서'에 저항하게 되는데,


여기서 인정 질서란

개인의 자아를 인정 대상으로 허용할지에 대한 사회적 판단 기준이나 원칙이다.


호네트는


개인이 새로운 자아상을 기존 인정 질서에 맞서 주장하면
개인은 기존 인정 질서와 대립할 수밖에 없고,
개인의 저항은 기존 인정 질서에서 배제된 사람들과의 사회적 연대를 통한 저항으로 확대된다.
그는 이러한 모든 저항을 '인정투쟁'이라고 명명한다.

특히 그는 권리관계나 가치 공동체 관계에서 발생하는 인정투쟁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개인의 권리나 가치의 범위를 확장하여
새로운 인정 질서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호네트는 인정투쟁이 현대 사회를 건강한 사회로 회복시키는 정당한 투쟁이다.

[출처] 나무위키


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호네트가 내세운 것은 `인정 일원론`이다.


경제적인 `분배`를 위한 투쟁`은 `인정을 위한 투쟁`과 동일하다면서
보수가 적거나 분배 방식이 나쁜 것은 그 사람이 충분히 `인정` 받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 arte 출판-


라며 경제문제와 인정 문제를 하나로 묶어서 고찰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호네트는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는 `전부 인정`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 arte 출판-

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호네트가 말하고 있는 `전부 인정'은 너무 과격한 발언이다.
사람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조건적인 인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건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사기 사건`등 범죄에 대해서도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전부 인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다면
`사기 사건`에 대해서도 그 사기 친 이유를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기를 치거나 살인을 하거나

해킹을 하거나 보이스피싱을 하는 등

남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행위에 대해서는 절대로 인정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범죄행위에 대하서는 책임을 지워야 한다.


그것이 경중한 실수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사건이더라도

인정이 아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책임의 무게가 비록 작을지라도 말이다.


상호 인정은 서로의 존중이 있기에 만들어지는 관계이다.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도 우리는 함부로 막 대하지 않고

존중하면서 무언가를 상호교환한다.


그런데

상대방이 나의 이익을 뺏으려고

또는 나를 잘못이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등

나를 억압하려는 행위를 한다면

그때는 그 사람을 인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내가 여전히 모르고 존중하고 있다면 나중에 이를 갈 일이 생기게 될 것이다.

만일 그 순간 상대방의 의도가 불순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당하게 존중이 아닌 관심 밖으로 돌려야 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상대방의 존중이

물리적인 폭력과 정신적인 폭력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냥 그저 조용히 의도가 불순한 상대방을 열외로 만들면 될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에 대한 존중은

자칫 `나`에 대한 불이익 또는 무시로 나타날 수 있으므로


미디어가 던져주는 메시지를 읽어야 하는 것처럼

사람의 말속에도 반드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https://brunch.co.kr/@52168600bfee4e5/1


호르크하이머의 `도구적 이성`에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으로서의 이성`

그리고

호네트의 `인정으로서의 이성`으로 이성에 관한 사유가 발전하고 있다.


키틀러의 `미디어 메시지론`과 결합시켜 보면

결국 모든 것은 `함의` 곧 `메시지`를 품고 있으므로


그 메시지를 읽는 힘을 기르는 것이 우리가 중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술이 주는 메시지
금융이 주는 메시지
문학이 주는 메시지
세계정세가 주는 메시지
내 삶의 흐름이 주는 메시지 등을 읽어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읽고 이해한 메시지를 무시하지 않고

받아주고 이해하며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하버마스의 대안처럼

`토의`(우리는 이보다 더 좋은 대안을 말하지 못하고 있다.)

를 통해 상대방과 나의 의견이 대립되는 것을

의사소통이 되도록 만드는 과정에서


`인정`의 시선으로 상대방을 대한다면

`토의`의 결과는 모두에게 유익한 결론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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