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민주주의 VS 공산주의]

양지와 음지의 경계가 모호한 이유


알랭 바디우는

1937년 태생으로 현역이다.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마오쩌둥 사상을 교조적으로 따르지 않으며,

비판하며 동시에 새롭게 재정립을 시도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바디우는 이런 의미에서 자신을 ‘포스트 레닌-마오주의자’라고 일컫는다.

저서로는 <존재와 사건>, <철학을 위한 선언>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구글 이미지 -앨랭 바디우-


알랭 바디우는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유민주주의(서구식 민주주의)가 특유의 다원성으로 인하여 무엇이 진리인지 알려주지 않고, 그것을 방기한다고 비판한다.

바디우는 이러한 민주주의의 특성을 반 철학의 정치라 부른다.


민주주의는 그저 개개인들의 합의에 의한 결과일 뿐이며

"철학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가장 좋은 선택이지만, 철학자에게는 한없이 재앙인" 체제라고 주장한다.

[출처] 위키백과


그러면서 바디우는 `공산주의`를 옹호하는데

민주주의에 대치되는 공산주의는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체제라기보다도

철학적인 체제라고 주장한다.


도리어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맞서기 위해 공산주의가

국가적 계획 경제(스탈린주의)나 자유 민주정 하에 기반을 둔 수정 마르크스주의(유럽공산주의)를 내세운 것이 20세기 공산주의의 실패 요인이었다고 말한다.


바디우가 말하는 공산주의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공산주의와는 약간은 다르다. 바디우는 플라톤의 세 계급론에서 `철학적 귀족`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공산주의는 모두가 귀족이 되는 체제로모두가 철학적인 식견을 가진 직접 민주적인 체제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바디우는 그러한 철학적인 식견을 가진 만인(귀족)이 자유로운 의견 교환과 토론을 통하여 이상적인 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출처] 위키백과


그런 의미에서 알랭 바디우는 `현대의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지금도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마오쩌둥의 `조반유리造反有理`의 사상을 아직도 따르고 있다고 한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조반유리造反有理`란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이 홍위병과 학생들을 부추기기 위하여 내세운 구호로 모든 저항과 반란에는 나름대로 정당한 도리와 이유가 있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조반유리造反有理` 사상은 너무나 무시무시한 사상이다.


민주주의가 다원주의와 다문화주의 등의 다원성으로 인해

참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진실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외치는 목소리가 커지면 그제야 살펴보고 받아들인다.

참과 옳음이 목소리에 따라 참과 옳음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디우가



민주주의는 그저 개개인들의 합의에 의한 결과일 뿐이므로 반 철학적이고

공산주의는 철학적인 체제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렇다고 바디우가 주장하는



공산주의는 모두가 `귀족`이 되는 체제로

모두가 철학적인 식견을 가진 직접 민주적인 체제



라고 주장하며


이렇게 될 때에만 이상적인 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모두가 어떤 한 종교에만 몸담아서 종교적인 수행을 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너는 나보다 못해`라는 무시하고 조롱하는 시선이 없고

좀 못 할지라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누구나 공평한 혜택과 처벌을 받고

무엇이든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사회가 형성된다면


노력이 못 미쳐서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 공감해 주고 이해해 준다면


계급으로 나누어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계급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지게 될 것이고


나는 분뇨차를 몰고

너는 벤츠를 몰더라도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온당한 삶을 지향할 수가 있을 것이다.


대립이 있을 때는

`개개인들의 합의에 의한 결과`를 도출하여 협치를 한다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지 않고

들어주고 양보하고 이해시키는 노력을 한다면


그래서 방향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고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면


잘못했음을 인정하고 다른 대응책을 강구한다면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용어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이 그려질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 단어에 국한되어

정말 올바른 방법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양지와 음지의 경계가 모호한 이유



양지와 음지의 경계가 모호한 이유는

서로의 힘의 충돌로 세력이 약해지고 있는 과정에서

합合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양지의 장점이 있고 음지의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 경계에서는 양지도 음지도 장점을 발휘하지 못한다.

경계에서는 양지의 장점과 음지의 장점이 합을 이루어야 한다.

그 합의 과정이 모호한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섞이는 것이다.

양지의 지역에서는 양지가 이긴 것이 아니라

양지의 장점이 최대로 발휘되는 것일 뿐이고

음지의 영역에서는 음지가 이긴 것이 아니라

음지의 장점이 최대로 발휘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양지와 음지의 경계가 흐릿하면서 모호한 것처럼

경계의 구분을 짓지 않는 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한 방편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양지로도 보고 음지로도 보는 것이다.


하지만

큰 줄기는 있어야 한다.

양지의 영역에서는 양지가 쫙 펼쳐져야 한다.

그러다가 무언가에 가려 음지가 생기기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양지와 음지가 합하여야 한다.


만일 양지, 음지, 양지, 음지 ......

이렇게 계속되어 이것도 저것도 아닌 환경이라면

이것은 양지도 아니고 음지도 아닌

곧 밝음도 아니고 어두움도 아닌 것이 되어

그 어떤 것도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양지식물이 살 곳도 없고

음지식물도 살 곳이 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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