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아픔은 더 서러웠다
병원에서는 나를 조울증으로 단정짓지 않았다. 내가 겪는 증상에 '조울증'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고 했다. 성인과 아동은 진단 기준이 있지만 청소년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그 말이 너무 허망했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내가 겪는 것에 아무런 이름도 붙일 수 없다니.
내가 바란 건 고작 세 글자짜리, 정식으로는 일곱 글자짜리 진단명이 전부였는데, 그것조차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내가 고작 그 진단명 하나에 왜 그렇게 목매는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그 이름이 전부였다. 이름이 있어야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게 뭔지, 어디까지 견뎌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정상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은 분명 처음 내게 조울증인 것 같다고, 조울증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 진단명을 뺏어가다니 너무 억울했다. 조울증이 아닌 내가 너무 낯설고 두려웠다. 내가 나를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이름이 없다는 건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진단명을 빼앗기고 나니 진단명 아래 숨겨져 허용되고 이해되었던 나의 모든 행동들이 전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바뀌었다. 감정의 폭발도, 극단적인 생각도, 이유 없는 무기력도 이제는 조울증이라는 틀 안에 둘 수 없었다. 남은 건 설명되지 않는 혼란뿐이었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나는 최대한 긍정적인 부분을 찾으려 노력했다. 일단 나는 공식적으로 비조울증인이다. 이 에세이가 세상에 나오더라도 나를 조울증 환자라고 낙인찍고 차별할 수 있는 근거도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도 같았다. 어쩌면 이름 없는 지금의 상태가 이름 있는 나를 찾아가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이 구간을 지나야만 언젠가 나를 온전히 부를 수 있는 그 이름에 닿을 수 있을 테니까. 단정지어지지 않았다는 건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