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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채운 족쇄

타의 모범이 된다는 것

by 김바다

학교라는 공간을 더는 버틸 수 없어 조퇴를 감행했다. 공인된 일탈이라는 생각에 들떴다가도 이 기록이 생기부에 남을 것이므로 나는 결국 완전무결한 출결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기분이 진창에 처박히는 경험을 했다. 누군가 나를, 내 기분을, 내 동의 없이 롤러코스터에 태우고 무한히 운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번은 아빠가 추천한 영화를 보러 갔다. 잡생각은 덜했지만 영화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마데우스라는 옛날 영화였다. 들으라는 노래는 안 듣고 모차르트가 죽는 부분만 뇌리에 강렬하게 남긴 채 영화관을 나왔다.


그래도 나름의 발전은 존재했다. 원래는 너무 힘든 나머지 주변 사람들의 안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곤 했다. 내가 죽으면 가족들이 어떤 감정을 느낄지는 내 안중 밖이었다. 지금 내가 너무 힘든데 남의 사정을 어떻게 고려하겠는가. 그런데 그날은 영화를 보고 집에 가는 길에 문득 내가 죽으면 엄마가 매우 슬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살 충동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실천을 보류하는 이유 중 하나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학교 측에서는 휴학 이야기를 꺼냈다. 학업중단 숙려제가 있긴 하지만 학교의 비싼 학비 탓인지 학업중단 숙려제를 이용한 선례가 없다고 했다. 점점 '정상'이라던가 '일상'이라는 키워드에서 내 삶이 멀어지는 게 보였다. 휴학을 하면 다음해에 한 기수 아래 후배들과 같이 지내야 한다는 건 나도 잘 알았다.


멘탈이 무너져서 중간고사도 망친 주제에 기말고사는 또 내 손으로 봐야만 할 것 같았다. 기말고사를 못 보게 되면 중간고사의 점수 일부분이 기말고사 점수로 반영된다고 했다. 이미 엉망인 중간고사 점수를 일부분 반영한다고 해봤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뻔했다. 선뜻 휴학을 하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조금 더 참아보기로 했다. 못 참고 다시 조퇴를 하게 되더라도 휴학이나 학업중단 숙려제보다는 더 일상적이고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았다.


중학생 때는 개근상이 그렇게 탐날 수가 없었다. 한여름에 오한 때문에 친구들의 겉옷을 여러 겹 껴입은 꼴을 하고도 조퇴는 하지 않았다. 개근이고 싶었기에 그랬다. 어릴 때부터 모범적이라는 말을 듣고 자라왔으니 그걸 유지하고 싶었다. 부모님이 교사라는 것도 내가 모범생 이미지에 집착하는 데 한몫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과연 정말 내가 모범적이었을까? 모범적이라는 건 본받아 배우거나 따를 만한 것이라는 뜻인데, 제 몸을 혹사시키고 돌보지 않다가 결국 터져버려서 학교에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게 된 것을 본받아 어디에 쓴다는 걸까. 내가 가지고 있던 모범에 대한 집착이 적어도 조금, 혹은 아주 많이, 어긋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부족함 없는 집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란 모범적인 소녀.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수식어구였다. 하지만 나의 문제는 점점 몸집을 불리기만 했다. 주변 환경이 완벽할수록 나는 점점 더 작아졌고 내가 싫어졌다.


사실 이 족쇄를 스스로 채웠다기에는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다. 나와 엄마는 생각이 비슷했고, 우리는 종종 입을 모아 '쓰러져도 학교에서 쓰러지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때는 내가 엄마와 같은 생각이라는 게 다행이라고 느꼈다. 마찰이 일어날 일이 없으니 말이다. 이제 와서 나는 엄마에게 묻고 싶어진다. 왜 내가 당신과 똑같이 잘못된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데 말리지 않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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