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nestra

황무지에 피어 난 꽃

by 마르치아


산책하자고 그가 나를 데리고 나갔다. 그는 말없이 내 손을 가볍게 잡았고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가 걷는 방향으로 따라 걸었다. 어딘지도 모르고 왜인지도 묻지 않았다. 바람은 그날따라 부드럽고 그의 걸음은 이유 없이 따뜻했다. 우리는 말없이 걷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점점 가까워졌다. 몇 걸음 더 걸으니 노란 꽃들이 시야를 채웠다. 가느다란 줄기 위에 작은 노란 불빛처럼 피어 있던 지네스트라. 햇살을 그대로 품은 듯한 색감은 말 대신 눈을 멈추게 만들었다.


“지네스트라야.”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길 잃은 사람들이 이 꽃길을 따라 걷다가 자기 마음을 찾기도 해요.” “그렇게 중요한 꽃인가요?” 내가 조심스레 물었고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냥… 잊고 싶지 않은 날이 이 꽃 사이에서 생겨나니까.”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고 그는 꽃을 바라보다 다시 나를 보았다. “노란색은 마음을 덮어주는 색 같아요.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그냥 묵묵하게 곁에 있어주는 색.”


나는 그가 하는 말보다 그 말이 나를 향해 오는 방식에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말이 없을 때조차 말이 되는 사람.


그때였다. 갑자기 꽃잎들 사이로 햇살이 한 번 더 스며들더니 그 노란빛이 나를 덮었다. 나는 그 광경에 숨이 멎을 만큼 감탄했고 저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소리 없는 탄성을 터뜨렸다. “어떡해요... 너무 예뻐요.” 말이 끝나기 전부터 웃음이 먼저 터졌다. 까르르, 아이처럼. 마치 꽃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위로 내가 투명해진 것처럼. 그 순간 나는 완전히 무방비였다. 그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다가왔다. 그리고 마치 오래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럽게 내 머리를 손바닥 안에 조심스레 담았다. 손끝이 이마 위에 가볍게 닿고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 감촉은 너무 부드러워서 한참이 지나서야 내가 숨을 참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웃고 있었다. 말없이. 말 대신 쓰다듬는 그 손길에 ‘예뻐요’라는 마음이 묻어 있었다. 그날 노란 들판 위에서 내가 받은 가장 조용한 고백이었다. 그와 함께 걷는 길은 어디든 마음의 들판이 되어버렸다.


계절이 바뀌고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노란 꽃을 보면 그날을 떠올린다. 제주에서 유채꽃이 피어날 때면 익숙한 골목 어디쯤에서 지네스트라가 다시 피어나는 것만 같다. 유채는 봄보다 먼저 피고 바람보다 먼저 마음을 건드린다. 육지에 사는 사람들은 제주에 봄이 먼저 온다고 말하지만 나는 안다. 이 노란 꽃은 계절보다 먼저 사랑을 기억하게 하는 빛이라는 걸.

keyword
이전 02화Dobia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