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에서도 순리를 가르친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우리 집의 철학자이자 인문학자셨다. 밥상도 예외는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밥상에서의 예절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셨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꼰대 같지는 않으셨다. 내가 너무 어려서 밥을 먹다 말고 상 밑으로 발끝을 들이밀어 장난을 쳐도, 밥상 위 예절만큼은 단호하게, 그러나 다정히 가르쳐주셨던 분이셨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가 문득, 아주 많이 그립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지구에서 가장 많이 나는 순서대로 섭생하면 탈이 없다.” 그러시면서 인간에게 그 순서를 가르치려 신이 생물의 비중을 정해주신 것이라 하셨다. 풀을 가장 먼저, 많이 먹고, 그다음 생선을 먹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고기를 먹는 순서. 고기 반찬이 나오는 날에도 나는 먼저 나물을 집어 먹어야 했다. 야채를 먹은 뒤에야 비로소 고기를 밥 수저에 얹어주셨다.
"할아버지, 고기부터 먹으면 안 돼?" 내가 물으면 할아버지는 늘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경화야, 그러면 세상의 질서가 망가지는 거야. 세상에는 생물들끼리 한 약속이 있는데, 그 약속을 지켜야 이 땅이 오래오래 안 아프고 건강한 거야. 근데 그건 사람한테도 마찬가지야."
“그럼, 우리가 약속한 거야? 할아버지?” "그럼. 사람으로 태어나는 순간, 그 약속을 한 거야. 너도 '응애' 하고 태어날 때 약속했어."
“근데 내가 왜 몰라? 나는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데?” 그 말을 하자 가족들은 깔깔 웃었다. 나는 그 약속을 언제, 어디서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했다. 뾰루퉁해진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보시던 할아버지는 이내 말씀하셨다. “그건 다 크면 기억이 나게 돼 있어.”
“어? 그래? 어른이 되면 약속한 게 생각나, 할아버지?” 그러자 할아버지는 조용히 웃으시며 대답하셨다. “경화야, 어른이 되면 태어날 때 한 약속들이 하나씩 생각나. 그걸 지혜라고 하는 거야.”
나는 할아버지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며 말했다. “할아버지, 나 빨리 클래. 그거 생각나게 할 거야.”
그리고 지금, 나는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그 말들이 비로소 생각난다. 그리고 깨닫는다. 인간은 생명을 죽여 그것을 취해야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연약하고도 책임이 막중한 존재라는 것을. 그렇다면 밥상은 이 세상을 축소한 작은 우주라 해도 무방하리라. 그 위에서 벌어지는 삶의 순서와 질서, 고마움과 책임, 그리고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약속들. 밥상은, 오늘도 나를 사람답게 만든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더 깊이 그리워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