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에 대하여
할아버지는 늘 내 선택을 존중해 주셨다.
그건 내가 어렸기 때문에 더 배려해 주신, 사랑의 방식이었다.
어릴 적, 밥상에서 반찬을 강요받거나
재료에 대한 설명 없이 “먹어야 한다”고만 들은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음식을 앞에 두고도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 감정은 종종 식탁 너머까지 따라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무엇을 피하고 싶은지도 모르게 만든다.
자기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한 끼 식사 앞에서도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나를 그런 혼란 속에 놓아두지 않으셨다.
한 소반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으면
말없이 밥을 먼저 뜨셨고,
나는 눈치 보지 않고, 내가 먼저 고르고 싶은 반찬을 집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된장국에 무청이 들어 있었던 날이었다.
나는 툭 고개를 돌리며 무청을 젓가락으로 밀어냈고,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보더니
고요하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건 뱃속이 차거나 마음이 허할 때 좋은 거야.
지금은 입에 안 맞을 수 있어도
몸이 먼저 아는 때가 있어.”
나는 그 말을 그땐 잘 몰랐지만,
이상하게 그날 이후로
무청을 피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히려 재료에 대한 호불호가 없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나의 취향을 존중해주시고,
재료 하나하나의 특성과 쓰임을 세심하게 들려주셨기 때문이다.
억지로 먹으라고 하지 않으셨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모든 재료를 환대할 수 있게 되었다.
혀의 기억은 마음의 기억보다 오래 간다.
나는 지금도 할아버지의 식탁에서 배우던 그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내 삶을 대하고,
내 안의 어떤 한 구석도 미워하지 않으려 한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식탁,
그리고 그 말이 존중받는 자리.
내게는 그게 사랑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