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가 상으로 초대하고 싶다
밥상머리의 철학자, 할아버지
어른이 된 후, 밥을 대하는 예절을 보면 그 사람의 근본을 짐작할 수 있다. 누가 먼저 숟가락을 드는지, 반찬을 집을 때 젓가락이 망설이는지, 자기 몫에만 익숙한지, 다른 이의 입까지 함께 떠올리는지. 이 모든 사소한 몸짓 속에 그가 어떤 밥상에서 자라왔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의 밥상머리 교육은 다섯 살 때부터 시작됐다. 내 키보다 높은 밥상이었고, 내 젓가락은 아직 서툴렀다. 그 밥상머리엔 늘 한 사람이 먼저 앉아 있었다. 내가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운, 내 인생의 첫 스승.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식사 전, 꼭 손을 씻으셨다. 대야에 뜨뜻한 물을 받아오시고, 손끝부터 손등까지 조심스레 닦으시는 모습은 의식처럼 느껴졌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 그 동작을 구경했는데, 그 순간부터 식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분은 밥을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닦는 일로 여겼다.
식탁 위에 반찬이 놓일 때, 할아버지는 말을 아끼셨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히려 목소리보다 컸다. “숟가락을 든다는 건 마음을 내어놓는 일이여.” 그 말 뒤에 할아버지는 언제나 가장 늦게 숟가락을 드셨다. 당신 앞의 반찬을 먼저 집지 않으셨고, 국도 가장 마지막에 떠가셨다. “가까운 게 먼저 네 것이 되는 법은 없다.” 그 말씀을 들으며, 나는 반찬을 집을 때조차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국을 푸는 일은 어른의 몫이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첫 번째 그릇을 받으셨고, 나는 두 번째였다. 그 기다림은 억울함이 아니라 배움이었다. 어린 나는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순서에는 의미가 있고, 먼저 드는 이는 먼저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어느 날 내가 물었다. “왜 나는 늘 두 번째예요?” 할아버지는 웃으시며 말했다. “경화는 두 번째에 감사할 줄 아는 아이가 되면 좋겠다.” 그 말은 내 안에 작은 종처럼 울렸고, 그날 이후 나는 두 번째를 좋아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앞자리를 기꺼이 비워두는 것, 그것이 어른스러움이라는 걸 나는 몰랐지만, 몸은 먼저 배워가고 있었다.
가끔 반찬이 부족한 날이 있었다. 김치 몇 조각과 된장국 한 그릇. 그럴 땐 할아버지가 제일 먼저 밥에 국을 말아 드셨다. 그 모습에서 나는 알았다. 함께 나눌 것이 적을수록 먼저 덜어내는 이가 어른이라는 걸. 그분의 숟가락질은 겸손했고, 그 겸손은 식탁을 너그럽게 만들었다.
말이 많아질 때면, 할아버지는 젓가락을 내려놓으셨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입으로 사람을 씹으면 밥도, 사람도 안 넘어간다.” 나는 그 말을 들은 이후, 식사 중 말이 길어지면 늘 입을 다물고 밥알을 굴렸다. 예절은 꾸며내는 게 아니라, ‘함께 먹기 위한 리듬’이라는 걸 그 밥상에서 배웠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들을 노트에 적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 말들은 어느 순간부터 내 손끝에 묻어 있었고, 내 식탁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나도 그런 말을 하게 되었다. “국 먼저 퍼. 숟가락 소리 너무 크다. 밥 먹는 게 말보다 먼저여야지.” 내 목소리였지만, 그 안엔 분명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요즘은 빨리 먹고, 편하게 먹고, 혼자 먹는 식사도 많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밥상 위의 질서와 순서를 지키려 한다. 그것은 누군가를 위한 예의이기 이전에, 나 자신을 지탱하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나는 안다. 밥상머리는 교육의 시작이고, 가장 오래 남는 인격의 거울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여전히 다섯 살 아이처럼,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숟가락을 조심스레 드는 상상을 한다. 밥이 식는 동안, 마음이 익는다는 걸 그분은 미리 알고 계셨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그 밥상을 차릴 차례다. 할아버지가 나를 불러 앉혔듯, 나도 누군가를 조심스레 불러 모아 그 따뜻한 자리로 초대하고 싶다. 그 사람의 말투보다 젓가락을 먼저 바라보고, 그 사람의 근본을 말이 아니라 밥짓는 태도에서 알아보는 그런 잔잔하고도 깊은 피정을 열고 싶다.
브런치 독자들이여, 오늘 나는 할아버지의 마음으로 여러분을 밥상머리에 초대한다. 이 피정에는 말보다 밥이 먼저고, 눈빛이 먼저 국을 데우는 자리이며, 누구도 혼자 먹지 않도록 따뜻한 숟가락이 서로를 기다리는 상이다.
밥은 마음으로 먹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다. 이 밥상은 기억의 재현이 아니라, 사람을 다시 사람답게 만드는 시작이 되기를. 할아버지의 숟가락이 그랬듯이..
독자들을 제주에 초대해서 잊혀진 밥상을 차려주며
여기까지 잘 살아 오셨다며 등 두드려주고 싶다
참여자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