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위에서 배운 사계절

음식달력이 나를 깨우친다

by 마르치아




계절을 밥상에서 가르쳐준 할아버지


“경화야, 오늘은 봄이다. 봄은 입으로 먼저 온단다.” 할아버지가 나물을 숟가락에 올려주시며 그렇게 말했다. 달래무침, 냉이된장국, 머위순을 된장에 조물조물 무친 것, 초록빛이 물든 반찬들이 조용히 밥상 위에 앉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나물 한 젓가락을 집어 입에 넣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쌉쌀한 향에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근데 왜 이렇게 씁쓸해,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소리 없이 웃으며 손등으로 내 머리를 쓸어 넘기셨다. “그게 봄의 맛이야. 땅속에서 오래 참았거든. 참은 것들은 처음엔 다 좀 쓰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한 그 맛을 다시 한 번 입 안에 굴렸다. 어쩐지 자꾸 먹고 싶은 쓴맛이었다.


여름이 오자, 밥상도 함께 젖었다. 부드럽게 볶아낸 가지무침, 오이미역냉국, 된장에 찍어 먹는 애호박과 찐 감자. 할아버지는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여름은 물이 필요해. 수분 많은 음식이 더위를 이기게 해주지.” 나는 찬 냉국을 한입 떠먹고는 고개를 움츠렸다. “으으… 차가워.” 할아버지는 웃으며 물잔을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몸이 덥다고 혀까지 덥게 살 순 없잖냐. 혀도 식혀야지.” 나는 물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여름은… 참는 계절이네.” 그러자 할아버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그렇지. 땀을 참는 계절이고, 말도 참아야 하는 계절이야. 괜히 열 오른 말 하면 남도 더워져.”


가을은 밥상의 온도가 깊어졌다. 찐 단호박, 밤조림, 볶은 꽈리고추와 멸치, 거기에 윤기 나는 햅쌀밥 위 참기름 한 방울. 할아버지는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이젠 하늘이 높아졌어. 볕이 곡식들을 익혔으니 네 밥맛도 익어야지.” 나는 잘 익은 밤 한 알을 숟가락에 얹어 조심스럽게 베어물었다. “달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웃으며 “익은 것들은 말이 없단다. 조용히 단맛이 퍼지는 게 가을의 맛이야.” 나는 아무 말 없이 밥을 씹으며, 조용히 달다는 것도 있구나 싶었다.


겨울이 오면 밥상이 작아졌다. 반찬은 많지 않았지만 하나하나가 깊었다. 묵은지찜, 말린 나물, 뜨끈한 된장국 한 그릇. 밥 위로 입김이 피어올랐고, 나는 양은숟가락을 손에 꼭 쥐었다. 할아버지는 국그릇 앞에서 잠시 눈을 감고 손을 모은 뒤 말했다. “겨울엔 아껴야 해. 식재료도 마음도. 입 안에 오래 머물게 먹는 연습을 해야 겨울을 잘 나는 거야.” 나는 조용히 국을 떠먹으며 속이 데워지는 걸 느꼈다. 아, 이건 국물이 아니라 마음이 따뜻해지는 거구나.


나는 계절을 달력보다 먼저 밥상에서 배웠다. 봄은 참은 것들의 씁쓸한 기지개였고, 여름은 말까지도 덥게 만들지 말라는 자제의 맛이었고, 가을은 조용히 익은 것들의 단맛이었고, 겨울은 오래오래 곱씹어야 비로소 따뜻해지는 음식이었다. 밥상 위에서 할아버지는 말없이도 많은 걸 가르쳐주셨다. 나는 다섯 살이었고, 밥상은 세상이었다.


이제 나는 어른이 되었고, 어느새 내 머릿속에는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음식 달력이 들어 있다. 냉장고를 열며 제철 반찬을 고르고, 찌개에 된장을 풀며 계절의 기운을 떠올리고, 숟가락을 들기 전 문득 그분의 말 한마디가 떠오른다. 봄은 입으로 먼저 온다고, 여름엔 물 많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가을엔 단맛이 조용해야 하고, 겨울엔 식재료도 마음도 아껴야 한다고. 내가 지금 차리는 밥상에는 계절이 있고, 그 계절 한가운데엔 여전히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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