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향기
“경화야, 할아버지 왔다.”
문소리보다 먼저 들린 그 목소리에 나는 폴짝 마루에서 일어났다. 수박 하나를 들고 문 앞에 서 계신 할아버지는, 다른 손에 복숭아와 옥수수가 담긴 망태기를 들고 계셨다.
“우와, 수박이다!”
“수박만 있냐? 이거 봐라. 복숭아도, 옥수수도 들었다.”
나는 두 손으로 복숭아 하나를 꺼내 들었다. 복숭아 껍질에 나 있는 부드러운 털이 손끝을 간질였다. 할아버지가 수박을 부엌으로 들고 가시며 말씀하셨다. “수박은 시원하게 먹어야지. 얼음 좀 담아볼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야는 나한텐 너무 컸다. 팔 벌려 안아봐도 끌 수도, 들 수도 없었다. “할아버지... 이거, 나 못 들어...” “허허, 그럴 줄 알았다. 우리 경화 손엔 복숭아나 하나 들고 있으렴.” 할아버지가 얼음을 담고 돌아와 수박을 반으로 가르셨다. “이 가운데 거. 이게 제일 달다. 경화, 니 건 여기.”
나는 두 손으로 수박 조각을 받아 들고 외쳤다. “우와, 엄청 크다!” 입에 대자마자 수박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으잇, 수박이 도망가요!” “허허허, 수박이 도망가는 게 아니라, 니 얼굴이 작아서 그렇지.” 그 말에 나도, 할아버지도 깔깔 웃었다.
옥수수는 석유곤로 위에서 구웠다. 할아버지는 철망 석쇠를 얹고 옥수수를 하나씩 돌려가며 굽기 시작하셨다. “경화야, 이 냄새 맡아봐라. 고소하지?” “응! 밥 안 먹고 이것만 먹고 싶어요!” “밥도 먹어야지. 옥수수만 먹으면 나중에 배에서 새 소리 난다.” 옥수수가 노릇하게 익자, 할아버지는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어 내 손에 쥐어주셨다. “뜨거우니까 후— 불어서 먹어.” 나는 후후 불며 한 알을 톡 깨물었다가 “앗뜨거!” 소리를 질렀고, 할아버지는 “그거 원래 그렇게 먹는 거지” 하시며 웃으셨다.
저녁엔 복숭아를 먹었다. “껍질도 먹어도 돼요?” “그럼. 복숭아 털도 복숭아의 일부다.” 나는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물었다. 간질간질한 껍질과 달콤한 과즙이 입안에서 뽀글뽀글 웃었다. “할아버지, 복숭아가 웃겨요.” “그럼 너도 웃어야지.”
배가 부르니 눈꺼풀도 내려왔다. “경화야, 마루에 누울까?” “응. 근데 더운데 괜찮아요?” “시원한 나무가 등에 닿으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할아버지와 나는 마루에 나란히 누웠다. 수박 껍질은 모퉁이에 놓여 있고, 복숭아 씨는 대야 안에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 하늘 위로 고추잠자리들이 떼 지어 날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 잠자리들은 어디 가요?” “글쎄다. 시골 아이들 이마에 앉으러 가는 걸지도.” “나한테도 올까요?” “그럼. 경화한텐 꼭 하나가 올 게다. 좋은 일이 생기기 전에 먼저 온단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슬그머니 다시 떴다. 어느새 잠자리가 한 마리, 내 발끝 가까이서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어른이 된 내가 수박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 순간, 그 여름이 불쑥 찾아온다. 복숭아 하나를 만지면 손끝에 솜털의 간질임이 다시 느껴지고, 옥수수를 굽는 냄새가 퍼지는 부엌에서 나는 다섯 살로 돌아간다. 마루 위에 누워 바라본 잠자리떼처럼, 그 기억들은 언제나 떠 있었다. 할아버지를 향한 마음으로 가득한, 작고 큰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