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그립다기 보단
술 한 잔에 즐거웠던
그날들의 공기가 그립다
눈 오는 날에는 곱창이 생각난다. 소복이 쌓인 눈을 밟으며 동네 곱창가게에 들어가 소주 한 잔에 곱창 한 점. 비 오는 날엔 학동역 골목에 있는 조개찜에 소맥. 햇빛 쨍한 여름엔 편의점 앞에서 오징어와 맥주캔 하나, 추운 바람이 부는 날엔 따끈한 정종과 어묵탕. 어느 가을 휴일 야외 테라스에서 낮맥. 그리고 어디서 무엇을 먹었든 집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n차, 타코와사비에 맥주 한 잔.
나름 한 잔을 즐기는 삶이었다. 날씨에 맞게 좋아하는 음식이 있었고 그 음식에는 어울리는 한 잔씩이 존재했다. 주량이 세지는 않았지만 한 번 시작한 술자리에는 마지막까지 버티는 의리가 있었고 남모르게 끊어 마시며 끝까지 살아남는 잔재주도 있었다. 남편과 연애 때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도, 낯선 이들과 쉽게 친해지는 일에도, 슬퍼하는 친구를 위로할 때 그리고 지루한 회식자리에서도 꼭 필요한 친구였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술을 즐기는 삶으로 살았다. 시험관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주사 맞는 기간엔 꾹 참다가 과배란 시기와 채취만 끝나면 다음 채취 전까지 한 잔을 즐기는 삶을 유지했었다. 꾹 참다가 마시는 그 한 잔이 또 그렇게 달고 맛있을 수가 없었다. 미혼 때도 과음 다음날엔 침대에 누워 어젯밤을 탓하며 술을 끊어본 적이 있었지만 크- 쓰고 달게 입안에 퍼지는 그 맛이 그리워 일주일을 못 버티고 다시 마시곤 했다. 그러던 내가 작년 유산 이후로 술을 딱 끊었다. 길어지는 싸움에 내가 무엇인가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대로는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았다. 내 몸에 나쁜 기운들을 빼내고 좋은 것들로만 채워놔야 할 것 같은 그런 기분에 술을 바로 끊어냈다. 다행히도 길고 지루한 싸움에 지쳐서 그런지 쉽게 술을 끊었다. 예전엔 어떻게 맥주 없이 치킨을 먹고 소주 없이 감자탕을 먹을 수 있나 이해를 못 했지만 요즘엔 술 없이도 치킨도 잘 먹고 감자탕도 잘 먹는다.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재미없어하기 시작했고 나는 남들 술자리가 재미 없어지긴 했지만 나름 잘 적응해 살고 있다. 술을 끊어내긴 했지만 그래도 맥주가 땡기는 밤이 간혹 있기는 하는데 그럴 때에는 탄산수를 마시며 나를 달랜다.
지난밤에 남편이 술을 잔뜩 먹고 들어왔다. 술에 취한 남편을 보며 생각한다. 나도 저리 취한 밤들이 있었지. 친구들과 모여 즐겁게 한 잔을 마시고, 술이 또 술을 마시는 그런 밤들. 늦은 밤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시며 알딸딸한 즐거움에 서로가 더 애틋해지고 또 어딘가로 들어가서 한잔 더 하고 싶은 그런 밤들 말이다. 이리 쓰고 보니 더욱 그립다. 술이 그립다기 보단 술 한 잔에 즐거웠던 그런 날들이 그립다. 언제 그런 날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침에 숙취로 침대에서 괴로워하는 남편을 보며 그 그리움을 달래 본다. 아니 위로를 얻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