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끝나지 않은 고민
“아이가 자라는데는 온 마을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동안의 글을 정리하면서, 내가 아이 낳기를 고민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해결책 덕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상태에 들어섰고, 돌봄이 가능한 가족을 찾을 수 있었고, 그래서 빠르게 회사로 복귀하여 경력단절 위험을 덜 겪을 것으로 예상하고. 어디에도 ‘사회’의 해결책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는데는 온 마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있듯, 내가 속한 사회도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왜 사회적으로 어떤 도움도 없다고 느끼는 것일까?
정부는 몇십만원 지원금을 쥐어주면서 아이를 낳으라고 한다. 정말 몇 십만원이 없어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일까?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정말 문제라고 생각된다면, 돈 몇 푼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원인 현상에 대해서 명확히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는 아래 2가지 순서의 질문이 해결되었을 때, 아이를 낳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1. 현재 스스로를 경제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책임질 수 있는 상태인지
2. 아이를 낳고서도 이 안정적인 상태가 유지되는지
1번 질문에 대해, 내가 애초에 사회의 줄 세우기에서 미끄러졌다면 이런 고민을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고 느낀다. 내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상태인지 답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인 것이 크다. 힘들긴 했지만 제 때 취업을 했고, 나중에 돌봄 비용으로 지출해야 할 비용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으라고 말은 하지만, 우리 사회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도록 시스템적 도움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다. 내 집을 장만하려면 맞벌이 부부가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20년을 모아야 한다는 뉴스, 서울 아파트 절반이 9억을 넘겼다는 뉴스, 청년 실업자가 30만명을 넘어선다는 뉴스들을 보면, 지금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데 정말 정부는 출생율 문제가 몇십만원 지원금으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나 싶다.
한 번의 선택을 되돌릴 수 없는 선택으로 만드는 사회
스스로를 책임지고 있느냐는 첫 번째 질문에 더해, 2번째 질문, 아이를 낳고서도 이 안정적인 상태가 유지될까? 라는 질문에 대해. 이 사회는 한 번 미끄러지고 나면 더는 일어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책임을 개인에게 돌린다. 내가 지금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다고 한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면 다시는 재기 불가능해질 것이다. 만약 아이를 낳고 돌봄을 도와줄 사람을 찾지 못해 회사를 그만두면, 몇 년 뒤 다음 회사의 면접에서는 “왜 그만두셨죠?”라며 빈 경력에 대해 날을 세울 것이다.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에, 한 번 내린 선택은 꼬리표처럼 나를 증명하라고 몰아세우며, 우리 엄마가 겪듯 노후 문제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육아로 경력이 끊겼다가 다시 일을 찾으려 할 때 ‘쉬는 동안 뭐했느냐?’라는 질문으로 육아 했던 기간을 ‘쉬었다’라는 표현하는 세상에서 누가 아이라는 리스크를 질 수 있을까. 만약 몇 년동안 아이를 키우고서도, 다시 경력을 이어나가는데 문제가 없다면 경력을 고민으로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정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의 문화 속에서는, 이런 안전망이 없다고 느끼기에 경력단절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혼자서 커리어 플랜 B, C, D를 만들면서도 육아휴직 3개월만에 직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든 다시 돌아와도 괜찮은 사회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날 기회를 주는 사회가 되어야만 한다. 더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길이 있는 것을 인지하는 사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너른 집에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고, 빈 경력에 대해 날을 세우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전 회사에서 힘들었던 건, 회사일로 힘든 것보다도 다음 회사를 정하지 않고서는 퇴사를 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였다. 그냥 그만두고 싶어도 다음 면접 볼 회사에서 ‘쉬는 동안 뭐했느냐’라고 물어볼 면접자의 얼굴이 무서웠다. 죽을만큼 힘들어도 버텨야 하고, 쉬는 동안 죄책감을 느끼는 이 사회가 더 여유로워졌으면 좋겠다. 이 각자도생의 삶에 나름 그런대로 적응한 내가 아마 노는 것이 더 즐거울 아이를 이런 세상에 적응시키느라 할 말들도 무섭다. 그런 세상에서 무조건 아이의 편이 되어 아이가 순수함을 잃지 않게 해줄 수 있을까?
죽을 듯이 열심히 살아야만 보통으로 살아지는 삶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힘들면 멈춰도 되고, 잠시 돌아가도 된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회면 좋겠다.
누군가의 희생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안에서 크는 아이들
이미 직장이 있는 사람은 직장을 잃지 않는 것이 최선, 이미 커리어가 단절된 사람은 다시 복귀하는 것은 어려운 사회. 단 몇 달의 빈 경력조차 허용되지 않으니, 완전한 ‘희생’만이 남는다. 그러면서도 베이비시터에만 의존할 수도 없는 사회.
‘가정’ 단위로 육아 해결책을 찾다보니, 아이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크게 된다. 나의 경우, 어머님은 나를 돕기 위해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 아이 한 명을 낳는 순간 여성 두 명의 경제상황이 흔들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아이를 키워낸 우리 엄마와 같은 가정주부의 노후는 불안정하다. 그 여성들을 옆에서 가장 많이 보는 것이 정부에서 흔히 말하는 ‘가임기’ 여성이다. 아이를 낳게 되었을 때의 희생, 그리고 몇 십년 뒤의 여파를 옆에서 뻔히 보는데 아이 낳겠다는 결정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조부모가 육아를 돕는 것이 전세계적 트렌드라고 한다. 영국은 조부모 돌봄의 사회적 가치를 제도적으로 인정했다고 한다. 손주를 돌보기 위해 일찍 은퇴하거나 노동시간을 줄인 조부모를 위해, 손주를 돌보는 기간을 연금에 기여한 기간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한다. 조부모의 손주 돌봄 참여가 늘어난 이유는 돌봄 공백을 조부모가 메워 자녀가 계속 일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고, 이것이 조부모의 은퇴 플랜에 위험이 되는 것을 인지하고 정부가 정책화했다고 한다.
이처럼 아이는 누군가의 희생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안에서 커야 한다. 조부모의 돌봄 가치를 인정하는 것에 더해, 좋은 베이비시터 만나는 것이 ‘이모복’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어서는 안된다. 어떤 베이비시터를 만나든 아이가 정서적으로 안정될 수 있도록,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나? 현금 몇 십만원을 쥐어주는 현실 상황과 동떨어진 해결책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회 현상에 기반해서 해결책을 마련했으면 한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에, 이런 시스템들이 기반 되어야 한다.
안전한 사회
그리고 현재 사회 시스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 자신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해서 아이를 낳았는데도, 아이와 관련된 범죄들이 발생하면 도대체 이 사회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화가 난다. ‘시선으로부터’라는 소설에서, 화수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래도 요즘 여자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걸 모조리 경제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는 없어요. 공기가 따가워서 낳지 못하는 거야. 자기가 당했던 일을 자기 자식이 당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어서. 혼자서는 지켜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한국은 공기가 따가워요.”
한국보다 더 심한 나라도 많고, 네가 아니면 누가 낳냐는 말에,
“나보다 덜 다친 사람. 나보다 세상을 덜 괴로워하는 사람이. 뉴스를 그냥 통과시킬 수 있는 쪽이.”라고 답한다.
아이를 어떻게든 낳는다 해도, 혼자서는 아이를 지켜줄 수 없다. 온 마을이 나서서 아이를 보호하고 지켜줘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아이와 관련된 범죄들이 발생했을 때 단죄하지 않는다. 내 아이에게만 조심하라고 해서 해결될 성격의 일이 아닌데, 사회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지 못한 채 출생률이 낮다는 말만 반복한다. 흉악범죄 뉴스를 보고서도 아이를 낳고 싶다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될지 묻고 싶다.
아이가 아이의 순수함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흉악한 세상에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사회가 바뀌어야만 한다. 더 많은 사람이 아이들을 위해 세상을 더 바른 방법으로 이야기했으면 한다.
나는 일도 잘 해내고, 나도 잃지 않고, 아이도 잘 낳고 키워보고 싶다.
아이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렇게 지금의 생각을 정리해두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해도 막상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눈 앞이 캄캄해질지도 모른다. 사회에서 내 몫만큼 해나가는 삶, 미래의 엄마로서의 삶 모두 놓치고 싶지 않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일과 가정의 양립’에 대해 고민하고, ‘아이의 순수함이 지켜지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으면 좋겠다. 나의 아이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이 안전하고 쉬어가도 된다는 느낌을 받을 세상을 꿈꾸며 글을 맺는다.
[뉴스 기사 출처]
"시터 이모님 월급 주고나면 남는 게 없어"…일하고 싶은 '지영이'는 그렇게 경단녀가 된다
https://www.hankyung.com/economy/article/2020101676321
[늦맘이어도 괜찮아] 조부모의 ‘손자 돌봄’, 사회적 가치 생각해야 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