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나는 무척 달랐다. 그의 표현방식은 이러한 것들이었다. 참기. 표현하지 않기. 내색하지 않기. 불편한 것은 대답하지 않기. 불필요한 일은 나서지 않기. 부딪힐 상황에서는 피하기.
나의 표현방식은 이러한 것들이었다. 기분 좋은 날은 맘껏 웃기. 화가 나면 표현하기. 슬플 땐 대화하기, 위로받기. 불편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싸울지라도 맞춰나가기. 그마저도 안되었을 때는 참아보기. 견뎌보기. 말수 줄이기.
그와 나는 태생부터가 다른 사람이었다. 어려움을 마주했을 때 바라보는 관점, 헤쳐나가는 방식, 견뎌내는 정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도 달랐다. 사실 모두가 겪는 일이다.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다름이 되려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되기도 하는 관계가 있다. 단순한 예를 들면, 감정적인 이는 상대방의 관점으로 인해 조금 더 감정을 뒤로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고, 이성적인 이는 상대방의 관점으로 인해 조금 더 감정적인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물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와 수용하고자 하는 태도가 있을 때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와 나는 처음부터 바라보는 곳이 같지 않았다. 그 사람이 바라보는 지점은 언제나, 그날 또는 그다음 날이었다. 그리고 무사한 하루였다면, 무심히 가볍게 하루를 지나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더 먼 지점을 바라보았다. 무사하였으나 일어난 문제라면 작더라도 분석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했다. 이 문제를 통해 다를 미래를 그리며 미리 생각하고 대비해야 했다. 그와 나의 예민함의 차이, 시선의 차이는 서로 자꾸 다른 이야기를 할 뿐 접점의 이야기를 하기 어려웠다.
함께 그와 법원에서 상담을 받을 때, 상담사 분께서 해준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두 분이 보기만 해도 정말 다른 사람인 게 보여요. 이런 경우 서로 조금씩 이해하고 양보하면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는데 정말 아쉬워요."
서로의 무심함과 예민함 근저에 존중, 배려, 공감의 가치들이 깊지 않아도 그저 얕고 너르게 꿈틀대었다면 우리는 지금과 달랐을까.
결혼 후, 6개월 뒤부터 2년간 크게 몸이 아팠다. 응급실에 여러 번 실려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처음 겪는 결혼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감당해야 할 현실적 무게와 초창기부터 크게 마주한 대화의 벽들 앞에 몽글몽글 피어오른 상실감, 그리고 어깨뿐 아니라 온몸을 짓누를 만큼 커다란 양의 생각들이 괴로움이 되던 시점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고통과 원인 없는 병으로 풀타임으로 일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모았다. 그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업에 전념하였다. 나는 집안일을 도맡았고, 벌어 아끼는 여느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형편에 나라의 도움까지 받게 되었다. 그것은 내게 부끄럽지도, 어렵지도 않은 배려였다. 그가 조금이나마 편할 수 있다면 난 불편을 택하였다. 아마 당시엔 그의 마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연애 때 나는 항상 그에게 그의 어린 시절 또는 학창 시절을 그리고 친구 관계를 묻곤 했다. 어머니,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는지. 형제자매와는 어떤 관계였는지. 궁금한 게 많았다. 어떤 친구랑 가장 친하고, 친한 이유는 무엇인지. 하지만 그는 ‘몰라’라는 답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나는 실망스러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정말 그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수도 있겠다.라고 이해했다. 감정을 억압하며 살아오다 보면 어떠한 무의식적인 생각도 잘 들지 않게 되곤 하니, 느끼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살아와서 그럴 수도 있을 거라. 그를 이해했다. 그리고 어떤 질문들은 몇 차례 더 묻기도 하였으나, 점차 그런 질문은 내 안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결혼 이후에는 그가 퇴근하면 대화할 시간을 기다렸다. 함께 식사를 하며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손을 맞잡고 흐르는 천을 걷고, 그날의 일들을 서로의 귀에 말해주며 사랑을 속삭이는 신혼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결혼 직후부터 급격히 대화의 시간부터 줄여 나갔다. 그는 빠른 저녁 식사 후 씻고 자리에 누워 늘 먼저 잠에 들었다. 그는 아마도 결혼의 의미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결혼과 함께 있던 여러 변화에 그는 피로감을 크게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우리 사이엔 '이혼' 그리고 '대화'에 대한 문제가 수면 아래 도사리고 있게 되었다.
이런 관계가 계속될수록 내 안에는 해결되지 않는 답답함이 쌓였다. 나는 사랑을 주는 편이었다. 사랑을 주면서도 사랑을 느꼈다. 사실은 자기 불만족이자 자기만족이었던 나의 사랑 주기 방식은 한계를 만났다.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선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분명한 고귀한 가치인 인내는 내 심장을 찔렀고 점차 외로운 독방에 갇혀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30살의 내가 20대의 나를 바라보며 느낀 것은 나 자신도, 상대라는 한 사람도 그리고 사랑도, 배려도 모르는 그저 머리에 꽃 달은 청춘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사랑을 잘 모른다. 그 사람과 결혼을 마음먹은 이유는 단순히 착하였고, 순수하였으며,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며 화내지 않고 유순하다는 점이었다.
이런 배우자상은 우리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허상이었는데, 엄마는 술을 자주 먹고 담배를 많이 피우며 싸우다 격해지면 주먹다짐으로 경찰서도 가고 대화는커녕 살아있기만 하면 다행인 최강자(?) 아빠를 만나 결혼하셨기 때문이었다. 가정폭력은 없었지만, 폭력적인 성향으로 온 집을 가루 내기도 하셨으며 엄마밖에 모르는 순정파이지만, 그만큼 의리에 한 고집하여 새벽마다 별일 없기를 고대해야 하는 나름 당대의 사랑꾼이자 폭군이셨다.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긴 시간 고생하셨던 엄마의 썰을 들으며 난 우연찮게 딱 그 정반대의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일생일대의 선택인 결혼은 귀에 딱지 앉은 엄마의 경험 서린 억울함과 서러움에 편승한 나의 무지의 영역 안에서 최고의 선택이란 자부심으로 결정했다.
그리고는 그 결정은 잘 포장되어 사랑인지 동정심인지 허상에 대한 기대인지 진정한 나의 결정이 맞는지 제대로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사랑받는다는 기분에 취해 맞추면 뭐든 능사일 거라 내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가끔 무척 가까운 경험은 정답인 것처럼 행세하곤 한다. 지뢰가 어디 있는지 아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 또한 그곳을 피하면 될 뿐인 일이었다.
인생에는 여러 지뢰가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땅 밑에 음침하게 인생을 박살 내려는 일들이 가득한 삶을 살아간다. 대화뿐 아니라, 더 많은 이혼사유가 존재한다. 우리 엄마는 별안간의 사별이었다. 어쩌면 나는 게 중에 온몸이 잘려나갈 정도는 아닌 지뢰를 밟았을지 모른다. 누군가는 인생이 송두리 째 흔들려 온몸이 터져나가는 경험을 하기도 하니까.
우리는 그럴 때 상황을 탓하거나 상대를 탓하거나 나를 탓한다. 그런데 지뢰 탓이다. 밟은 것은 당신의 탓이 아니다. 온몸이 터져나갈 만큼 겪은 그 고통을 어서 애도해줘야 한다. 닦아주고 감싸주고 꾹 눌러줘야 한다. 탓을 하다가는 얼마 남지 않은 나마저 잃고 만다.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잘 몰라서 일어난 일이라고. 이런 일을 겪게 되었지만, 나는 충분히 사랑받을만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나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누구도 날 이해하지 않아도 누구도 날 사랑하지 않아도. 지뢰가 당신을 앗아가려 하여도 그래도. 나도 당신도 여전히 사랑스럽다. 우리가 딛지 않은 땅을 딛으러 일어나 나아가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