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는 천천히

나의 오늘부터 한 해까지, 이렇게 살아갔습니다.

by 노아의 독백

오늘은 꽤 쌀쌀한 바람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콧등을 스쳐 몸속에 내려드는 서늘함,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김이었다. 잊었던 가을이 온 줄 알았는데 여느 때처럼 금방 머물다 가버리는구나. 벌써 새로 올 손님을 맞이해야 되나 싶은 날이다. 며칠 더 보여주고 싶었던 셔츠들이 아쉬움을 표하겠다. 듬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옷들이 마중을 나온다. 서늘함이 또 한 번 새롭게 느껴질 때 함께 해야겠다. 그리 멀지는 않은 것 같다. 무심코 본 달력은 어느덧 시월의 중순을 지나고 있다. 남은 올해를 어떻게 마무리할지, 지나온 한 해는 어땠는지 돌이켜 보라고 말을 건다. 그렇게 눈치를 주는데 별 수 있나. 내가 걸어온 해를 정리하며 또 당신의 이번 해는 어땠는지 그려본다. 당신의 시작을 담은 봄, 당신과 함께한 무더위의 여름, 당신의 숨을 돌리게 해 준 가을 그리고 당신의 따듯한 연말을 위한 겨울까지. 힘껏 만개한 벚꽃은 보았는지, 너무 더운 여름을 보내지는 않았는지, 창가로 들어오는 가을의 공기는 맡았는지 그리고 다가올 겨울을 위한 보금자리는 마련했는지. 내가 머물렀던 당신의 계절은 그리 밉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시간은 터무니없이 빠르고 계절은 여전히, 조용하게 틈새를 비집고 돌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과의 계절은 천천히 마무리하려 한다. 당신의 이번 해는 어땠는가, 나의 이번 해는 이렇게 흘러갔다.

아침에는 따듯한 카모마일을 좋아합니다.

작년 여름, 무더위 속에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뎠고 걸음마부터 새로 익히며 천천히 내 자리를 찾아갔다. 작년의 나와 함께한 약속처럼 자리를 찾아가는데 집중했고 그렇게 지금의 자리에서 또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렇게 안정적인 일상을 보낼 때쯤 고난이라는 이름의 시험이 찾아왔고 있는 힘껏 받아들였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며 싸웠다. 사실 이번 해는 나에게 유독 장난을 많이 걸었다. 살면서 겪어봐야 되나 싶기도 한 일들의 연속이었고 이 시련들을 어떻게 이겨낼지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몸과 마음의 상처가 크게 나고, 덧나고 아물지 않았지만 애써 보이지 않게 감으며 살아간다. 고요한 곳에서 꽤나 요란스러운 싸움을 하며 살아간다. 웬만하면 잘 놀라지 않지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달리기처럼 심장이 뛰었다. 소설책의 표현처럼 '쿵' 하고 내려앉는다. 그날만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미어터진다. 가라앉는 소리는 꽤나 우렁차구나. 처음에는 너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나를 원망하며 나약하고 한심한 나를 탓했다. 삶의 여유가 생기니 눈길을 돌릴 시간이 생겼으며 그렇게 쉽게 얻은 사랑 쉽게 내다 버렸다. 그렇게 또 내다 버려졌다. 생각을 안 하기 위해 생각할 시간과 마음을 막기로 하였고 그렇게 여유를 틀어막았다. 생각을 안 하니 남은 건 따라오는 고독뿐이지만, 애써 외면했던 고독을 다시 되찾아갔다. 그렇게 늘 자리를 지키던 고독함과 맞물려 해를 살아왔다.

브로콜리너마저 <유자차> 中


바닥에 남은 차가운 껍질에 뜨거운 눈물을 부어

그만큼 달콤하지는 않지만 울지 않을 수 있어

온기가 필요했잖아 이제는 지친 마음을 쉬어

이 차를 다 마시고 봄 날으러 가자

Wan 완 작가님의 <혼자여도 충분히 괜찮아.>

그렇게 여느 때보다 덥고 깊은 여름을 보내며 과일처럼 서서히 익어갔다. 누군가를 품지 않는다는 일상은 그저 흑백의 세상이었고 그렇게 색 없는 삶에 익숙해져 간다. 남은 이번 해는 나와 더 친해지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사실 그렇게 친해지고 싶지는 않지만 나를 아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이 또 있나.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더 깊게 들으려 하고, 내가 즐겨 입는 옷들을 더 자주 입으려 한다. 애착이 가는 영화를 다시금 방문하며 그렇게 몸과 마음을 가꾼다. 가꾸고 챙기며 아물지 않는 상처들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연민 대신 미적지근한 미소를 남기며 남은 하루를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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