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비가 내려도 괜찮을 것 같다.
두 번째 낙원을 그리는 날, 오랜만에 글의 힘을 빌려 내일을 상상해보려 한다. 이왕이면 좋은 기분 속에서 글을 내리고자 한참을 미뤘다. 오늘도 두서없는 일기가 되겠지만 포장하는 건 오로지 내 몫. 힘겹게 모아둔 정성을 얹어본다. 그렇게 이전에 내렸던 낙원을 다시 한번 방문했다. 언젠가 갖추어질 나의 공간, 나의 낙원에 초대할 당신을 위해 꾸며둔 곳이다. 아침을 맞이하는 커피, 밤을 지켜줄 따듯한 카모마일, 자리를 지키는 초록의 식물 그리고 어김없이 돌아가는 턴테이블. 방황하는 내 마음과 달리 커튼은 항상 자리를 지켜준다. 시간이 늦어 불은 키지 않으려 한다. 어색한 얼굴을 애써 피하지만 커튼 틈새로 내리는 은은한 조명이 보이지 않는 얼굴을 상상하게 만든다. 첫 공연을 준비한 배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무대다. 어김없이 돌아가는 턴테이블 속 노래는 나를 진정시킨다.
이번에 내릴 두 번째 낙원은 오지 않았던 일상을 그려보려 한다. 하나의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한 발씩 내딛는 여정이다. 어제는 서울에 나가겠다는 마음조차 다짐하기 어려웠는데 오늘 내 마음은 벌써 지하철 앞을 서성이고 있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날씨가 참 맑다. 다른 어구 필요 없이 그냥 참 맑다. 선선한 바람이 콧등을 스치는데 딱 이 정도가 좋겠다. 애써 가꾼 머리가 망가지지 않는 이 정도의 바람. 너 오늘 강약 조절 잘했다. 며칠을 고민했던 옷들과 함께 출격했다. 각자 다른 색상이지만 오묘하게 닮은 것들, 살짝 주황빛을 띠는 양말이 오늘의 포인트다. 과하지 않은 자연스러움. 이런 날은 꼭 발걸음부터 티를 낸다. 평소처럼 행동하지 못하고 아마추어처럼 엇박을 탄다. 진정시킬만한 음악을 얹어야겠다. 발걸음을 맞추기 위해서다. 절대 떨려서가 아니다. 아직 봄은 멀었지만 한로로씨의 <입춘>과 함께 해야겠다. 그리고 기분 좋은 하루를 위한 TAGE의 <Piece of Heaven>까지. 집으로 가는 길의 노래까지 정해두었다. 오랜만에 쓰는 단어를 얹어 감히 말한다. 완벽한 출발이다.
한참을 고민했던 카페로 향한다. 공간과 커피를 꿈꾸는 나에게 머무르는 곳은 꽤나 중요하다. 좋아해 주었으면 한다. 오늘은 매일 마시던 아메리카노 대신 따듯한 라떼를 마실 예정이다. 아직도 헤매는 발걸음을 맞추기 위해서다. 절대 떨려서가 아니다. 라떼를 마시면서 오늘은 평소보다 더 특별한 날이 될 것이다. 얹어진 거품이 제법 깊이가 있어 다시 입을 대는 시간이 길어져도 여전히 온도가 맞는다. 시간이 또 멋대로 흐른다. 커피의 온도도, 대화의 온도도 처음 마주하는 것 치고는 제법 잘 맞아지고 있다. 틈새로 들어오는 웃음소리가 자리를 채운다. 사람들의 소음도, 흘러나오는 노래도 우리의 대화를 잘 짊어지고 있다. 한 발자국씩 물러나준 그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여전히 웃음소리가 자리를 채우고 있다. 그렇게 머그잔의 바닥이 보이기 전 우리는 바람을 맞으며 걷고 또 걸었다. 골목 속에 숨겨진 작은 가게로 향해 걸었다. 가게를 가득 채운 옛 가구들, 오픈식 키친이 눈에 띈다. 그래도 오늘은 시선을 돌릴 여유는 없다. 음식 맛도 꽤나 괜찮다. 독특한 디자인의 맥주잔을 주신다. 음악처럼 내 편이 되길 바라며 맥주의 힘을 조금 빌려본다. 평소에는 그렇게 잘 먹던 내가 나답지 않게 깨작거린다. 당차게 말했던 입이 다 부끄러워진다. 음식을 코로 먹는다는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해가 슬슬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콧등을 스치던 바람이 목을 타고 내려와 몸을 감싼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알맞다. 너 오늘 강약 조절 참 잘했다. 바람을 타고 또 하염없이 걸었다. 엇박을 타던 발걸음도 제걸음을 하고 있다. 잘하고 있다. 적절한 위치에 비어있는 벤치가 보인다. 해가 저물고 짙어진 하늘만큼 우리가 나눈 대화의 농도도 깊어진다. 멋있는 사람이다. 감히 입에 담고 싶지 않지만 그저 멋있다.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많이 닮고 겹치는 모습을 보았지만 또 다른 모습을 엿보았다. 엿본 틈새에서 사람이 드러난다. 아, 멋있는 사람이구나. 같은 취향에서 나를 느끼고 다른 생각에서 너를 엿본다. 닮아서 끌리고 달라서 반했다. 그렇게 맞물리는구나. 또 쓸데없는 이런 생각을 해봤다. 서로 다른 선상에 서있지만, 나아가는 방향은 다르지만 율동 같은 움직임속 우리는 얼추 맞물린다. 앞에서 보면 달라도 옆에서 보면 살며시 겹친다.
그렇게 오늘 또 하나 심었다. 내일은 무엇을 할지 생각하게 된다. 집으로 돌아갈 때 고민해야겠다. 꽤나 괜찮은 하루였다. 이런 낙원을 그릴 수 있다면 다음 낙원에는 왠지 비가 와도 좋을 것 같다.
극동아시아타이거즈 [몽유호원] 中
<오늘은 비가 와도 좋을 것 같아>
밝은 달빛에 은은한 별빛에
추억에 너와 나무에 앉아
따뜻한 향기에 아늑한 어둠에
꽃을 들고 오지 않는 비를 기다려
만약 비가 온다면
난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내렸으면 좋겠어 오지 않을 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