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은 狂으로 남는가?

- 광종과 세조 그리고 남양주 봉선사로의 여행 -

by 도시백수

문득 떠난 겨울 여행, 이끌리듯 봉선사로.


날 궂은 토요일 아침이었다. 어제까지, 지난주 내내 야근이 잦았다. 간만의 휴일에, 늦게 깨어, 늦은 아침을 먹었다. 지난 한 주가 문득 떠올랐다. 조바심이 일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급히 외투와 모자를 챙겨 차에 올랐다. 멀리 가기엔 이미 늦었기에 가까운 남양주 봉선사로 길을 잡는다.


하릴없이 막히는 일 많은 포천 가는 47번 국도가 오늘은 어쩔지 모르겠다. 매서운 추위다. 요즘의 지구는, 마치 궁지에 몰린 맹수 같다. 필사의 몸부림을 치듯 인정을 가리지 않는다. 인간이 토해내는 그 모든 것들을 이젠 좀 그만하라고, 더 이상 못 참겠다고 포효하는 것 같다.


맞다. 살아야 한다면 내가 사는 것보다 네가 사는 것이 천만 배는 옳다.


퇴계원을 지나서 길은 왕숙천을 따라 이어진다. 염화칼슘 덕에 희뿌연 아스팔트길을 제외하면 주변이 온통 하얗다. 앞서가는 차에서 흩뿌려진 소금 물방울이 유리창에 들러붙었다. 워셔액 없이 와이퍼만 쳤다. 서걱서걱, 뿌득뿌득, 유리인지 와이퍼인지 비명을 질러댔다. 앞이 다시 흐려졌다. 길 옆 얼어버린 왕숙천 위에도 하얀 눈이 소복했고 그 두께를 더해갔다.


진접으로 들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47번 국도를 내려섰다. 광릉으로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을 조심스레 따라가니 어느덧 넓은 주차장에 닿는다. 한쪽에 차를 세우고 '敎宗本刹奉先寺(교종본찰봉선사)'라 쓰인 덩치 큰 일주문을 지나갔다. 왼쪽으로 눈 덮인 연못이 보인다. 여름이면 분홍빛 연꽃으로 장관인 곳인데, 눈 덮인 겨울 못이라 많이 차가울 것 같다. 오래전, 붕어 한 마리를 맥심 커피 유리병에 담아 기른 적이 있다. 내 방 창가에 둔 그 유리병은 오늘처럼 이렇게 추운 어느 겨울밤 반쯤 얼어버렸다. 붕어도 반쯤은 얼어 있었다. 급히 따뜻한 곳으로 옮겨 얼음을 녹이니, 다행히도 붕어는 다시 살아났다. 저 연못 속의 물은 그렇게 얼어붙지 않았으면 좋겠다.


광(光)과 광(狂), 두 제왕의 그림자


봉선사는 조선 제7대 국왕 세조의 광릉을 보호하고, 죽은 왕의 명복을 비는 능침사찰이다.


'세조'는 그의 묘호이며, 능호는 광릉(光陵)이다. 군주가 될 자질이 뛰어났었다고는 하나, 이미 형(문종)이 건재했기에 왕좌를 이을 적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종이 보위 2년 만에 승하하고, 어린 조카(단종)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역심을 드러낸다. 무자비한 폭력으로 많은 사람을 상하게 하고, 조카인 왕을 핍박했다. 결국 왕의 자리를 차지한 그는, 조카의 목숨마저 비참하게 빼앗았다. 정통의 가치와 순수함을 정통이 아닌 자가 차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힘으로 누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눌려진 채 허덕이는 세상 또한 그때뿐만은 아니다.


고려 제4대 왕의 묘호는 광종(光宗)이다. 태조 왕건의 셋째 아들이다. 태조의 황위는 큰 아들 혜종이 이었다. 그러나 광종은 같은 배에서 난 형인 둘째(정종)와 결탁해, 배다른 큰 형 혜종의 대를 끊어 버렸다. 황위를 그들에게 돌리기 위함이었다. 또한 즉위 5년 만에 3대 정종이 요절하자, 역시 그 대를 끊어버리고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 혜종은 태조의 맏이였을 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전장을 누비며 후삼국 통일에 앞장선 영웅이었다. 그런 혜종의 대를 끊어버린 광종에게 정통성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단지, 힘으로 누를 뿐이었다. 종국엔 종친이고 외척이고 호족이고 간에 그에 맞설만한 세력은 모두 도륙하였다. 그리 오른 이가 그리 오를 이를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했고, 광종은 그 본능에 충실했다.


봉선사의 처음이 어땠을지는 잘 모르나, 지금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왕실사찰의 모습이다. 엄격한 교종 사찰에서 출발해 파격의 선종을 거친 우리네 절집은 조선 어느 때부터인가 어느 정도 정형성을 띠었다. 화성의 용주사나 이곳 봉선사 같은 왕실사찰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봉선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큰법당을 중심으로 지장전과 극락전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뒤편 언덕으로는 조사당과 삼신각 등이 또한 다소곳이앉아 있고, 큰법당 정면 마당 끝에는 누마루를 올렸다. 이 모든 구조물들이 서로 짝을 이루고, 전각 높낮이 조절을 통해 위계를 드러낸다. 정연함과 비례의 강조로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6.25 동란으로 폐허가 됐으나, 한글 사랑에 열심이셨던 '운허' 큰스님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현대에 새로 지은 건물들이 다행히도 과거의 터를 해하지 않고 옛터 그대로 올라앉아 있다. 덕분에 우리는 절의 옛 모습을 시차 없이 상상해 볼 수 있다. 심지어 큰법당은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임에도 이질감을 느끼기 어렵다.


조선의 세조와 고려의 광종, 왕조시대로선 당연한 일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인간이었을까? 죄책감 때문인지, 저승 영혼들의 해코지 때문인지, 둘 모두 말년엔 온갖 육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 죽음에 이른다. 일설에 세조는 문둥병(한센병)까지 있었다 하는데, 수많은 등창의 기록을 보면 괜한 말은 아닌 것 같다. 이름에 光자가 들어가면 별로 좋지 않다고 했던가. 둘만 놓고 보면 光은 狂이 되어버린 듯하다.


자식복까지도 박했다. 광종의 대는 5대 경종에 이어 7대 목종에서 아예 종지부를 찍었고, 황위는 태조의 또 다른 자손에게 넘어갔다. 세조 역시 자식 때문에 피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그리 사랑해 마지않던 맏아들 의경세자는 세조의 품 안에서 세상을 등져버렸고, 둘째 아들 예종 역시 권좌를 오래 지키진 못했다. 손자 성종대에 세상이 좀 편해지는 듯했으나, 그 성종의 아들이 연산군이다.


후손의 일을 그들이 알았더라도 그리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말년에 의지했던 것은 종교였던 것 같다. 폐사지로 남아도 그 웅장함을 능히 상상할 수 있는 서산 보원사지에도, 보령의 성주사지에도, 여주의 고달사지에도 광종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도 유명한 오대산 상원사, 월정사, 운길산 수종사, 이곳 운악산 봉선사엔 세조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있다.

[봉선사 큰법당과 좌우 대칭을 이르는 전각들. 누각인 청풍루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웅얼거림과 웃음소리, 절 마당을 채우고 있는 것들


절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천하명당이라는 세조의 광릉이 있다. 그 건너엔 능의 원림이던 광릉숲이 있다. 절과 숲과 능에는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찾는다. 오늘은 단체 순례객까지 찾은 듯, 법당 마당이 소란스럽다. 탑돌이를 하며 읊어대는 그들의 염불소리가 낯익은 웅얼거림으로 내 귀에 닿는다. 사람들의 흐름을 피해 조용히 극락전에 들었다. 오후 볕이 들어 노랗게 물든 창호 너머로 웅얼거림이 계속된다. 방석을 깔고 몸을 내린다. 어느덧 바깥 소란이 멀어져 갔다. 절은 다시금 고요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시 마당으로 나오니, 연인인 듯한 젊은 한 쌍의 남녀가 신기함을 담은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가끔 작게 속삭이며, 서로를 주제 삼아 사진을 찍는다. 신이 나는지, 낮은 웃음소리도 이어졌다. 순례객의 웅얼거림도 좋지만 웃음소리도 거슬리진 않았다. 부처님께서도 좋아하시겠지.

[봉선사 순례객. 그들의 염불 외는 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저음으로 낮게 깔리며 절마당을 가득 채웠다.]


세조는 수많은 절을 다니며 부처님께 복을 구했다. 풍수에도 능통했던 그는 지금의 묏자리도 직접 선택했을 것이다. 풍수상 광릉의 산줄기는 그의 선조와도 멀어져 있다. 죽어서 만날 선대왕의 호통이 무서워 숨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백 년이 지났어도 역사는,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다.


하늘에서 다시 눈발이 날렸다. 함박눈이다. 가는 길이 급하겠다.

[봉선사 설경. 순례객이 빠져나간 절은 다시 고요함에 잠기고, 내리는 눈을 맞은 후 멀지 않아 봄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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