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설예찬(新雪譽讚)

- 눈을 보면 느끼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 안도감 -

by 도시백수

신록을 기리듯, 나는 모든 눈을 사랑한다.


출근길에 이양하(1904~1963, 수필가) 선생의 '신록예찬'이라는 수필 제목이 언뜻 떠올랐다. 눈을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 기상관측 이래 11월 최대 폭설이 내렸다는 어제와 오늘은 기쁜 날이다. 출근길 운전 내내 긴장하면서도, 창밖으로 보이는 두텁고 무겁게 쌓인 눈을 보며 예찬의 감정이 솟아올랐다. 다만, 수필 제목은 떠올렸으면서도 그 내용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배운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도통 기억에 없다. 해서 인터넷에서 찾아 읽어봤지만 역시 내 머리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이런 글은 곱씹고 곱씹어야 그 참맛을 알 수 있다. 감동에 이르기에는 몇 번 더 읽어보고 사색해 봐야 할 것 같다. 다만, 한 문장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그러기에, 초록에 한하여 나에게는 청탁(淸濁)이 없다. 가장 연한 것에서 가장 짙은 것에 이르기까지 나는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


그렇다. 내게 있어 눈도 그러하다. '눈에 한하여 나에게는 청탁이 없다. 존재감 없을 정도의 적은 눈에도, 온 세상을 뒤덮을 폭설에 이르기까지 나는 모든 눈을 사랑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신록을 보며 개인사부터 인간사 세상사까지 넘나들며 성찰하고 있는 이양하 선생의 내공은 감히 넘볼 수준이 아니나, 신록을 좋아하듯 눈을 좋아한다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은 다름없이 공유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눈을 좋아함은 겨울에 들어 내리는 첫눈부터 늦으면 4월 경까지 내리는 마지막 눈까지 시기를 가리지 않고, 내리는 건지 아닌 건지 구분하기 힘든 가랑눈부터 싸라기눈, 진눈깨비, 함박눈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 눈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좋을 뿐이다. 그래도 눈을 통해 얻는 나의 즐거움을 말하자면 우선 그 순백의 색에서 느끼는 압도적인 시각적 쾌감일 듯하다. 이 세상 모든 색을 가리고 순백 하나로 펼쳐지는 풍경 앞에서 어느 누가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음은 나무에든 길에서든 쌓여있는 눈의 몽글몽글한 촉감이다. 이것도 분명 시각적 느낌인데 굳이 촉감으로 표현한 것은 실제 만져봤을 때 그런 느낌이 들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맑은 햇살 아래 밝게 빛나며 차츰 녹아내리는 그 처연함이 좋고, 처마 끝에서 녹아 방울져 떨어지는 그 투명한 청량감이 좋다. 더 많이 있지만, 표현력의 한계로 이 정도만 들 수 있을 것 같다.


천금같은 안도감과 '예쁜 쓰레기' 사이에서


그런데 말이다. 내리는 눈을 보며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은 바로 안도감이다. 내 유전자 속에 농경민족의 DNA가 깊이 박혀있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눈이 많이 내리면 내릴수록 내년 봄 가뭄 걱정은 덜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느껴지는 안도감이다. 평생 가뭄 때문에 내가 직접 고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면서도 그런 감정이 느껴지는 것에 황당하기까지 하지만, 그런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 겨울에 내리는 눈은 다음 해 봄이 되면 물길이 되어 산과 들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그 물길은 이 땅의 수많은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고 살찌우고 살 수 있게 만든다. 눈이 없는 겨울을 난 봄은 뭍 생명들에게는 혹한의 겨울보다 더한 가혹함이요,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의 목숨까지 거둬갈 수 있었다. 세상이 많이 변하고 발전이란 것을 해서 그 지경까지야 이르지는 않겠지만, 아직 그 혜택을 볼 수 없는 생명들이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생각을 하고 있으면 겨울에 내리는 눈은 내게 있어 천금보다 귀한 존재로 느껴진다.


예쁜 쓰레기라고 한다던가. 지금을 살고 있는 현대 한국에서 눈을 보고 예쁜 쓰레기를 넘어 하얀 똥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더 심한 표현이 있다면 그걸 사용하기에 서슴지 않을 기세다. 출근길 눈으로 인해 막히는 도로와 미어터지는 지하철, 지나는 길의 질척질척함, 내 집 앞 눈은 내가 치워야 하는 번거로움, 미끄러져 다치기도 하고. 현대 도시인에게 눈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나 역시 집 앞 눈을 치울 때 조금 힘들기는 하다. 눈이 잦은 겨울에는 좀 그만 왔으면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눈이 좋고, 겨울이 되면 되도록 많은 눈이 내렸으면 하고 늘 바란다. 눈이 없는 겨울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001KakaoTalk_20241128_105900182.jpg?type=w773 [지난 밤의 설경. 오랜만에 맞이한 함박눈의 향연이었다. 내 맘 역시 설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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