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달'이 하룻밤에 다 지었다는, 여주 고달사지 여행 -
시린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계절,
텅 빈 절터의 고요함 속에서 비로소 나와 마주합니다.
세상의 모든 색이 지워진 순백의 풍경 위로,
이루지 못한 첫사랑 같은 청아한 위로가 소복이 쌓입니다.
강에서 멀어 깊숙한 곳, 고달사 가는 길
고달사라는 절은 경기도 여주에 있었다. 남은 흔적만으로도 큰 절이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지금 그 내륙 깊은 곳에 폐허가 남아 있다. 그런데 하필 왜 그곳이었을까? 가는 길은 아직도 좁고 굴곡져 있다.
37번 국도 옆을 따라 흐르는 남한강의 정취는 사계절 모두 풍성하다. 그와 함께 옛사람들은 온갖 물품을 강으로 실어 날랐다. 여주는 나라 곳곳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부(富)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그래서 근방에는 신륵사라는 큰 절이 있고, 가까운 원주에도 거돈사, 법천사 같은 큰 절이 있었다. 부와 함께 모여든 사람들에게 종교적 안식을 주고, 며칠 묵어갈 편의도 제공했다.
고달사는 그런 면에서 조금 이질적이다. 강에서 너무 멀어 깊숙하고, 객이 찾기엔 쉽지 않은 곳이다. 그렇다면 그곳엔 또 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이다.
여주 대신이라는 곳에서 88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좁은 마을과 들을 지났다. 골프장 한가운데를 통과하기도 하는 길은 굽이쳐 이어진다. 갑자기 길 왼편으로 너른 공터가 나타났다.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 절터다. 공터는 서쪽, 남쪽, 북쪽이 막혀 있고 동쪽은 트여 있다. 트인 쪽으로는 작은 마을과 농경지가 들어서 있다. 빙 둘러싸고 있는 산 이름은 혜목산이라 했다.
혜목산 품 안의 고달사지엔 제법인 석물이 많다. 팔각원당형 부도의 전형이라는, 각각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승탑 2기. 상상 속 괴수를 현실에 끌어온 듯한 비석 귀부와 이수. 한반도에서 제일 잘생겼다는 석조불대좌. 톱으로 썬 듯한 불전의 기단석. 원형 그대로인 돌확(물 저장고)과 단아한 돌계단까지. 옛사람들도 그냥 보진 않았던 모양이다. '고달'이라는 이름의 석공이 하룻밤 새 모두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고달사라 했다 한다. 하지만 현대의 발굴 결과, 절에는 최소 네 번의 중창이 있었고, 석물의 조성 시기도 각각 달랐다.
겨울 초입의 오후, 이른 눈에 엷게 덮인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고민스럽다. 결국 아무 곳에나 대충 오토바이를 세운다. 당산나무 아래를 지나 우선 혜목산 북쪽 사면을 올랐다. 생각보다 산길은 가팔랐지만, 천천히 올라가면 그리 멀지 않다.
아류가 가지는 근원적 슬픔, 원종대사혜진탑(보물)
숲길에서 먼저 만나니 먼저 볼 수밖에 없다. 고려 광종대 국사였던 원종대사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까지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의 승탑이며, 977년에 세워졌다. 어른 키의 두 배는 됨 직한 높이와 균형 있게 들어찬 몸집을 갖고 있다. 그 무게감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승탑 표면에 새겨진 갖가지 조각 또한 바로 어제 새긴 듯이 생생하다.
하지만 뭔가 좀 아쉽다. 바로 가까운 곳에 훨씬 더 뛰어난 비교 대상이 있어서일까. 아류가 갖는 어쩔 수 없음은 수준 낮은 내 눈에도 달라 보인다. 불국사 석가탑 이래의 모든 석탑이 갖는 한계와 같다. 아무리 새로운 기술을 써서 꾸민다 해도 석가탑을 넘어설 순 없었다. 원종대사혜진탑 역시 불과 수십 미터 위에 있는 고달사지 부도를 넘어서지 못한다.
꾸밈의 기교 또한 떨어짐을 감출 수 없다. 그래서 보물에 멈추었나 보다. 마음마저 상처받은 듯 왠지 모르게 삐딱하니 탑은 기울어져 있다. 하긴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런 평가를 받았다면, 삐뚤어져도 단단히 삐뚤어질 만하다. 중대석의 거북 머리조차도 고달사지 부도 쪽을 향하게 해 놓았다. 지붕 돌 하단에는 단조로운 구름무늬뿐이다. 중대석 사천왕상 이은 면에도 뻥 뚫린 사각 틀만 있을 뿐 창살 하나 새겨 넣지 않았다. 이쯤 되면 석공의 실수이거나 실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쩐주'가 돈을 적게 줘서 열받은 석공의 심술 같다. 그래서 그런지 사천왕의 얼굴도 잔뜩 부어오른 신짱구 얼굴을 닮아 있다.
감히 평가하기 벅찬, 고달사지부도(국보)
원종대사혜진탑 옆으로 60년대 중절모 쓴 신사의 ‘포마드’ 바른 가르마처럼 생긴 계단길이 있다. 그 길을 거쳐 조금만 더 가면 고달사지 부도를 볼 수 있다. 언뜻 보면 두 승탑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하지만 이 승탑은 들어앉은 자리부터가 천하의 명당자리다. 산줄기의 맥을 정확히 타고 앉았음은 물론, 나무 사이로 고달사지 전경이 내려 보이는 곳이다. 숭유억불 조선 사대부가에서 묫자리로 뺏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하긴 못된 마음을 품고 올라왔다 한들 감히 건드릴 수나 있었을까? 그만큼의 신력을 내보이는 승탑이다.
승탑은 신라 말 선종이 유행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한다. 그전까지는 엄격한 교리하에,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도를 이루면 내가 곧 부처라는 선종의 가르침 속에, 고승대덕은 부처님만큼이나 추앙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 그 열반의 흔적을 탑으로 남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 싶다.
다만, 승탑을 세운 뜻은 부처님 사리를 모신 석탑의 전통을 따랐으되, 모양은 달리했다. 이곳에 있는 팔각원당형 승탑이 그 원형이라고 한다. 물론 이후 승탑들은 급격한 외형의 변화를 거친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석종형 부도가 등장하더니, 그마저도 더욱 단순해져 지대석도 없이 땅 위에 그냥 종 모양 돌을 얹어놓은 형태가 되었다. 물론 요즘 들어 승탑의 크기는 다시 커지고, 그 표현도 화려해지고 있다. 그 흐름이 과연 복원인 것인지, 역행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부도의 중대석에 아로새겨진 거북, 용, 구름무늬부터가 사람의 눈길을 잡아당긴다. 조각의 수준이 단순 윤곽선 표시 정도는 이미 뛰어넘고 있다. 과거 언젠가는 존재했을 법한 거북 괴수와 용이 구름 속에서 서로 엉켜 싸우는 것을 영하 1,000도로 급속 냉동 건조시켜 놓은 것이 아닐까 싶은 정도다. 앞으로 불쑥 내민 거북 대가리가 아직도 생생한데, 반경 100리 이내로는 달걀귀신 한 마리도 접근 못 할 형상이다.
이리 빚어낼 수 있음은 상상력의 소산이었을까? 아니면 따로 모델이 있었던 걸까. 전 시기, 이미 정점에 이른 비석돌 귀부와 이수의 조각 솜씨를 보면 어느 정도 전형이 있었던 것 같지만, 추측만 할 뿐이다. 지붕돌 밑면의 비천상 하나가 결정적으로 탑의 완성도를 한두 단계 이상 격상시키고 있다. 창틀에 새겨진 창살 역시 그렇고, 다른 쪽 면에는 자물쇠까지 표현된 철문까지 새겼으니 그 공들임의 경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내려다보이는 절터 모양새를 눈에 담고, 오던 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다시 만난 원종대사혜진탑에 두 손 모아 합장을 한다.
땅의 모양새와 특이한 배치에서 나는 생각했다.
고달사가 있던 땅은 동쪽으로만 열려 있다. 지세는 열려 있는 곳으로 적당한 흐름이 있다. 그 흐름에 맞게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중심축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석조불대좌가 있는 불전 터는 막혀 있는 남쪽 산을 바라보고 있다. 억지로 남북을 중심으로 삼고자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불전 앞 산자락이 너무도 가까워, 정좌해 계시던 부처님이 조금 답답하지 않았을까?
절터는 크게 세 개의 장방형 평면을 가진 계단식 구성을 하고 있다. 맨 위층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원종대사혜진탑비, 불전과 불탑지, 강당과 승방지, 석등 자리 및 돌확이 들어서 있다. 각 층의 구성 원리까지 이해할 순 없었으나, 삼국시대까지의 폐사지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이전 시대까지는 대부분 중문, 불탑, 불전, 강당이 일직선으로 들어서고 주위를 회랑으로 감싼 정형성이 있었다. 하지만, 고달사지에는 그런 요소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별 급할 것 없는 걸음을 옮겼다. 절터는 잘 정돈돼 있어 돌부리에 채일 걱정은 없다.
마치 살아 있는 듯 역동적인 절터의 석조물
절터의 맨 위쪽엔 고달사지 귀부가 있다. 짝을 맞춘다면 고달사지 부도 임자의 비였겠으나, 고증된 바는 없다. 고달사지 석물들 중 가장 소박한 것으로, 훼손 상태가 심해 원래 모습을 찾긴 어렵다. 절터의 맨 위편에 있다. 방향도 남북축에서 틀어져 있어, 절의 최초 창건기에 조성된 것이 아닌가 싶다.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는 3층 대지에 있다. 고달사지 부도의 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성도가 뛰어나다. 특히 땅바닥에 박힐 듯 날카로운 거북의 발톱과 등 무늬, 이수의 꿈틀꿈틀하는 양감은,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이것들이 살아서 돌아다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생동감이 넘친다. 가운데 비석은 없으나, 다행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한다(현재는 복제 비석이 있다.) 비록 깨진 상태긴 하지만 말이다.
2층 평면의 석조불대좌(보물)는 무미건조하고 심심한 데서 벗어나 간결하고 장엄하다. 존재 자체에서 힘과 압도감이 느껴진다. 다른 석물들과 마찬가지로 고려 초기 작품인데, 왕조의 출발 자체가 무력과 전쟁을 기반으로 한 탓인지 돌에서도 힘이 넘쳐난다. 각 면석의 배치와 새겨놓은 조각 또한 섬세하다. 당시에도 저 대좌는 불전 중앙에 놓여, 그 위 불상을 이고, 함께 위풍당당했을 것이다. 남향이지만, 산그늘로 인해 어둑했을 불전 내부에서 희미한 촛불이 일렁거린 면석은 신비롭게 빛났을 것이다.
절이 무너지고 농사짓던 세월이 워낙 길었기에, 많이 남지 않은 흔적 중 하나가 석축이다. 나는 옛 석축들이야말로 우리네 집 짓기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만날 때마다 반갑다. 극복하되 거스르지 않는다고 할까. 정연하고 엄정하게 줄지어 있으면서도 소박하고 다소곳하게 들어앉아 있는 돌들을 보고 있으면, 그 안쪽에 열선이 들어 있기라도 한 듯 따뜻한 기운이 전해지는 것 같기도 한다.
고달사지의 놀라움은 돌확에서 마무리된다. 맨 아래층에서 만난 돌확의 겉모습은 그리 특이하지 않다. 하지만 안내판에는 건물지 내에 있던 것으로 나온다. 즉, 야외에 있던 것이 아니라 건물 내부에 있었다는 거다. 그렇다면 부엌이었을까? 하지만 구들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목욕 시설이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저 아래에 배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봐선 (하수도가 없었다는 것을 전제로) 옆을 둘러싼 바깥 바닥의 높이는 지금보다 훨씬 낮았을 것이다. 부엌이었을까? 욕실이었을까? 들어선 건물 터도 그 크기가 꽤 크다.
고달사는 중대 신라 마지막을 장식한 혜공왕의 아버지, 경덕왕 23년에 처음 세워졌다. 그러다 선종의 시대인 고려 초기에 사세를 일신한다. 국가가 관장하는 3대 선원 중 하나로까지 절은 커졌다. 하지만 절의 모양은 엄격했던 교종의 교리와는 거리감이 있다. 그전 시대 가장 중심이었던 불전이 이곳에선 뭔가 밀려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대신, 선사에 의한 가르침의 장소인 강당이나 승방(아마도 참선 수행이 이루어지던 곳)이 절의 정면에 배치돼 있다. 특히나, 온갖 공력을 들인 선사들의 승탑과 탑비를 보고 있으면, 이 절이 추구했던 바가 어느 정도 짐작이 된다.
맞다. 고달사는 교종 사찰이 아니고 선종 사찰이었다. 그것도 당대 수위를 다투던 곳이었다. 선종에서는 길 가다 부처를 만나면 그 부처를 거꾸러뜨리라고까지 말한다. 그만큼 종래의 교리와 규칙을 거부하고 그 이면에 있는 진리를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가르침이다. 오로지 참선을 통한 수행을 강조했다. 그런 절이 강가에 붙어 있으면 안 되었다. 내륙 깊은 곳에 있어야 어울렸다. 오가는 객은 오히려 방해꾼일 수 있었다. 그래서 고달사는 이렇게 깊어졌고, 오늘도 고즈넉하다.
세상에서 멀어진 채, 수백 년간 치열했던 수행의 장이다. 오늘 난 그런 곳을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스스로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 지 물었다. 세상을 아귀다툼 속에 살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나를 잃는 삶은 아니었으면 싶다. 이미 인생의 중반을 넘어서고 있지만, 앞으로 남은 삶이라도 스스로를 향한 치열함 속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그 첫 단계는 정직이 아닐까 한다. 스스로에게 정직하기 말이다.
왔으니 다시 돌아갈 시간이다. 내 사는 곳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런 장소가 있음은 분명 복이다. 오토바이 엔진음이 오늘따라 자못 경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