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다, 살아지다

by 승아

살아가며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 속에서 다정함도 배웠지만, 동시에 상처도 받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100 중 50의 거리만 두며 관계를 맺었다. 다가서면 다칠까 봐, 마음을 조금 덜 주는 게 나를 지키는 일이라 믿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99의 정을 내어준다. 계산도 못 한 채,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 다친 기억 위에 또다시 새 정을 쌓으며, 나는 또 흔들린다.

내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우울과 불안이 남아 있다. 아주 오래된 그림자처럼, 잊을 만하면 불쑥 고개를 든다. 낮에는 아무렇지 않게 웃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그 웃음이 버거워 눈물이 흐른다. 스스로도 모르는 불안이 커져 공황이 찾아올 때면, “또 이러네.” 그 한마디가 불안을 더 키운다. 평범하게 살다가도, 이유 없이 무너지는 날이 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걸 수없이 배웠다. 그래서 기대를 줄이려 해도, 실망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더 잘해야지.’ ‘울면 안 돼.’ 이런 생각들은 내게 위로보다 압박으로 다가왔다. 마음을 내려놓고 살고 싶었지만, 어느새 완벽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조금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날에도, 다시 쓰러졌다. 그럼에도 나는 매번 일어섰다. 왜냐면, 쓰러질 때마다 결국 나를 일으켜 세운 사람이 ‘나’였다는 걸, 조금 늦게나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또다시 ‘살아지고’ 있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히 숨 쉬며 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누군가의 위로가 아니어도, 내 안에서 조금씩 피어오르는 생의 온기를 느끼며.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좋아하는 것들이 많다. 꽃을 선물하는 걸 좋아하고, 이유 없이 두세 시간 걷는 산책을 좋아한다. 자기 전 인센스를 피워두고, 향이 천천히 스며드는 시간을 좋아한다. 택시기사님과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빠른 KTX보다 느린 무궁화호를 타는 것도 좋다.

우연히 지나가다 본 작은 식당의 단골이 되기도 하고, 서점에서 책 몇 권을 품에 안고 나올 때면 삶이 아직은 나를 품어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어느 날엔 무작정 바다를 보러 가고, 또 어느 날엔 내 사람과 술 한잔 하며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 이렇게 지내다가 어느 날 펑펑 울고 난 뒤, 비어 있는 휴지통을 보며 ‘아, 휴지를 또 사야 하네.’ 혼잣말을 내뱉는다. 그렇게 우스꽝스럽고도 살아 있는 나를 보며, 조금은 웃는다.

시간은 나를 버리지 않았고, 삶은 여전히 나를 붙잡았다. 어느새 사라지고 싶던 밤들이 줄어들었고, 나는 오늘도, 여전히 살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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