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 발령을 받으면 여기저기서 저를 바라보는 많은 시선을 느낍니다. 특히 어릴수록 더 많은 관심을 받는데 저를 향한 관심과 사랑이 감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처음 발령을 받고 학교에 방문했는데 "선생님 멀리서 오셨던데 집은 구하셨어요?"라고 물어보시더군요. "아니요. 아직 못 구했어요"라고 하니 "그러면 학교 근처로 집을 구하시는 게 좋아요"라고 말을 하셔서 학교에서 5~10분 거리에 집을 구했습니다.
직장과 거주지가 가깝다는 것은 출퇴근 시간이 짧아지는 장점이 있지만 내 사생활이 학생들과 학부모님께 그대로 노출됩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가면 어김없이 다음날 "선생님 어제 ○○ 드셨죠? 어제 마트에서 봤어요"라고 학생들이 말을 걸어오고, 출퇴근 시간에 우리 반 학부모님을 만나고 쓰레기를 버리면서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게 됩니다. 때론 학생들이 건물 입구에서 저를 찾기도 합니다.
회식은 보통 학교 근처에서 많이 하는데 직장과 집이 가까우면 "집이 멀어서요"라는 핑계를 대며 술자리를 중간에 빠져나가기도 힘들어지고 이 자리, 저 자리 학교 근처에서 만나는 술자리는 다 불려 다니게 됩니다.
저는 대학 4년 동안 마신 술이 다 합해서 3병밖에 안될 정도로 술을 잘 마시지 못합니다. 그것도 대부분 1학년 때 마신 것으로 신입생 환영회, MT, 공연 뒤풀이 때 선배들 눈치 보며 술을 거절하지 못해 억지로 마신 것입니다.
술을 마시고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싫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술자리는 안 가는 편인데 "선생님 고생 많아요… 원래 이런 건 술 마시면서 푸는 거예요"라고 말하시기도 했고 원래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인데 신규다 보니 더 거절을 못해 N차 술자리까지 함께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많이 모여 있는 부서들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나에 대해서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모르고 학교 소식에 어두우니 되도록 술자리에 많이 참석해서 사람들이랑 친해지라고 조언을 해주시더군요.
원래 술 해독을 잘 못하는 체질인데 자꾸 술자리에 나가다 보니 다음날 아침까지 술이 깨지를 않아 입에서 알코올 냄새가 풀풀 나는 상태로 수업을 하기도 하고 때론 제대로 걷지도 못해 기어가듯이 벽을 짚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런 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술자리에 많이 나간다고 해서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선생님들과 쉽게 친해지는 것도 아니고 딱히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더군요.
원래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은 성격이다 보니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주는 술만 받아마셨습니다.
하루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선생님께서 갑자기 부르시더니 "선생님 내가 동향 사람으로서 이야기하는데 사투리 고치세요"라고 말하셨습니다.
단어 자체는 표준어를 쓰지만 억양에서 사투리가 묻어난다고 하시더군요. 부산 사람들은 학교에서 부산 특유의 억양으로 수업을 해도 고치라는 말은 안 듣는데 나한테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선 넘는 조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하고 그 자리를 나왔습니다.
"선생님 내가 같은 학교 선배로서 하는 이야기인데…"로 시작하는 말은 저를 더 작아진 게 만들었습니다. "청바지 입고 학교 다니지 마라 예의가 아니다.", "수업 끝나고 음악실에 있지 말고 교무실로 바로 돌아와라. 이것도 염연한 근무지 이탈이다." 등으로 시작하는 말을 들으며 저의 신규시절을 보냈습니다.
"선생님 다른 사람한테 듣는 것보다는 선배인 나한테 듣는 게 더 낫잖아요"라고 말하시며 충고를 하셨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충고는 누구에게 듣던지 상처가 되는 것 같습니다. 예쁘게 둥그스름하게 말해도 상처를 받는 게 충고인데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하게 말을 하셔서 더 위축됐던 것 같습니다.
칭찬을 듣기보다는 자꾸 선배 선생님들에게 혼나기만 하다 보니 무섭기도 하고 눈치도 보여서 동년배 젊은 선생님들과 같이 다녔습니다. 회식자리에서도 젊은 선생님들끼리 모여서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보기 안 좋으셨는지 한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젊은 선생님들끼리 몰려다니지 말라고 말하시더군요…. 그 뒤로는 회식 자리에서도 모여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섞어서 앉았습니다.
"고기는 막내가 구워야지", "선배가 말하면 들어야지" 등의 말만 듣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나도 선생님 나이 때는 다 그랬어"라고 말하시며 젊은 사람은 당연히 나이 든 사람을 모셔야지라는 말과 태도가 특히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주기적으로 갑질예방 교육을 받기도 하고 사회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서 예전보다는 많아 나아졌지만 아직도 주위를 돌아보면 수직적인 위계 관계를 강요하는 분이 더러 계십니다.
술을 좋아한다면 모르겠지만 술을 좋아하지도, 술자리 분위기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술자리에 자주 참석하는 것은 스트레스만 받을 뿐입니다. 어차피 나를 욕할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해도 욕합니다. 일부 사람 중에는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면 더 함부로 대하는 분도 계십니다.
차라리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하면서 나와 친한 몇 명과 깊은 인간관계를 맺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사람은 원래 외로운 존재고 모든 사람과 친해질 필요는 없으니까요….
지금은 전체 회식자리가 아니면 술자리에 잘 참석하지도 않고 2차는 카페로 갑니다.
처음 간 학교의 경우 되도록 사람들이 많이 있는 본교무실로 배치해 달라고 하는 편입니다. 사람은 팔이 안으로 굽듯이 한 번이라도 얼굴을 더 많이 본 사람의 말을 믿으니까요….
한국에서는 특히 나이가 깡패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이 계십니다. 모든 나이 든 분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이를 무기로 삼고 대우받기를 원하는 분과는 되도록 거리를 둡니다. 대신 나이가 들었음에도 대우받으려고 하지 않는 분과는 가깝게 지냅니다.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 사람에게 한번 말한 것이겠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여기저기서 이 말 저 말을 듣다 보니 나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지고 쓸모없으며 가치 없게 느껴집니다.
보통 사람은 굳이 잘못을 콕 집어서 말해주지 않아도 눈치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 '아 잘못했구나'라고 알아서 깨닫습니다.
신입들의 경우는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조그마한 것도 더 크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적당한 긴장은 일의 능률을 올리지만 과하게 긴장하고 위축되면 오히려 실수만 양산합니다.
충고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여기저기서 너무 많은 충고를 한 번에 건네면 잘못된 행동을 고치기는커녕 그 사람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남이 하는 말에 너무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고 그 말이 다 맞는 것도 아닙니다.
청바지를 입고 다니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선생님들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다른 선생님들도 청바지를 많이 입고 다니시더군요. 지금은 거의 매일 청바지를 입고 출근하고 있습니다.
다양성을 중시하는 사회인데 사투리 좀 쓰면 어떤가요. 알아들을 수만 있으면 되죠. 요즘 애들은 없는 말도 만들어서 사용하는데 사투리쯤이야 좀 쓰면 어떤가요…. 그리고 사투리는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고쳐집니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많이 들은 말하게 되니까요.
제 직장생활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잘되도, 못돼도 내가 열심히 고민해서 찾아낸 답을 실행하면서 벌어진 일이면 억울해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