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도 못 시키니 ?
중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중국어의 소리에 휘말리며 눈앞의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귀가 따가운 느낌이었고, 처음 듣는 소리들은 내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얽혀 엉켜버린 듯했다. 높은음과 낮은음이 오가며, 마치 쟁반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의 억양은 나에게 외계어처럼 들렸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려고 했지만 메아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공항에서도 , 집주인을 만났을 때도 , 아파트 청소아주머니를 만났을 때도 영어로 이야기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상대방은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중국어로 나에게 질문을 하였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도 재차 중국어로 질문을 했다. 그들은 또 나에게 중국어로 질문을 던졌고 , 마치 '우리나라에 왔으면 중국어쯤은 할 수 있어야지?라고 묻는 듯했다.
언어가 되지 않는 삶은 나를 어린아이처럼 만들었다. 아이들과 나는 남편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 퇴근과 동시에 처리해야 할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장 보러 가기 , 마트에 물 시키기 , 아파트 산책, 외식하기 모든 것은 남편과 동행해야 했다. 남편 없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전적으로 그에게 의지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평일 낮, 생수가 떨어졌다. 그가 퇴근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아이들이 마실물, 저녁밥 지을 물이 필요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서 마트에 전화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평소와 다르게 남편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 이젠 물 정도는 네가 시킬 수 있지 않니?"
" 언제까지 내가 시켜줄 수는 없잖아. 일도 바쁜데..."
당연한 것에 거절을 당하게 되니 혼란스러웠다.
급히 메모지를 찾아, 아파트 동과 호수를 적고 삼다수 3박스를 적었다. 그 아래에는 중국어 발음을 한국씩으로 적었다. 메모지를 보고 입에 익힐 때까지 몇 번을 따라 했다. 전화기를 들었다가 놓았다를 반복했다. 별것도 아닌 일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전화번호를 눌렀다. 전화벨이 울리고"니하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가 뭐라고 말했지만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 일방적으로 내 할 말만 했다. 인사를 하고 , 동 , 호수를 중국어로 이야기하고 , 삼다수 3박스를 중국어로 이야기했다. 상대방에서 또 뭐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말이 또 들릴까 봐 얼른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과연 내 말을 알아들었을까? 배달이 올까?
포기하고 있을 때쯤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삼다수 3박스가 문 앞에 놓여있는 게 아닌가! 아저씨가 뭐라 말을 하였지만 , 못 알아듣기는 매한가지다. 영수증을 보고 내가 가진 큰 액수의 돈을 냈다. 거스름돈이 맞는지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린 시절 처음 엄마 심부름을 다녀온 것처럼 들떠 있었다. 남편은 차근차근 하나씩 하면 된다고 격려해 주었다.
모든 것을 남편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았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려 하다가도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서는 일이 반복되었다. 아이들은 횡당보도를 건너는 일조차도 나에게 의지를 하지 않았고 , 간단한 외출도 아빠 없이는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남편 없이 독박육아를 2년이나 했던 나였는데 말이다. 엄마로서, 주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자존감은 점점 낮아졌다.
물을 시키는 것이 무슨 대수라고? 이게 뭐라고? 가까스로 물을 시키는 것을 성공하게 되자 지하 깊숙이 있던 용기가 조금씩 피어나게 되었다. 언제까지 남편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까지 적응이라는 단어에 제자리 일수는 없었다. 낯선 나라에서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언어를 배워야겠다는 절실함이 생기게 되었다. 언어를 배우지 않으면 , 나는 여기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