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입 신고? 하라면 해야지요

by 블레스미

드디어

D - DAY



커다란 트렁크들을 8개 끌고 미국 땅에 상륙했다.

흑인조차 흔치 않은 백인 시골 마을.

잘 있거라 손 흔들며 떠났던 우리가

3년 만에 다시 이 땅을 밟은 거다.



이삿짐을 미리 보냈지만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기에

당분간은 레지던스 호텔에서 지내기로 했다.

잠시 일 줄 알았던 호텔생활이

3개월이 될 줄이야

저 때는 몰랐네



소량의 짐들만 풀고

피난민 같은 생활을 시작.

제일 먼저 핸드폰을 개통하고 차를 구입한 후

렌트 계약을 마친 집에

인터넷과 가스, 수도, 전기를 연결하고

남편과 아이들은

시차 적응이고 뭐고 간에

바로 출근과 등교를 시작했다.


그들이 없는 낮 시간 동안 나는

온 동네 마트를 답사하고 털고 다니며

그 좁아터진 부엌에서

밥도 하고 도시락도 쌌더랬지

우린 열심히도 각개전투를 하는 중이었다.



하루는 저녁을 먹던 남편이



"상무님 와이프랑 통화 한 번 해 볼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니

상무가 그러더란다.

김 차장님 와이프 시간 되시면

제 집사람한테 전화 한 번 하는 게 어떻겠냐고.



아... 무슨 뜻이지?

잠시 버퍼링이...



물론 이게 맞을 수도 있다.

한국에서야

어느 누가

상사나 동료 가족과 연락하고 지내겠냐만

이곳은 다르다

파견된 직원들과 그 가족은

작은 부족을 이뤄 살 듯이

서로 만나고 챙기며 지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럼없이 왁자지껄 하는

그런 관계는 절대 아니고

서로 체면 차리며

하하 호호하는 그런 관계.



새로 뉴 페이스가 왔으니

동료는 그렇다 쳐도 윗사람에겐 인사를 하는 게

도리 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버퍼링에 걸린 이유는

이런 얘길

상사 본인이 대놓고 부하직원에게

당신 와이프가 내 와이프에게 전화를 하도록 해라라니

이거 뭔가 좀

자연스럼게 받아들여지질 않는데??



그래서 남편도 알겠다는 대답대신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식구들이 다들 피곤해하니

좀 적응이 되면 하라고 하겠다며

잠시 미루듯 얘길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은

그냥 잠깐 통화하는 건데 상관없죠.



와... 이건 마치

오자마자 해야 할 일을 여태 안 해? 이 기분.

이 말은 분명

상무의 와이프 입에서 먼저 나오지 않았을까 싶었다.

왔는데 인사도 없네? 뭐 이런 식의...

미국 오기 전

전화기 넘어 들렸던 그 사모의 까랑까랑이

내 귓속에 BGM으로 깔려 메아리치더라.



아이를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잡혀놓고

엄마들은 죄인이 되듯이

모든 인사권을 가진,

창창하게 잘 나가는 이에게

남편을 잡혀 놨으니

나는

고개를 되바라지게 쳐들 수 없는 상황이라 계산했다.



다음 날, 남편에게서 온 카톡



"이게 사모 전화번호래"



오늘을 넘기면 안 될 것 같은 강한 예감.

이게 뭐라고 떨리냐

말 없는 공백이 이어지지 않도록

할 얘기들을 메모지에 적었다.

혼자 목소리 톤을 연습하고 리허설까지.

이젠 에라 모르겠다 다.

시간이 지나니 빨리 하고 헤치우자다.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눌렀더니

신호가 가자마자 받는다.


"여보세요~"



"사모님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파견된 김 00 차장 집입니다"



첫마디 뱉고 나니 마음은 훨씬 나아졌고

생각보다 긴 통화가 이어졌다.

사모의 목소리는

내가 기억한 것처럼 까랑까랑이라기 보다

되게 밝으면서도 차분하더라

목소리만 들으면 푸근한 옆집 아줌마가 생각나는

그런 목소리였달까.



오느라 고생했는데

호텔 생활이 힘들어서 어쩌냐며

걱정을 해주시는 부분에선

뭔가 마음이 놓이더니만

여기서 우리의 역할은

아이들 잘 키우고

남편들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거라는

마지막 말을 들었을 땐

놓였던 마음이 다시 긴장으로 돌아갔다.



내가 사람을 많이 대하는 직업이었기에

딱 보면 딱 알겠다 하는 편인데

저 말을 듣자마자

보수적으로 깍듯하게 접근해야 하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단번에 빡!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밀리고 밀린 숙제를 마친 것 마냥

그리 홀가분할 수가 없더라.

통화하는 동안 네네 거리기만 했으니

실수한 것도 없는 거 같고

앞으로 또 뭐 통화할 일이 자주 있겠어?



남편에게도 통화했다고 간단히 톡을 보냈다.

마치 아이에게 엄마가

선생님한테 잘 말해 봤으니 괜찮을 거야라고

말해 주 듯이.



그러다

오후가 되고 빨래를 접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이곳에서 누가 나한테 전화를 하나 하며 보니

사모님이라고 대문짝 만하게 딱 떠 있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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