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할 뻔과 뻔할 뻔이 만나면?

by 블레스미

달이 바뀌고

호텔 생활이 3개월을 채우던 쯤에

한국에서 보냈던 짐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고

우리는

마치 장기수가 석방되는 듯한 기분으로

호텔을 떠났다.



한국의 포장이사는 이곳에 없기에

툭툭 던져놓고 간 짐들을

하나하나

푸르고, 정리하고, 청소하고..

그래도

그 힘듦보다

사람처럼 지내게 됐다는 기쁨이 컸다.



짐이 정리되자마자

우리도 고과장네를 초대했다.



한식으로 식탁을 가득 채웠고

그 집 두 꼬맹이들에겐

우리 집 아이들이 데리고 다니며 놀아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더니

그 부부는

아주 큰 만족의 반응을 보이더라.



그 후로도

L은

큰 아이의 등원 길에 우리 집에 들러

아침을 같이 먹기도 하고

차를 마시기도 했더랬다.



상무와 사모를

정식으로 초대하진 않았다.



그 대신

사모는 강아지 산책길에

중간중간 들렀다 가곤 했었는데

(그만큼 가까운 거리에 살았다)

고과장네를 초대해

얻어먹은 밥을 되돌려 줬다 하니



"딴 얘긴 안 하디?"


"어떤 거요? 뭐.. 별 말 없던데.."



사모는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지금 보니,

다른 어떤 이에게도

내 이야기도 저리 하고 다니셨겠다

싶네



고 과장과 부인 L은

교회에서 만났다고 했다.



훤칠한 키에 호남형인 고 과장은

그 교회에서 드럼까지 쳤던,

제일 잘 나가는 교회오빠였고

L은

그런 그를 짝사랑하는

여인네들 중 하나였다가

위너가 된 거였지.



고 과장에게

이쁜 애들 많았을 텐데 왜 L을 골랐냐 물으니

착해서 좋았다고 말했다 한다.

(참 직선적이고 직접적인 사모다)

아무래도 그런 집이니

착한 애를 고르지 않았겠냐며

그 의도에 맞게 L은

고 과장 말이라면 뭐든지 따르는데

어쩔 때 보면 답답하다가도

사모가 보기엔

맹랑한 구석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들을 더 알게 되고 가까워짐을 느끼면서

유별나다 생각했던 것들도,

답답하다 생각했던 것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려려니 하게 되더라.



모든 게 안정이 되고 나니

뭔가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도 만날 수 있고 영어도 배울 수 있는

ESL 수업을 알아봤는데

딱 한 곳이 있었다.



어덜트스쿨이라는 그곳은

심지어 무료였기에

신이 나 전화를 하고

레벨테스트 예약을 잡고서 기다리는 상황에



아, 맞다! 그 집이 있었지!



미국에 나온 주재원 가정은

우리까지 총 7집.

그중에 3집은 주재원 기간을 채운 후

영주권으로 전환하여

이제 미국 직원 신분이 된 집이다.

그 3집 중 한 집이 생각났다.



대항항공 출신의 M이 만나고 싶었듯

내가 만나보고 싶었던 또 한 명의 여자,

이 디렉터의 부인 H.



H는

주변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나도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그녀의 경험담이 듣고 싶었다.



이런 마음을 잘 아는 남편은

내일 회사에 가면

이 디렉터와 점심을 먹으며 대신 물어보겠다

말해 주었고

나는

뭔가 희망이 될 법한 소식을 물어다 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다음날 오후 시간쯤 되니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기다리고 있을 거란 걸 알기에

시간이 되자마자 전화를 해 주는

센스.



뭐래 뭐래??

다짜고짜 물었다.



남편은

이 차장에게 나의 상황을 설명했고

내가 알고 싶어 하는 부분에 대해

물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여러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우선은

아이를 키우며 영어로 학위를 딴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은 아니지만

시작한 것에 대해 절대 후회는 없다며

진정 원하시면 강추한다고 했다네



하지만 문제는 전공.

시골이라 전공의 개수도 적고

이과 과목이 많은 학교뿐인지라

문과인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았다.



가장 실망적인 것은

내가 가장 희망했던 전공이

알고 보니

학부만 운영하는 것이었던 것.



반드시 공부를 하리라는 계획을

가지고 온 건 아니지만

뭔가를 꿈꾸고, 희망하고, 기대하던

나를

좌절시키는 소식이었다.



한숨을 쉬며 긴 침묵을 하는 나에게

남편은

어덜트 스쿨에 대해서도 물어봤다며

들은 말을 전해줬다.



이 디렉터의 부인 H도

처음엔 그곳을 다녔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녀보니

난민 출신의 이민자가 많아서 그런가

생각보다 수준도 너무 낮고

쾌적한 환경이 아니라서

잠깐 다니고 말았다는 이야기.



나에게 남은 초이스는

지금 현제 그곳뿐이고

레벨 테스트까지 예약을 해 놓았는데

저런 소릴듣고 나니

신이 났던 그 기분이 싹 사라지더라.



요상하게 기분이 더 나빴던 건

저런 후기를 듣고 내가 다니면

나는 뭐가 되는 거지 싶었달까.



나는 맛있게 먹고 있는데

옆에서

맛없다, 먹지 마라, 돈 아깝다 말하면

잘 먹고 있던 나는 뭐가 되냐고 하는

그 기분말이다.



남편은

한숨만 쉬고 있는 날 보더니

그래도 지금 할 수 있는 건

어덜트 스쿨이고

테스트 예약까지 해 놨으니

한 번 가보라고 살살 구슬리더라.



갔는데

나에게는 좋을 수도 있는 거 아니냐,

그 사람은 그런 거고

나는 다를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내 앞에서 열변을.



날이 지나고

테스트를 받으러 어덜트 스쿨로 향했고

그곳에서 구술 테스트를 받았다.

그리고

제일 윗 반에 배정이 되어

첫 수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가만 앉아 있으니

하나씩 들어오는 학생들.

인종도 다양했고 나이도 다양했다.



반을 담당하는 쌤은

얼마나 활기차고 긍정적인지

수업 분위기는 너무 좋았고

누가 어떤 것을 묻든 간에

준비한 듯

대답도 시원시원하게 잘하더라.



사람들도 다정해서

처음 보는 나에게 인사도 먼저 건네고

관심을 보여주니 고마웠고

집에만 있다가

이렇게 나와서 누구든 만나고

콩글리쉬라도 떠드니

살 것 같았다.



그중에 반가운 건

한국인이 하나 있더라는 것.



나 보다 나이가 많았던 그분은

먼저 날 반겨 주셨고

서울 목동에 살다 왔다 하셔서

나는 목동 언니라고 불렀었다.



수업 후

점심을 함께하자 제안해 주셔서

더 긴 대화를 할 수 있었는데

알고 보니

목동 언니의 남편분은

내 남편 회사의 계열사 직원으로

이곳에 주제원을 나왔다가

발령기간이 끝날 때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남편의 폭탄 발언으로 퇴사를 하고

유학 비자로 돌려

이 차장의 부인 H가 다니는 대학원에서

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그런가

그 H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더라



처음 보는 나에게

H에 대한 섭섭함까지 이야기하다니

이건

이 언니가 푼수 인 걸까

H 그 여자가 뻔할 뻔 자 인 걸까



이건 또 무슨 인연이냐 싶으면서

한편으론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팍!



아니,

맘 놓고 편하게 수다 떨 사람을 만났구나

했는데

회사 사람이었다니

이건 뭐 더 조심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다른 계열사이고

다녔던 게 시간이 좀 된 일이라

이 디렉터와 부인 H만 알 뿐

연결된 사람은 하나도 없고

소식은 당연히 어둡다는 것.



그래,

그냥 이 정도면 됐다 싶었다.



돌아와서 보인 내 반응이 좋으니

남편도 다행이라며 반가워했다.

그러면서

안 그래도 이 디렉터가 어떻게 됐냐

물었었더라는.



그 말끝에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은

강약, 약강의 사람.



비굴하게

비위를 맞추는 타입은 아니지만

본인의 이익을 위해선 무조건 직진인 사람.



안하무인의 성향이 있는지라

아랫사람으로 둔 미국인들의 불만이

가끔 올라오고

영주권 취득 후 한국 본사의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는데

앞으로

자기에겐

영어로 보고를 하라고 했다는.



그러면서

유럽 쪽에 직원을 발령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 상사들을 집으로 초대해

피아노를 치는 정성까지 보였으나

자격미달로

물 먹은 경력도 있다네.



대단하다 정말.



그 얘길 들으니

부인 H도 뻔하겠다 싶었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니까.



그래서 어덜트 스쿨을 물었을 때

난민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수준을 따졌나 싶으면서

참.. 말이 안 나오더라.



어쩜 하나같이

다들 이런 집들만 모였는지..



내가 만나고 싶었던 M은

간신 중에 간신이었고

H는 세상 제일 잘난 안하무인이었네.



나 여기서 잘 살 수 있는 거지??



그러고 나서 며칠 후,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적혀있는 이름은 사모님.



잠시 고민을 하다가

반가운 목소리를 장착하고 대답했다.



"네~~ 사모님~~"



그랬더니 대뜸 한다는 소리가



"있잖아,

내가 꼭 확인해야 할 게 있는데

솔직하게 말해줘야 해!"



이건 또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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