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페스트푸드 진단과 생리의 역사(2)
장장 이십 분 동안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쏟아낸 허 여사와의 통화를 마치고, 한결 차분해진 마음으로 벤치에 앉았다. 등을 기대고 목을 완전히 꺾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짙은 먹구름이 겨울 하늘을 뒤덮었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아, 서둘러 일어나 좁은 사거리를 가로질러 큰길로 나왔다. 낮은 상점들이 늘어선 대로변을 따라 좁은 보폭으로 천천히 걸었다. 진통제로 간신히 달래 놓은 자궁이 또다시 패악을 부릴까 두려워, 아랫배에 울림이 가지 않게 조심히 걸었다.
1년 전에도 방심했다가 크게 봉변을 당한 적이 있다. 그날은 생리 둘째 날이었고, 병원에서 처방받은 강력 진통제로 붉고 괴로운 날을 별 탈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행이라 여기며 퇴근 행 지하철에 올랐는데, 방심은 금물이라고 하였나? 결국 나는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 아… 군중 속에서 들것에 실려 나가던 그 쪽팔림은, 극악무도한 생리통에 맞먹는 고통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를 부축하던 남자의 얼굴이 궁금해 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기절한 척 고개를 홱 꺾어버렸다. 아마 그는 나를 꾀병 부리는 관종쯤으로 생각했겠지. 어차피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대체 왜 눈은 떠가지고....... 어리석은 호기심과 지하철 안에서 받은 과한 시선 집중은, 지금도 달밤마다 이불 킥을 부르는 흑 역사로 남아 있다. 아! 그 일의 잔재는 하나 더 있다.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후드 점퍼 한 벌. 아무래도 나를 도와준 그 사람의 것이 아닐까 싶다. 가끔 외로움이 극심해지는 날이면, 그 점퍼를 어깨에 걸치고 창가 앞에 앉아 있곤 한다.
흠......... 좀 변태 같은가?
어쨌든, 그래도 그땐 생리 중이었다. 자궁내막들이 떨어져 정당하게 붉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에, 통증의 이유를 설명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자궁이 생리하는 척, 징징 거린다. 그래서 내 신경은 하루 종일 자궁을 향해 곤두서 있다. 통증이 잠시 잦아들면 도파민이라도 분비된 듯 잠깐의 기쁨이 찾아오지만, 살겠다 싶을 때쯤 다시 시작되는 고통은 마치 면도칼로 자궁과 허리, 골반, 허벅지를 쓰윽, 쓰윽 긁어내는 듯하다. 내 자궁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누군가 자궁에 뇌가 있다고 했다. 전쟁이 창궐하던 시대 여인들에게는 생리가 멈추는 기적이 일어나곤 했는데, 고된 삶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자궁의 배려일 거라는 말을, 생리통을 고치러 간 한의원에서 들었다.
그러니 자궁을 인격체로 존중하며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라던 양쪽으로 머리를 땋아 내린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던 한의사가 떠올라,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한동안은 희망을 품고, 그 이상한 한의원의 방침을 따르기도 했었다. 커피도 얼음도 그 좋아하는 냉면도 끊어봤는데. 30만 원짜리 한약도 몇 년은 먹어봤는데. 밤마다 아랫배를 문지르며 자순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며 친절한 말을 백번 천 번은 더 했는데. 지랄 개뿔 소용없더라.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하다. 이 지독한 아픔을 누가 알리오. 갑자기 커피가 미치도록 마시고 싶다. 그것도 아주 비싸고 이름도 복잡한 커피. 그래야 이 고독함과 억울함이 좀 풀리겠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민했다.
빨리 가서 가게 문을 열 것인가, 아니면 시원하게 하루 쨀 것인가. 고달픈 자영업자에게 유일한 기쁨은 그나마 자유롭다는 거 아니겠는가? 매번 찾는 손님이 있다면 말은 달라지겠지만, 내 경우에는 그게 아니니까.
나는 대한민국의 자영업자다. 전에는 건어물 가게, 현재는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파리만 날리는 나의 작은 보물섬. 파리가 날리는 건 단순히 건어물 냄새가 남아 있어서만은 아니다. 작년 봄, 여섯 번째로 이직한 회사를 반년 만에 그만두고 싶다 징징거리자, 부모님은 나를 불러 앉혀 말씀하셨다.
“직장은 너랑 안 맞는 것 같다. 가업을 이어 받아라”
드라마 속 재벌 말투를 흉내 낸 나의 아버지 박수원 씨 되시겠다. 그럼 나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싫습니다. 아버지! 저에게는 꿈이 있어요!”
해야 하지만,
“앗싸! 회사 쫑이다! 쫑!”
방정맞은 엉덩이를 휘휘 돌리며 쾌지나 칭칭나네를 불렀더랬다. 아빠는 딸에게 뭐라도 해줄 수 있어 빈약한 가슴을 한껏 치켜 올리며, 없는 수염을 양반처럼 쓸어내렸고. 사랑하는 나의 엄마 허윤정 여사는.
“이년아! 회사를 다니고 있어야. 선자리가 들어오지!”
노발대발이었다.
가업을 물려받기로 한 다음 날, 얄미운 윤친년(윤서혜 미친년)과 천알랑(천영하, 알랑방구)이 보는 앞에서 개 팀장에게 사표를 날렸다. 하얀 봉투에 굵은 유성 매직펜으로 [사표] 라고 커다랗게 갈겨쓰고는 안에 내용은 뭐 다 아시다시피, [부모님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 퇴사!] 라고 썼다. 그때 쾌감을 사이다로 친다면, 이 세상 탄산이 아니었다. 아 그 청량함....... 다시 마시고 싶어라.
“부모님 건물에서 장사 좀 해보려고요. 뭐, 커피숍이나 소품 숍 같은 거요. 다들 놀러오세요.”
거짓말 조금 보테서 떨던 내 허세에 쭈그러드는 윤친년의 모습을 살아생전 보게 될 줄이야. 십년 전에 먹고 얹힌 자장면이 쑤욱 내려가는 쾌감이었다. 우울할 때마다 꺼내 보게 윤친년 안면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현조 씨 갓물주 딸이었어?”
특유의 콧소리로 갑자기 자세를 낮추는 개 팀장에게,
“작은 이층 건물인데요. 뭐,”
겸손 한 스푼 섞어 건방도 좀 떨었더란다.
“용산 땅에 건물이라니, 현조 씨 부럽다. 우리 송별회 하자, 현조 씨 뭐 좋아해? 맞다 현조 씨 외동딸이랬지?”
퇴근할 때까지 플로팅을 남발하던 개 팀장 새끼. 화장 좀 제대로 하고 다녀라, 그 나이에 명품 가방 하나 없느냐, 여자는 하이힐을 신어야 한다. 서혜씨 봐라, 얼마나 잘 꾸미고 다니냐, 좀 배워라. 등등, 날마다 윤친년과 비교하며 열라 구박해놓고서는.......
어쨌든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랑할 만 한 건, 부모님이 용산 노른자위 땅에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종 사람들은 묻는다. 조상 대대로 땅 부자였냐고. 아니면 유산이라도 물려받은 거냐고. 전혀 아니다. 부모님은 거의 고아나 다름없었으니, 물려받을 유산이 있을 리가 있나. 부모님은 그저 평범한 노동자셨다. 아니, 평범하다는 말은 정정해야겠다. 두 분은 누구보다 특별나게 독하고, 성실하게 일하셨으니까.
엄마는 빌딩 청소부로 쉬는 날 없이 일 했고, 아빠는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셨다. 일감이 없는 날엔 이삿짐센터에서 짐을 날랐고. 기억이 닿는 나이까지 필름을 되감아보면, 부모님은 늘 땀에 젖어 있었다. 손톱에는 늘 까만 때가 껴 있었고, 옷에서는 시큼 텁텁한 노동의 냄새가 배어있어 백 미터 전방에서도 엄마 아빠의 냄새를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새벽같이 나가 달이 뜰 때쯤 돌아오던 부모님이 늦잠을 자는 모습을,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집 한 채 마련하기도 벅찬 대한민국, 그것도 서울, 더구나 용산 한복판에서 어떻게 건물을 갖게 됐느냐고 묻는다면, 엄마가 사람들에게 했던 말을 잠시 빌려오겠다.
“에이구, 그냥 운이 좋았지. 사실 그때 다 쓰러져 가던 판잣집 산다고, 현조 아빠가 난리도 그런 개 난리가 없었어. 그런데 거기가 그렇게 개발될 줄 누가 알았겠어? 한 채에 천만 원도 안 하던 집이 평당 1억이 될 줄, 누가 알았냐고, 오호호호호호.”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엄마는 새벽에 일을 나가는 길에 후진하던 외제 차에 깔려 크게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6개월이나 입원을 하고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의 큰 사고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는 입원실에 미라 같은 모습으로 누워서 굉장히 좋아했었다. 아마도 이런 대사를 쳤던 것 같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래 누워 있어본다. 편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슬픈 말이지만 그때는.
“나도 좋아! 엄마 일 안 나가니까 진짜 좋아! 계속 누워있어! 절대 일어나지 마!”
호래자식 들을만한 소릴 내뱉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그게 무슨 막말인지. 어쨌든 그 사고는 백 프로 차주 책임이었다. 음주운전이었다. 차주는 병원비 일체를 부담하고, 천만 원이라는 합의금을 주었다.
6개월 뒤, 퇴원한 엄마는 받은 보상금으로 작은 마당이 딸린 주택을 샀다. 겉보기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판잣집이었지만. 지하 단칸방에 어린 나를 두고 일을 나설 때마다, 눈물을 훔치던 허 여사는 만류하는 박수원씨를 물리치고 그 집을 샀더란다.
장마 때는 안방에 비가 세고, 재래식 화장실에는 빨간 휴지와 파란휴지는 있는데, 하얀 휴지는 없는 처녀 귀신이 쥐새끼들과 동거를 하는 그 집에서 중학교까지 살았다. 그래도 주말에는 교회를 갔다가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먹고. 마루에 둘러 앉아 수박도 먹고 여름이면 김장하던 고무대야에 찬물을 가득 받아, 작은 해변처럼 즐기던 낭만의 집이었다.
그렇게 그 판잣집에서 욕심 없이 살던 박 씨네 가족에게 다리도 고쳐주지 않은 제비가 박 씨를 물어다 주었는데, 용산 역을 중심으로 개발 붐이 인 것이다. 커다란 빌딩들이 우후죽순 들어섰고, 백화점과 대기업이 하나둘 세워지면서 양복 입은 아저씨들이 우리 집을 드나들었고, 부모님은 더 이상 새벽에 일을 나가지 않더니 밥상에는 하루건너 소불고기와 팔뚝만한 굴비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둥글고 큰 달이 마당 한가득 쏟아지던 밤에 통장을 흔들며 서로 얼싸안고 울다 웃으며 탈춤을 추던 박 씨네 부부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는.......
여하튼 엄마가 피를 팔아 마련한 판잣집의 터는, 지금의 신용산역 1번 출구와 아모레퍼시픽 사옥이 들어선 자리다. 그 덕에 부모님은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고 엄마는 두 번째 베팅을 걸었는데, 그건 바로 서부 이촌동 구석에 자리 잡은 이층짜리 작은 건물을 사는 것이었다. 옥탑까지 포함해서 80평 남짓 소형 이층 건물이지만, 옥상에서 한강이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알짜 보석이었다.
그렇게 건물주가 된 부모님은 일층 상가 자리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이층은 살림집으로 썼고, 옥탑 방은 월세를 놓았지만, 수리비용이 더 많이 들자 세를 놓지 않고 창고로 쓰게 되었다.
“현조야, 우리는 이제 은퇴하고 고향 내려가서 작은 텃밭이나 일구며 살련다. 건어물 가게는 너한테 물려줄 테니까, 사람 한 명 쓰고 운영해봐라. 고정 거래처도 많고 단골도 있으니까, 돈 좀 모을 수 있을 거야.”
더 이상 회사를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와 기쁨을 안고, 덥석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렇지만 나는 부모님이 상주로 내려가시고 얼마 안돼서 백 가지가 넘는 건어물과 약초를 원가도 안 되는 가격에 땡 처리했고, 아빠가 가장 아끼던 냉동 창고는 설치할 때보다 더 비싼 값에 철거해버렸다.
엄마가 들어준 청약도 깨서 공사비용에 보탰다. 십 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현조네 건어물’을 치우고, 오롯이 나의 꿈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사실 처음부터 그러려던 건 아니었다. 가업을 이어받아 착실히 운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미채 반 근 값만 내고 한 근을 달라고 우기는 손님, 싱싱했던 멸치를 썩혀 와서는 환불해달라며 행패를 부리는 진상들을 몇 번 겪고 나니, 이대로 사는 건 너무 억울했다.
다른 꿈들은 다 좌절되었지만, 이것만큼은 조금만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노력을 했다.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헌책방 사장이 되기 위해서.......
나름 낭만적으로,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만 남기고 전부 손봤다. 벽 하나 없이 뻥 뚫려 있던 입구에는 한때 말린 생선과 오징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지만, 그 자리에 통유리를 내고, 문을 열면 짤랑하고 종소리가 울릴 것 같은 나무문을 달았다. 그리고 대망의 야심작이 있었는데, 재갈량 뺨치는 전략가 박현조는 결국 그것까지 실행에 옮겼다. 철거한 냉동 창고 자리와 책방 공간 사이에 가벽을 세워, 하나의 상가를 둘로 나눈 것이다. 창고 자리에는 세를 놓고, 헌책방을 좀 더 여유롭게 운영할 참이다. 하나의 상가를 둘로 나누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통찰력과 전략은 놀라울 따름이다.
여름이면 꼬릿한 건어물 냄새에 벌레 떼까지 들끓어, 이층집까지 침투하곤 했지만, 이제 이촌2동 172-1번지 건물에는 향긋한 책 향기 외엔 어떤 악취도 없을 것이다. 파리 대신 팅커벨이 날아와 춤을 추고, 매캐한 모기향 대신 은은한 향초가 박현조의 품격을 올려 줄 것이다. 찬란하게 빛날 미래를 꿈꾸며, 드디어 작은 헌책방의 문을 열었고. 다음 날, 소식을 들은 부모님은 상주에서 올라와 완전히 달라진 가게를 보고 뒤로 자빠지셨다.
엄마는 입에 거품을 물었고, 넋이 나간 아빠의 눈빛은 ‘자식이 원수다’라고 말하는 듯 했지만 딸 바보의 입술은. “우리 따님이 사업가 마인드가 있구나.”라는 말과 함께 쓴웃음을 지었다. 배신감과 씁쓸함으로 치를 떠는 부모님의 응원을 강요하며, 야심차게 준비한 작은 헌책방을 오픈한지, 벌써 5개월이 지났다.
흐음.... 팅커벨은 개뿔, 파리만 날리고 있다. 또한 월세를 받으려 했던 창고 상가까지 공실이다.
[카페나 베이커리, 또는 소품샵이나 옷가게 입점 희망, 보증금 천, 월세 100만원]
호기롭게 벼룩신문에 이렇게 올렸으나, 불경기 탓인지 문의 전화 조차가 없어서.
[업종 상관없음, 보증금 500 월세 50만원]
다시 공고문을 올렸다. 드문드문 몇 사람에게 연락이 오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떡볶이 가게를 해보겠다는 아주머니 한 분이 책방으로 찾아왔다.
“우리 애들이 한 명은 의사고 한 명은 교수에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데, 집에 있으니까 심심하잖아요? 제가 왕년에 갈빗집을 크게 했었거든요. 지금은 돈이 묶여 있어서 계약금은 일주일 뒤에 드릴 테니, 다른 사람과 계약하지 마세요. 그리고 보증금 좀 깎아줄 수 있죠?”
그 말만 믿고 공고를 내렸는데, 차일피일 미루던 여자는 한 달 뒤, 이렇게 말했다.
“이 동네는 학교도 없고, 직장인들도 여기까지 잘 안 들어오겠네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그러고는 약만 잔뜩 올리고는 잠적해버렸다.
아아… 숨만 쉬어도 이자는 쌓여간다. 건물주 딸이라고 다 공짜는 아니다. 증여세만 해도 서울 아파트 한 채 값, 그 돈이 어디서 생기겠는가. 결국 증여세를 내기 위해 대출을 받았지만, 이자는 한 달 월급과 맞먹는다. 거기에 헌책방 유지비까지, 부담을 메우려고 받은 또 다른 대출은 생활비마저 잠식했다. 결국, 동네 김치가게에서 마늘을 까는 부업을 하며, 엄마가 들어준 연금저축까지 깨 쓰면서 간신히 버티고 있다. 돈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지만, 오래전부터 로망이었던 헌책방은 그 모든 걱정을 잊게 할 만큼, 백 퍼센트의 만족감을 안겨주고 있다.
비가 오면 더 진해지는 종이 냄새 가득한 책방 안에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앉아 있으면, 뭐랄까? 못다 이룬 사랑에 대한 미련이나 청춘에 대한 아쉬움, sns에 올라오는 동창들의 화려한 일상을 질투하는 감정노동들로부터 잠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나의 헌책방은 현실을 잊게 해주며, 그 자체로 충분한 위로를 건네고 있다. 하늘에서 뭐라도 내리는 날이면, 데스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그 시간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차양막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와 바닥에 튕겨 오르는 빗방울을 보고 있으면, 불안하던 마음은 서서히 차분해진다. 그야말로 헌책방은 나만의 작은 왕국이라 할 수 있다. 대놓고 나를 따돌리던 윤친년도, 그 딱가리 천알랑도 없는, 오롯이 나만의 완벽한 공간.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러니 통장에 구멍이 났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걸 지켜보는 부모님의 속은 타들어가겠지만 말이다.
“하아........”
한숨을 쉬면서 위를 올려보았다. 먹구름은 그대론데 하늘이 밝아졌다. 아까는 비가 올 것 같았는데, 구름 뒤로 쨍한 햇살이 비추기 시작한다. 점점 구름에 그림자가 작아진다. 젠장, 먹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었으면 좋겠다. 그러곤 한 달 내내 비만 왔으면 좋겠다. 이상하게 날이 밝으면 우울해진다. 불쾌감이 어깨를 짓누르려던 그때, 왼손을 높이 들어 투사처럼 외쳤다.
“박현조 충분히 고생했어!”
옆을 지나던 여자가 흠칫 놀라 한 번 훑어보고는 슬금슬금 구석으로 피한다. 나는 가끔 낯부끄러운 짓을 서슴지 않는다. 아마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이러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지금 무지하게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머니에 먼지만 있어도 사치 좀 부려주는 것이 인생 길게 보면 오히려 이득일 수 있는 것이다. 스트레스로 죽는 사람도 있다는데....... 그래서 일터로 향하던 우울한 발걸음을 돌려 별이 반짝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저번부터 먹고 싶었던 오천 원이 훌쩍 넘는 커피를 주저 없이 주문하고, 두리번거려 적당한 자리를 탐색한다. 저만치 햇살이 내려앉은 창가 쪽 빈 테이블을 발견하자, 잽싸게 달려가 폭신한 쿠션에 몸을 기대었다. 옅은 탄성이 자연스레 새어나왔다.
“크으, 조오타~”
좀 전 난리법석을 떨고도 이렇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행복감이라니. 혹시 조증인가? 하루에도 수십 번 오르락내리락 하는 감정을 두고 정신병은 아닌지 의심하며 창밖을 응시했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지나간다. 몰려다니는 아이들도, 혼자 가는 아이도 방학을 했는지, 표정이 참 밝다.
“좋을 때다.”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혼잣말을 크게 하고, 뜨거운 걸 먹을 때 시원하다고 하며, 교복 입은 아이들만 보면 예뻐서 눈을 뗄 수 없으니 말이다. 멍하니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인터넷 창에 자궁근종, 자궁적출, 로봇수술 등을 검색해본다.
[자궁근종 증상은 과도한 생리량, 골반 통증, 빈뇨 등이 있다. 자궁적출술, 복강경, 로봇 수술 등이 대표적이다.]
후 - 아........ 꿀꿀한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자궁근종! 수술 필요 없다! 극심한 생리통과 이별!]
그때 희망적인 문구 발견! 허리를 곧추세우고 휴대폰 화면에 들어갈 듯 얼굴을 들이밀었다.
[24세 김 아무개 씨는 미라클 한의원을 만나 자연치료를 시작한 후 3개월 만에 자궁 속 모든 혹들이 사라지고, 생리 때마다 괴롭히던 통증도 완전히 사라졌답니다.]
부라. 부라. 부라. 다 아는 내용이다. 또 아주 잠깐 해본 경험이다. 그러나 기적은 없었다. 한약을 먹는 동안 통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불구덩이에 하반신이 빠진 것 같은 고통은 조금 누그러져, 잠시나마 살 것 같았다. 그러나 한약을 끊자, 다시 지옥의 문이 열렸다. 수지침부터 쑥뜸, 좌욕까지 안 해본 게 없었다. 동굴에 갇힌 곰처럼 쑥 진액과 생강 물을 몇 년 동안 마셨고, 동네 아줌마들이 “생리통엔 이게 최고야” 하며 가져다준 것들도 부모님이 줄줄이 사주셨지만, 결국 제일 특효약은 액상 진통제뿐이었다. 생리가 시작되기 이틀 전부터 끝날 때까지 진통제를 두 판씩은 먹어왔다. 약의 용량은 통증과 함께 점점 늘어났고, 서른 살이 되자 자궁에 동전만 한 근종이 생겨났다. 그러나 산부인과에서는 3cm크기 근종은 수술할 정도는 아니며, 월경통에는 특별한 치료법도 없다고 했다. 진통제를 처방해 주며 큰일 아니라는 듯, 다음 환자를 빨리 봐야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혼까지 상한 채 나오는 곳이 산부인과였다. 그래서 한동안 그 곳에 발길을 끊고 살았지만, 월경이 끝나도 통증이 멈추지 않아 다시 병원을 찾게 된 것이다.
- 52번, 블론드바닐라더블샷마키아또 나왔습니다.
무릎 위에 올려둔 가방을 던져두고 데스크로 걸어가면서 자문해본다.
‘너는 열 살 때부터 몸에서 자궁을 도려내고 싶었고. 일어나면 남자로 변해있기를 밤마다 기도했어. 진통제가 눈에 보이는 곳에 없으면 극심한 불안함에 시달리잖아? 그렇다면 그 의사 말대로 자궁이 없는 게 낫지 않을까?’
헌데 수술이 너무 두렵다. 도대체! 왜! 어쩌다가! 이런 자궁을 갖게 되었을까? 통증 하나 없이 생리를 나는 여자들도 많다는데....... 이런 자기연민에 빠질 때마다 새로 태어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어린 시절, 또래보다 통통했던 나는 물렁살인 줄 알았던 가슴에 몽우리가 잡히기 시작할 무렵, 첫 생리를 시작했다. 저녁 내내 아랫배가 살살 아프더니, 새벽녘엔 하복부가 이상할 정도로 축축했다. 소변 실수와는 다른 끈적하고 꿉꿉한 느낌에 화들짝 놀라 이불을 들추자 속옷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시뻘건 충격은 마흔이 다 된 지금까지도 지독한 불쾌감으로 남아 있다. 부모님이 사준 사춘기 자녀용 동화책 덕분에 월경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열 살이라는 나이에 맞은 그것은 마치 맨몸으로 낯선 세계에 던져진 듯한, 암담함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수치심이었다.
열 살의 나는 그 새벽에 수건을 고이 접어 속옷 위에 올려 천연 생리대를 만들어냈고, 피로 물든 수건들을 장롱 깊숙이 숨겨두었다. 부모님에게 들키기 전까지는, 그 모든 걸 감췄다. 왜 말하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붉게 물든 속옷을 보고 질색한 나처럼 엄마도 그럴까 봐? 하루아침에 낯설어져 버린 나처럼 아빠와도 멀어져 버릴까 봐? 어른에 것을 하는 열 살의 딸을 보며 슬퍼할 부모님의 얼굴이 두려워서? 여하튼 몰래한 첫 생리는 대단히 비밀스러웠고 충격적이었으며 서글픈 경험이었다.
피에 젖은 수건과 속옷을 들킨 그날 저녁, 생일도 아닌데 아빠가 케이크를 사 왔고. 책상 위에는 분홍색 위생팬티와 생리대가 놓여있었다. 그렇게 초경은 부끄럼과 소박한 축하 속에서 무사히 넘어갔는데 문제는 두 번째 생리 날부터 시작되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온 방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살려달라고 열 살의 나는 울부짖었다. 아빠는 오밤중에 약국으로 뛰어갔고, 엄마는 배를 움켜쥐며 이를 아득아득 가는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늘이 벌을 주는 것 같았다. 나의 자유로운 유년시절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이 나버렸다. 생리를 하지 않는 날에는 다가올 그날이 두려워 달력과 진통제에 집착을 했고. 다가온 그날에는 응급실에 실려 가거나, 양호실에 종일 누워있거나, 등교를 거부하거나, 셋 중 하나였다. 삼십 년 넘게 부모님과 나는 한 달의 한번 이런 초상을 치르고 있다.
“현조야! 결혼하면 생리통도 사라진 덴다!”
엄마가 스무 살 때부터 한 달에 한 번씩 해온 대사를 곱씹으면서, 비싸고 이름도 복잡한 커피를 호로록 들이킨다. 혀에 달린 맛봉오리가 기쁨으로 갈색 음료를 맞이해 준다. 자기연민이 고급 진 커피에 밀려 식도를 타고 위산에 녹아 순식간에 사라지는 느낌이다. 아 조증이 맞는가보다. 아랫배를 문지르면서 자궁에 대해 생각했다. 비록, 생리 때마다 “이 미친 생리 년!” 쌍욕을 날리며 오래도록 원망했고 밥 먹듯 저주했지만, 너무도 쉽게 혹 취급하듯 떼버리라니. 진저리나는 자궁이라도 천대할 자격은 오직 나에게만 있다. 삼십 년 가까이 내 몸을 괴롭히는 자궁이지만, 타인이 버리라 마라 할 순 없는 거다.
“자순아 우리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다시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 순간, 잔머리가 귀엽게 삐져나온 말간 얼굴의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흠칫 놀라더니 감자 칩을 꼭 끌어안고는 베이커리 뒤편으로 참새처럼 달아났다. 총총 사라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서글프고 뭉클한 감정이 튀어나와 목 언저리가 따가워졌다. 순간적인 감정이지만 내가 버텨냈던 그리고 겪고 있는 이 고통을, 저 맑은 얼굴은 모른 채로 살았으면 싶다.
‘소녀여, 부디 아프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