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짙어졌으면 여름이고. 파스텔로 쓱쓱 문댄듯한 색감이면 아직 봄인 것이다. 5월은 아직 여름도, 봄도 아닌 것 같다. 그럴 때는 나뭇잎으로 계절을 구분한다.
초록은 여름, 연두는 봄.
자연은 이토록 질서 정연하게 다음계절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데. 이 놈의 몸뚱이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인색하기 짝이 없게 군다. 생리를 내보내면 자궁이 통곡을 하고. 생리를 중단하면 다섯 가지가 넘는 폐경증상을 내세운 호르몬의 협박이 시작된다. 올 2월에 생리를 중단하는 대포주사를 맞았고 생리통으론 자유했으나, 때 이른 갱년기를 경험했다. 대포주사의 효과는 딱 3개월이다. 정확하게 세 달이 지나면 기적은 끝나고 붉고 괴로운 매직이 시작된다. 봄도 아닌 것이 여름도 아닌, 반팔을 입어도 카디건은 챙겨나가야 하는 어설픈 계절처럼 내 몸도 그러하다.
"오늘은 병원 갔어?"
한 달 내내 엄마와 서현이 전화로 물었다.
"현조야 그래도 병원은 가야지."
이건 경순이가 날마다 하는 잔소리고.
보름 전, 대포주사로 생리를 멈춘 3개월간의 자궁변화를 확인하기 위해 추적검사를 받았고. 김영한 교수에게 굉장한 희소식을 들었다.
"난소 두 쪽 중, 한쪽에 혹이 사라졌고. 자궁벽에 크게 붙어있는 근종 크기가 3센티 줄었네요?"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로 앉아있던 나는 기쁨에 못 이겨 입꼬리가 찢어질 만큼 미소 지었다. 그리고 모니터를 보며 마우스 버튼을 빠르게 누르는 교수의 다음 말을 추측했다.
"현조 님 수술 안 해도 되겠어요!"
그러면 나는 교수 앞에 엎드려 감사의 절을 올려야 하나? 아니면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하나 고민을 했고. 경순이와 자축파티음식으로 곱창볶음을 사갈까? 치킨을 사가야 하나. 그런 갈등을 했단 말이다. 그런데 내 예상을 뒤엎은 말을, 김영한 교수가 차가운 어투로 비장하게 뱉었다.
"평생 대포주사를 맞고 살 수는 없어요. 뼈검사 해봐야 알겠지만 골다공증도 진행될 거예요. 그리고 주사를 멈추고 생리하면 사라졌던 혹들은 다시 생겨요."
기대와 기쁨과 계획했던 것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참담함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는.."
"수술해야죠. 놔뒀다가 암으로 전이될 수 있어요. 마음 강하게 먹고. 그때 말했던 것처럼 난소는 살리고. 자궁은 혹이 붙어 있는 아래쪽만 절제하는 겁니다. 사실상 지금 자궁상태는 임신할 수가 없어요. 몸을 아프게 하는 역할만 하고 있는 거죠."
두 번째 사형선고를 들었다. 희망을 품은 것만큼 더 괴로웠다. 분명 서현이가 그랬다. 김영한 교수는 산부인과 의사치고 따뜻하고 친절하다고. 헌데 왜 나한테는 이렇게 냉정하고 차가운 걸까. 왜 한 방울 정도의 기적도 권하지 않는 걸까.
"일단 뼈검사받고, 다시 진료실로 오세요."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막연하게 앉았는 나에게 김영한 교수가 말했다. 옆에 서 있던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mri실 앞에서 멍을 때리다가. 내 이름을 부르는 의료진 음성에 부리나케 일어나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내 옷으로 갈아입고는 병원에서 도망쳤다. 그랬던 것이 벌써 보름 전일이다. 지금은 세 달여간, 갇혀있던 선혈이 생리대가 낭자하도록 신나게 쏟아지고 있다. 물론 허리가 부서지게 아프고 자궁에 주리를 트는 것 같은 통증과 밑이 빠지는 것 같은 고통이 수반된 월경이다.
"어차피 현조 님 자궁은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
"어차피 현조 님 자궁은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
"어차피 현조 님 자궁은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
김영한교수의 진단이 계속 귓가에 맴돈다. 교수의 진실된 그 말이 사무치게 아프다. 경순이가 약국에서 브랜드별로 사다준 진통제를 꺼내 목으로 넘겼다. 속 쓰리지 말라고 위통약까지 챙겨준 살가운 경순이. 그나마 경순이가 옆에 있어서 암담한 시간을 견디고 있다. 생선가지가 박혀있는 것처럼 목이 갑갑하다. 알약이 중간에 걸렸나 보다. 물병을 보니 동이 났다. 밤새 먹은 진통제가 물 2리터를 마셔야 하는 양이었나 보다. 주방까지 나갈 기력도 없어서 그냥 누워버렸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새벽에했던 많은 것들을 곱씹었다.
"자순아.. 왜 그래.. 생리도 끝나는데. 왜 자꾸 우니.. 나 진짜 힘들다. 그만해.."
타이르다가.
"자순이 나쁘다. 진짜 너는 나쁜 년이야.. 나쁜 년이야!"
원망하다가.
"썩을 년! 씨 팔 년! 썅년! 확 떼버릴 거야! 내 말이 농담인 줄 알아? 의사한테 가서 너 죽이라고 할 거야! 죽여서 갈기갈기 찢어버리라고 할 거야! 아아악!"
정신 나간 여자처럼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부었다. 밤새, 미친 여자처럼 악을 쓰고 아랫배에 주먹질을 했다. 나 대신 많은 일을 감당하는 경순이가 깰까 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흐느끼다가 주섬주섬 일어나 효과도 없는 진통제를 털어먹었다. 잠에 들라치면 미세한 통증이 얄궂게 괴롭혔다. 이불 위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앉았다 누웠다. 스탠드를 켜서 책을 보다가 집어던졌다. 그러다 갑자기, 왜. 그놈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생리통보다 그놈을 향한 호기심이 한발 더 앞서서.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플도 삭제했던 페이스북을 깔고 기어이 들어가고 말았다. 동기 계정을 타고 들어가 그놈을 찾았다. 죄지은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고. 묘한 카타르시스마저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그놈이 페이스북에 불행한 인생을 조금이라도 흘려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러면 내 자궁이 울음을 멈추고 방실방실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새벽 그놈의 이름을 떨리는 손가락으로 클릭하고 말았다. 그리고 메인 화면에 나를 무너뜨릴 사진 하나가 공격적으로 떠올랐다. 백사장에서 작은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건강한 남녀가 세상 모든 행복은 지들꺼라는 듯,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사랑하는 와이프와 아들내미, 행복은 가족에게서. 자식을 낳아보지 않은 자 인생을 논하지 말아라.]
개새끼. 나를 약 올리는 맨트까지 사진 밑에 달아놓았다.
"그래... 나는 살 자격도 없네.."
비참하다. 비참하기 그지없다. 나는 내 인생이 창피하다. 가엾거나 애처로운 것이 아니다. 나는 나를 동정하지도 않는다. 내 몸이 절망스럽고 괘씸하다. 이렇게밖에 못 사는 나를 죽이고 싶다.
"죽고 싶어.. 죽고 싶어.."
만약에 그놈이 나랑 결혼을 했다면 그놈도 불행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그놈을 참 예뻐하나 보다. 나 같은 것한테 도망치게 해 주고.
"죽고 싶어.. 진짜 죽고 싶어.. 경순아.. 나 죽고 싶어.."
그때 경순이가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급하게 이불을 뒤집어썼다. 경순이가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눈만 보이게 이불을 살짝 내렸다. 조심스레 커튼을 치고 있는 경순이가 보였다.
"경순아.."
놀란 경순이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자는 줄 알았네. 밤새 앓았지? 어여 자."
경순이는 커튼을 마저 쳐주고는 쪼그려 앉아서 내 아랫배를 문질렀다.
"경순아.."
"응?"
"나 어릴 때, 엄마가 자꾸 강아지를 사줬어. 그래놓고 좀 정들라치면 누구한테 줘버렸어. 이사 가야 해서. 식당 하는 집에서는 개키우면 안되니까. 아파트로 이사 갈 수 있으니까. 마당 넓은 집에서 키워준대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그래놓고 또 새 강아지를 데려와 품에 안겼어."
"왜 그랬냐고 물어보지. 엄마한테."
"알고 있어. 내가 외로울까 봐. 그런데 나는 강아지를 어떻게 사랑해 주는 지를 몰랐어. 밥도 잘 안 챙겨주고. 혼자 두고 나가고. 산책도 안 해주고. 끈도 안 매고 혼자 다니게 하고. 자꾸 생각이나.. 내가 했던 나쁜 행동이 자꾸 나를 괴롭힌단 말이야.. 그때는 그게 나쁜 건지 몰랐어. 사랑해 주는 방법을 챙겨주는 법을 몰랐단 말이야. 그래서 엄마도 나도 벌을 받나 봐."
침대맡에 동그마니 앉아 내 아랫배를 쓰다듬던 경순이가 손을 옮겨 가슴을 토닥여주었다.
"줬다 뺏었다. 줬다 뺐었다. 나는 한 번도 갖고 싶은 걸, 오롯이 가진 적이 없어."
"현조한테는 이젠 나비가 있잖아.. 나비는 네 허락 없이는 그 어디도 안 떠나."
경순이가 손을 거두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빛깔에 연두색은 없어. 빛은 연두색을 버렸어. 연두색이 내 자궁 같아... 경순아 나 힘든 거 맞지?”
“왜 물어 그런 건..”
“가끔 검증받고 싶어서 내 아픔을..”
“왜..”
“너에 비하면 나는 아픈 것도 아닌데 엄살 부리는 걸까 봐."
"그런 건 비교하는 거 아니야. 슬픔은 차별하는 거 아니지.. 그런 걸 누가 정하는데. 내가 요즘 네 덕에 책 좀 읽잖니? 한 권이더라도 찐하게 읽어야 뭐라도 느끼는 거더라. 책과 감정은 똑같은 거 같아. 양보다는 깊이를 헤아리는 거.. 내 슬픔의 깊이가 1 미터면 1미터만큼 위로해 주는 게 맞는 거지. 당신의 슬픔은 한 개밖에 없으니, 두 개인 사람이 더 슬픈 게 맞습니다. 이럴 순 없잖아? "
"경순이 너 공부해라. 너는 뭐라도 될 것 같아.."
"그래?"
"경순아..
"응..
"내가 쓰레기가 된 것 같아. 재활용도 안 되는 쓸모없는 폐지.. "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을 죽여 울었다. 그리고 경순이는 늘 그랬던 것처럼 가만히 아주 고요히 나를 지켜줬다.
"현조야, 내 말 좀 들어볼래?"
경순이가 불렀다. 나는 이불을 이마까지만 내리고 과호흡을 가쁘게 내쉬었다. 흐윽, 흐윽, 흐흐윽. 진동섞인눈물의 잔재 같은 것들이 숨을 멈춰도 강제로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가을이 할머니 따라서 저번주에 교회를 갔거든. 거기서 들은 얘긴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있었거든? 하나님 일 하는 훌륭한 사람인 것 같은데. 잘은 몰라. 어쨌든 그 바울이라는 사람도 엄청 질병이 많았데. 그래서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기도를 세 번이나 했는데. 하나님이 바울의 질병이 은혜라고 말했데. 그 약함이 강함이 된다고 했데. 그래서 바울이 뭐라 그랬게?"
"뻐큐 날렸어?"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던 경순이가 목을 꺾으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내 약한 것을 자랑합니다!"
"그게 뭐야.."
"현조의 아픔이, 아픈 것으로 자랑이 될 날이 올 것 같았어. 그 말씀을 듣는데 말이야."
"약 올리나?"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경순이를 흘겨보았다.
"현조야. 오늘 가게 문 닫고, 나갈래? 토요일은 장사 안 돼서 샌드위치도 조금밖에 안 만들었어. 어때? 창문으로 보니까 과일트럭이 왔어. 거기 과일 맛있잖아. 딸기 향기 나지 않아? 딸기 이만큼 사서 한강에서 먹자."
나는 울먹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샌드위치 내가 다 먹을 거야. 맨날 팔기 바빠서 먹고 싶어도 못 먹었어.."
"그래! 우리 현조 다 먹어!"
"경순아"
"응."
"아기 태어나면. 내가 제일 먼저 안아봐도 될까? 유모차는 내가 끌어도 될까?"
"당연하지!"
"경순아.."
"응"
"나 수술해야겠지?"
"그러고 싶어?"
"응.. 이젠 이별해야 할 것 같아. 우리 자순이랑.."
경순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울었다. 애써 눈물을 참으려는 나 대신 경순이가 울어줬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끝이 빨개지도록 말이다. 경순이는 자기 슬픔 앞에서는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면서 남의 일에는 바보같이 철철 운다. 경순이는 어디서 그렇게 많은 눈물을 모아 온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