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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는 쥐보다도 못하지

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by 주양

가슴속에 바다를 품고 사는 경순이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버텨내고 있는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다 나의 얕디. 얕은 호기심이 참으로 못돼먹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먼 데를 바라보면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책장 끝에 삐딱하게 걸쳐있는 자명종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저녁시간을 훌쩍 넘어 가고 있었다.

“현조는 결혼 생각 없어?”

정적을 깨고 경순이가 물었다.

“뭐....... 굳이?”

망설임 없는 대답에 경순이가 숨을 쉬는 것처럼 조용히 웃었다. 고요한 이 밤, 그녀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헌 책들 사이사이 은하수처럼 흘러 다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고리타분한 옛일들을 끄집어냈다. 감성 돋는 이 밤의 분위기 하나 때문에. 아마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이불 킥을 하며 후회할 말들이지만.

“살면서 딱 한번 사랑을 해봤어. 결혼을 한다면 그 사람이랑 하고 싶었지.”

“언제였어?”

“보자보자. 지금이 2020년도니까. 이십 대 초반이 2007년? 스물넷에 만나서 딱 서른에 헤어졌어.”

“예뻤겠네? 사랑을 하던 현조는. 한번 보고 싶다.”

“예쁘기는. 찌질 하고 치졸하고. 자신도 없었고.”

씁쓸하게 웃으며 식어가는 난로를 응시했다.

“거의 십 년을 바라봤어. 그 애 옆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았어. 그런데 서 있더라, 다른 사람이. 점점 연락이 안 돼서 바빠 그런가했지. 그렇게 다른 사람 옆에 서 있는 줄은 몰랐지.”

큰 눈을 깜빡거리던 경순이 목 언저리가 순식간에 단풍잎처럼 붉게 물들었다.

“너 목 왜 그래?”

“눈물 참아서 그래.”

“야 너 칠면조 같다.”

폭소를 터뜨리기에는 그녀의 눈이 너무 슬퍼 보였다. 나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그런 내 표정이 우스웠던지, 목이 벌건 경순이도 푸풉! 웃음을 뿜으며 고개를 숙였다.

“칠 칠면조....... 푸하하하하.”

어릴 적에도 우리는 별일 아닌 일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먹던 주스를 뿜고, 오줌이 나올 정도로 배를 잡고 웃었다. 열두 살, 그 때처럼 우리는 바닥을 뒹굴며 배가 찢어지게 깔깔거렸다.

“그 그만 웃어. 나 나 이러다 애 나오겠어.”

“뭐? 애 애가 나와? 푸하하하하하”

간신히 멈춘 웃음을 다시 쏟아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진짜 그만 웃어, 이러다 둘 다 죽어. 슬픈 생각해. 슬픈 생각.”

내가 먼저 잔웃음을 간신히 털어내면서, 경순이를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보일러실에서 가스버너와 냄비를 찾아 꺼냈다.

“배고프다. 김밥이랑 라면 먹을까?”

“뷔페는?”

“주말에 가자! 63빌딩 안에 뷔페 있어. 거기 가자! 스카이라운지도 가고!”

“그래! 그래! 스카이 라운드가 뭔진 몰라도 좋아!”

소파에 앉아 배를 만지는 경순이는 배가 땅긴다고 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으라, 말하며 화목난로에 땔감을 더 넣으면서 라면 물을 올렸다.

“아까 그냥 돌아간 손님들 많았지?”

“내일 만두 서비스 주려고.”

“만두는 만든 것처럼 맛있더라?”

“그지? 공장 만두라고 얕보면 안 된다니까.”

밀면 가게 문 앞에 [개인 사정으로 쉽니다.] 라고 써 붙인 채, 헌책방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는 중이다. 확성기 삼총사가 번갈아가며 문을 두드릴 때마다, 숨을 죽이고 구석에 몸을 숨겼다. 은근히 스릴 있고 재밌어서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 개 끓인다.”

“이 밤에?”

“허어 이경순님 왜 이러실까? 뱃속 아기는 입 아니냐? 가슴속에 복실이도 먹어야 하고.”

“그렇네, 현조 말이 맞네.”

“밀면 가게에서 만두 좀 갖고 오면 좋은데. 지금 나가면, 확성기 삼총사한테 붙들리겠지?”

“응, 지금 슈퍼에서 맥주 마시고 있을 거야.”

“그래? 그럼 절대 안 되지.”

나는 미니 냉장고에서 김치 통을 꺼내면서 경순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복실이 가슴에 넣고는 어떻게 살았어?”

“다방에 취업했어. 십 년은 했을 걸? 그때 두 번째 사랑을 만났지.”

“지금 애기 아빠?”

“아니? 내 두 번째 사랑은 다방손님이었어. 그 사람 일하는 공사장으로 매일 배달을 갔거든. 그러다 눈이 맞은 거지. 그 사람이랑 살고 싶어서 사장님 몰래 부산으로 도망쳤어. 바다가 보이는 언덕위에 작은 집을 얻었어. 우리는 눈만 마주쳐도 숨이 넘어가게 웃었어. 우리는 서로를 웃게 해 줬어. 너무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었는데. 피부는 엄청 까맣고 어릴 때부터 공사장에서 일을 해서 지문도 없는 그런 남자. 뭐 지금쯤 우리 할머니 만나서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있을 거야. 더 이상 무거운 짐도 안 들고. 힘들게 막노동도 안 하고. 그렇게 두 번째 사랑을 떠나보냈어.”

또 아픈 말들을 숨 쉬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뱉어놓는다. 늘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건 내 몫이다. 이럴 땐 어떤 말을 해주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

“두 번째 사랑은 왜 죽은 건데.”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사고였어. 일 끝나고 밀 면 먹기로 했는데, 그 사람 밀면 대장이었거든. 그래서 나 그 사람 기일에 직접 밀면 만들어주려고, 밀면 집에 취직한 거다?”

“네가 만든 밀면 끝내주지.”

“그 덕에 밀면 가게도 차리고, 현조랑 그 사람 덕분에 사장님도 다 해보네.”

경순이가 바보처럼 웃는다. 나는 바보처럼 울고 있는데.

“그이랑 살던 집을 떠나지 않고 계속 밀면 집에서 일을 했는데, 지금 뱃속에 있는 애기 아빠를 만났어. 일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박카스 건네주던 다정한 사람.”

“다정한 사람인데. 왜 사라진 거야.”

“사라진 거 아니야. 지금쯤 부모님 설득하고 있을 거야. 반드시 만날 거야. 만나면 지으려고 아기 태명도 안 지었는데. 현조가 지어주라!”

“내가?”

“응!”

“흠. 한번 생각해 볼게.”

경순이는 난로 위에서 바글바글 거품을 뿜어대는 냄비 물에 라면을 넣으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프를 넣자 뜨거운 물은 화르르 성질을 내며 넘치도록 끓어올랐다.

“경순아 차가운 물 부어버려!”

곧 구수하고 매큼한 향기가 책방 가득 퍼졌다. 허기지진 않는데, 혀 밑으로 자꾸만 침이 고였다.

“가스레인지 바로 옆에 두고 난로에서 뭘 그리 궁색하게 끓여 대냐, 응?”

“라면은 난로위에서 끓여야 제 맛이지. 우리 화목 난로는 절대 버리지 말자.”

“그러지 뭐! 애기 낳으면, 화목난로에 낭만을 알려줘야 겠구만?”

경순이가 까르륵 웃는 순간, 냄비 속 국물이 넘칠 듯 다시 끓어올랐다. 나는 뒤로 넘어가는 경순이를 붙잡고, 라면 물에 입김을 호호 불어 식혔다.

“넌 왜 그렇게 시덥잖은 것에도 까르륵거리냐?”

“현조가 재밌어서. 너만 보면 웃겨.”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참내.’ 하고 중얼거렸다.

“나 현조한테 궁금한 거 있어.”

“말씀하셔! 오늘 밤은 다 말해 줄테니.”

“현조는 그 남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아마도?”

“나쁜 놈! 천벌 받을 거야!”

“그러지도 않더라. 잘 먹고 잘살더라.”

“어째 알아?”

“페이스 북에서 훔쳐봤지. 좀 못살기를 바랐는데, 아들 낳고 잘 먹고 잘살더라. 와이프는 또 기가 막히게 잘 골랐더라고. 여우같은 게.”

“현조 다시 사랑하자. 더 좋은 사람 만나서.”

“그놈 결혼하고 엄청 선을 보긴 했었지.”

“정말? 어땠어?”

“첫 소개팅 남자는 만나기 전날, 열한 시 넘어서 전화를 하더라고. 대뜸 술 마시냐고 묻더라? 그래서 적당히 마신다 했지? 지는 술 못 마시는 여자는 싫다는 거야. 예의 없고 재수 없지만, 그래도 비위를 맞췄어. 그때는 어떻게든 누구라도 만나서 복수하듯 결혼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잘 보이려고 절절맸지. 어우 아직도 열 받네? 어쨌든 다음날 소개 남을 만났어. 보자마자, 술집으로 데려가더라? 모텔골목 있는 술집으로! 그 독한 소주를 빈속에 들이부었어. 잘 보이고 싶어서.”

“현조 힘들었겠다.”

“근데, 또 지는 안 마시더라? 그러다가 술집에서 틀어놓은 티브이 화면을 가리키더니, 어? 우리 학굔데? 제가 서울대 나왔거든요! 으스대는 거야. 그래서 아 그러냐고. 머리가 좋으신가 봐요. 칭찬했지? 조금 있다가 술 한 잔 따라주면서 뭐라는 줄 아냐?”

“뭐라고?”

경순이가 붉어진 눈 밑을 손등으로 비비더니 얼굴을 내 쪽으로 바짝 붙였다.

“원나잇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만나면 속궁합부터 확인하거든요? 저랑 가치관이 맞는지 알고 싶네요.”

“미친놈이네. 서울대 미친놈이네?”

“그런데 그 미친놈한테 나 까였어. 애프터 왔으면 억지로라도 만났을 거야. 그때는 복수의 혈안이어서 제정신 아니었거든. 어떤 남자라도 상관없었으니까. 나도 카톡에 웨딩사진 올려야 했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첫 소개팅은 시원하게 까였고. 두 번째 소개팅이었어. 친척언니가 해준 거였는데. 자기 동창이라고 정말 착하다고 해서 만났거든? 걔는 또 더 가관이더라.”

두 번째 소개팅 남은 첫 번째 소개남과는 다른 분위기여서 조금 기대를 걸었다. 택시를 타고 한참을 찾아 들어가야 하는 외곽, 한식당에서 접선했다. 찾아오기 힘든 곳에 약속장소를 잡아서 미안하다는 소개 남은 외모는 못났어도 사람은 착해 보였다. 애석하게도 그 착함은 얼마못가 와장창 깨져버렸지만. 갑자기 키득키득 혼자 웃던 두 번째 소개남이 얇은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얼마 전에 뉴스를 봤는데, 어린이집 원장이 횡령을 했거든요? 횡령한 돈으로 뭘 샀게요?”

“뭐를 샀는데요.”

“자위도구요. 흐흐흐”

“네?”

“자위도구요! 여자들 성행위할 때 쓰는 삽입기구 있잖아요? 으흐흐흐.”

못 들은 척,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그러나 두 번째 소개 남은 집요하게 자위도구로 원 위치했다. 집에 갈 때까지 여성의 자위가 어떻고 더러운 주둥이를 나불거렸다.

“뭐? 뭐 그런 변태새끼가 다 있어?”

“그런데 더 웃긴 건, 뭔 줄 알아?”

경순이가 라면 한 젓가락을 집어 입에 넣다말고는,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 변태한테도 까였어. 진짜 비위가 상하는 거 참고서 내가 먼저 애프터 비슷하게 문자 보냈어. 돌아온 답장이, 네 편히 쉬세요.”

“감히?”

“응 감히. 나보다 못생긴 게.”

“현조야! 똥차들 갔으니까. 새 차 올 거야!”

주먹을 꼭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경순이를 보며 생각했다. 똥차 가면 새 차가 오는 게 아니라, 똥차 가면 쓰레기차 오고, 쓰레기차 가면 폐차가 오는 거라고. 여기서 더 나이 들면 고물 자전거조차 만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똥차들에게 차인 나는 폐차 수준도 안 되는 모양이라고. 이런 말들은 경순에게 하지 않았다. 분명히 이경순은 박현조는 외제 차, 그것도 최고급 승용차라고 우길 게 뻔했으니까.

“누굴 탓해. 내가 못나 그렇지. 이렇게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소개팅은 끝이 났습니다.”

“할머니가 그랬어. 살면서 자책은 말라고. 남 탓도 말고. 내 탓도 말라고. 고민 있어도 잘 자고. 아파도 잘 먹고. 생각 없이 그저 허허 웃으라고. 그러다 보면 주니 나고 쓰디쓴 세상이 좀 살만해지지 않겠냐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겼지만, 난로에 따뜻한 불과 헌책방 안에 틀어놓은 조명 그리고 우리의 움직임과 대화는 꺼질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더 활활 타올랐다.

“가을이 할머니도 자주 오시라 그래. 집이 너무 넓어서, 혼자 계시면 외롭다 하신다며.”

“현조 불편하잖아.”

“너 거는 다 이해할게.”

경순이가 눈을 휘둥그레 뜬다. 가만두면 눈물샘이 터질 게 뻔하다.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신파는 이쯤이면 충분하다

“나비 왔나?”

“응 집으로 들어가는 거 봤어.”

“나비 걔. 괜히 은혜 갚는다고. 쥐새끼 같은 거 물어오지 말라 해라!”

“알았어. 매일 밥 주면서 당부한다고! 쥐 물어오는 날, 너는 쫓겨난다고.”

“알아듣디?”

“그럼 얼마나 영특한데.”

고단함도 없이 밤에 취한 우리는 라면 국물까지 싹싹 비워내고 우엉티백을 찻잔에 우렸다. 구수한 향기가 코밑까지 타고 올라왔다.

“현조! 그거 생각나? 윤혜가 우릴 엄청 무시하고 따 시키고 그랬잖니? 조모임 할 때도 우리는 빼버리고 말이야.”

“그랬지. 어린애가 왜 그렇게 못됐나 싶어. 자기들 소지품 내 서랍에 넣어두고는, 도둑 맞았다고 담임한테 일렀던 거 기억나? 그때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울었는지 모르겠어. 열 받아. 그래도 경순이 네가 복수해줬잖아.”

“운동회 날, 콩 주머니로 뒤통수 때린 거?”

“아니아니! 그거 말고. 간장 사건!”

“간장?”

“도시락 간장 테러 사건!”

“아! 아아아! 아아!”

거대한 유적지를 발견한 탐험가라도 되듯이 탄성을 내지르는 이경순이다.

“그걸 까먹냐? 엉? 그걸 까먹어?”

사사건건 못살게 구는 소윤혜 무리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은 우리는, 체육 시간에 몰래 교실에 들어가 도시락 밥통에 간장을 붓는 작전을 짰다. 당하고만 사는 우리가 하늘도 안쓰러웠는지, 그날 담임이 집안 사정으로 결근했고, 체육 시간에는 자유 피구 대회가 열렸다. 존재감 없던 우리는 그 소란스러운 틈을 타 조용히 교실로 숨어 들어가, 소윤혜 무리 도시락에 간장을 들이부었다. 드디어 점심시간! 우리는 숨을 죽이며 소윤혜 무리의 동태를 살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평소보다 맛있다며 밥을 허겁지겁 먹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아침에 냉장고에서 꺼내온 간장은 허여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달래 양념간장이었던 것이다. 같이 청소하는 동료가 귀한 도토리가루를 준다기에, 전날 쑨 도토리묵이랑 먹으려고 달래까지 찹찹 다져서 만든 귀한 양념간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간장테러 작전은 보기 좋게 실패했고, 내 덕에 양념간장 비빔밥에 맛을 들인 소윤혜는 자신의 소울 푸드는 간장비빔밥이라며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다.

“푸하하하, 그날 너 어머님한테 엄청 맞아서, 우리 집에 피신 해온 거 기억나!”

“진짜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았지.”

그런데 그날 밤, 진짜로 폭우가 내렸다. 경순이 할머니 품에 안겨 울고 있는 나를 데리러 온 아빠가 슈퍼 앞에 앉아서 하드 하나 쥐어주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비는 쏟아지고, 울음은 안 멈추고, 아빠가 사준 아까운 빵파레는 손에서 녹아 흐르고.

“아버님이 왜 그랬냐고 안 물어보셨어?”

“응, 그냥.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던 것 같아. 무슨 일이 있는 거는 같은데. 물어보지는 못하고, 들어봤자 힘이 되어주지 못할까 봐. 그런 자신이 미워지면, 그나마 버티고 있는 힘마저 사라질까 봐, 그냥 옆에 가만히 있어줬어. 가끔씩 손바닥에 흐르는 아이스크림만 조용히 닦아줬던 것 같아. ‘그만 울어’라는 말도 안 했어. 그냥, 옆에서 조용히 있어줬어. 아마, 속으로 울고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부모님 나이가 지금 나보다 어렸어.”

“아버님 멋있다. 우리 아빠도 살아있었으면, 좋은 아빠였을 거야. 할머니 아들이니까, 착했을 거야.”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어릴 때, 돌아가셨다는 부친을 이야기하는 경순이 눈이 반짝거렸다. 집을 나간 엄마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이기적인 호기심은 밑바닥에 묻어버렸다. 언젠가 모친에 대해 말해주면 최대한 덤덤하게 들어줘야지, 다짐해본다. 우엉차가 든 컵을 휘휘 돌리는 경순에게 다가가, 불룩한 배를 만졌다.

“발로 찰 때 알려줄게. 그때도 만져봐. 신기해.”

“나 너를 질투했나봐.”

“에잉, 날 질투할게 뭐가 있어?”

“네 배에는 애가 들었는데, 내 배에는 혹이 들어서?”

“뭐어?”

“그동안 존심 상해서 말 안 했는데. 나 요즘 임산부들만 보면 질투가 난다. 이래봬도, 아기 좋아한다.”

저놈의 울보 계집애 또 울려고 그런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경순이에 대한 특징을 하나 발견했다. 저 아이는 자신에 대한 썰을 풀 때는 냉정하리만큼 덤덤하고, 남 일에는 아무것도 아닌데도 울어버린다. 왜 그러는 거지? 경순이의 심리가 궁금해진다. 오은영 박사님을 불러야 하나?

“경순아, 우리 언제 동창회 나가볼까?”

경순이 눈이 띠용, 한다.

“나 안 창피해?”

“너는 나 안창피해?”

“당연히 안창피하지! 현조는 자랑스럽지!”

“그래! 그년들 얼마나 잘나가는지 함 보자.”

“내 친구 박현조는 건물주다!”

“내 친구 이경순은 인스타 나온 맛 집 사장이다!”

동시에 우하하, 술 먹은 아저씨들처럼 얼큰하게 웃어 재꼈다.

“내일부터는 식당일 조금씩 익혀볼까? 너 몸 풀러 들어가면, 문 닫을 수도 없고.”

이경순, 마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시청하는 우리네 어머님들 표정이다.

“야! 야! 울지 마! 만날 쓸데없이 울어. 근데 말이야.”

경순이 눈물 들어가라고, 또 화제를 돌린다.

“담임이 5학년 끝나고 전근 갔거든? 근데 전민영이 같이 가자고 그러는 거야?”

“전민영? 아 교수아들?”

“또 같은 반 되었거든.”

“윤혜도?”

“다행히 걔는 아니고.”

“어쨌든 5학년 담임 전근 간 학교로 인사 가자는데, 나 따라갔다?”

“왜?”

“나도 무리에 낄 수 있을 줄 알았지. 근데, 같이 가자 해놓고, 지들끼리 멀찌감치 앞서 걷더라? 어쨌든 그 서 씨 진짜 악마인 게, 애들이 찾아갔잖아? 거들떠도 안 보더라? 이젠 니들 담임 아니다 이거지.”

“전민영, 소윤혜도?”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경순이를 향해, 그것 참 쌤통이지? 동조를 구하는 표정으로 조용히 끄덕였다.

“담임 그년은 진짜 나쁜 여자고, 소윤혜는 꼴좋았지.”

남 말을 엿듣는 새도 쥐도 없는데, 경순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라? 이 장면은? 허여사가 남 얘기할 때 하는 그 모션인데? 역시 모전여전이구만....... 꼭 닮기 싫은 건 그렇게 똑 닮아진다.

“웃겨, 전민영 걔는 왜 같이 가자고 해놓고, 따돌려?”

“그나마 전민영이 좀 챙겨줬지.”

“그래? 맞아 그래도 전민영이 점잖기는 했어. 근데 현조야. 나는 5학년을 끝으로 학교를 못가서 그러는데, 선생님들은 다 그래?”

“에잉 아니지, 나 중학교 때, 이화영 선생님이라고 계셨거든? 그 쌤은 진짜 천사셨어.”

“이화여대를 나오셔서, 이름이 이화영이신가?”

“어억! 너 어떻게 알았어? 진짜 쌤 이화여대 나오셨어. 영문과, 영어선생님이셨는데, 특별활동으로 팝송 반을 하셨지. 영어 싫고 노래 싫었는데, 화영쌤 따라서, 팝송 반 들었지.”

내 인생에 서 씨 같은 나쁜 선생님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화영 선생님, 아현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이셨다. 안경 너머로 보이던 동그랗게 쌍까풀 진 눈과, 경상도 사투리가 살짝 섞인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참 듣기 좋았던 기억이 난다. 점심시간이면 혹시 도시락을 못 싸온 아이는 없는지부터 살펴보시던 그런 분이었다. 그런 선생님에게 날라리 애들은 스승의 날에 밀가루 공격을 했지만, 화도 못 내시던 착하고 측은했던 이화영 선생님. 화영 쌤에 대한 추억 하나 꺼내 보자면, 음악실로 이동하는 수업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왔는데, 책상 서랍 끝에 숨겨둔 학원비가 사라진 것이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울고불고했고. 4교시가 끝나고 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러 하얀 봉투에 든 현금을 주시면서.

“현조야, 돈을 훔쳐간 친구가 교무실로 와서 주고 갔어. 현조가 그 친구 용서해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있겠니?”

나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선생님이 주시는 봉투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냥 받았다. 엄마가 준 봉투는 누런색에 구겨지고 헌 지폐가 들어 있었는데, 선생님이 주신 건, 하얀 은행봉투에 아주 빳빳한 신권이 들어 있었다.

“어머! 그럼 선생님이 본인 돈 주신 거네?”

“응 그런 것 같어. 그때는 몰랐지.”

경순이는, 서 씨 마녀가 장악했던 5학년이 학창시절에 끝 기억이다. 안타깝다. 경순이가 남해를 가지 않고, 할머니와 원효로에서 그냥저냥 평범하게 살다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다녔다면.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경순아, 아기 낳고 다시 공부 해볼래? 검정고시도 있고. 너 공부 잘 할 것 같은데.”

“현조야. 5학년 때 칠판 앞에서 서씨한테 뺨따귀 맞는 멤버 중에 나도 있었어.”

“아....... 맞다. 그랬지?”

우리는 또 동시에 와하하하, 웃어버렸다. 경순이는 배가 땅기는지 아랫배를 쥐어 잡고 악악, 거리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우리의 파안대소를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면, 저곳은 책방인가, 귀곡 산장인가, 의심할지도 모르겠다.

“야야 그러다 애 놀란다.”

힘들어하며 배를 잡는 경순이를 말리면서, 웃음을 삼켰다.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계속 저렇게 웃다가는 애가 지금이라도 까꿍, 하고 튀어 나올 것 같았다. 책방에서 애를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산파 노릇까지는 거부한다.

“경순아. 임신하면, 뭐 막 먹고 싶고 그런다며? 신거 먹고 싶고 안 그래?”

남아있는 웃음기를 가다듬으며, 경순이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다. 이내, 보리차라고 답했다.

“차가운 보리차, 델몬트 주스 유리병 생각나?”

“그 시절 어머님들의 주전자였지.”

“그 주스 병에 담긴 보리차가 그렇게 마시고 싶어. 할머니가 꼭 주스 병에 보리차를 담아놨거든. 근데 주스를 마셔 본 기억은 없어.”

“인터넷에 주스 병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88올림픽 열쇠고리도 팔더라. 우리 집에도 찾아보면 호돌이 그려진 티스푼 있을 거야. 경순아 갑자기, 오렌지 주스가 마시고 싶은데?”

“사러가자.”

우리는 편의점을 가기 위해 책방을 나와 밤길을 걸었다. 밤공기 속에는 어렴풋한 봄기운 어린 흙내음이 배어 있었다. 알싸한 꽃향기도 나는 것 같고.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간, 가로등 불빛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고즈넉한 길은 이상할 만큼 평안했다. 가로등 불빛은 안개처럼 번져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는 것만 같았다. 달빛에 잠긴 가로수 아래, 한 박자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아무 말 없이 걸어도 편했다.

“경순아 봄 되면, 밤마다 산책하자. 봄밤에는 유난히 공기가 달콤하거든.”

“여름밤에도 걷자.”

“에잇! 사계절 내내 밤마다 걷자!

시간이 지나면, 어떤 건 사진처럼 장면만 남기도 하고, 어떤 건 향기만 또렷하게 남아 맨가슴을 아릿하게 만든다. 경순이와 걸은 오늘의 이 길은 공기, 온도, 습도까지도 고스란히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간절히 남기고 싶었다.

“2020년도 3월 30일 새벽 한시 반. 기억해.”

고요한 밤, 불쑥 스마트 알림처럼 날짜와 시간을 외치자, 경순이가 빙긋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약속해, 가끔 서로가 미워지면, 오늘 밤을 생각하면서 용서해주기로.”

경순이는 무슨 말인지 다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분 좋게 봄밤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현조야, 아무도 없는 밤에 걸으니까 꼭 그때 같다. 우리 어릴 때, 사이렌 같은 거 울리면, 그 자리에서 걸음 멈추거나, 어디 들어가서 얼음! 했어야 했잖아.”

“아 민방위훈련?”

“응 그거! 나 그때, 똥마려워서 집에 급하게 가는데, 하필이면 사이렌 걸려서, 어떤 상가 들어가서 막 다리 비비 꼬고 그랬어. 기억나?”

“어우 기억하다마다. 근데 사람들은 민방위훈련 참 싫어했는데, 나는 좋았어.”

“왜?”

“그냥, 세상이 잠시 멈췄잖아. 쌩쌩 달리던 차도 멈추고,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도 멈추고, 시끄러운 세상도 조용해지고. 그럴 때 이상하게 자유를 느꼈어.”

“역시 비범해. 우리 아기가 현조 닮으면 좋겠어.”

“에엥? 말도 안 되는! 절대 나 닮으면 안 되지!”

“아 왜? 아기야~ 현조 닮아라!”

달 밝은 밤, 우리는 춤을 추듯 옥신각신하며 거리를 걸었다. 편의점을 지나쳤지만, 누구 하나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낄낄대다가 소곤대다가 까르륵 넘어갔다.

“가을 할머니 보면, 할머니 생각나서 안 슬퍼?”

“할머니 생각나서 좋아. 그런데 쥐를 보면 슬퍼져.”

“애액! 그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야?”

“남해 친척집에서 일해줄 때 창고에서 살았다고 했잖아. 그때 창고를 꾸민다고 벽에 그림도 그려 붙이고 그랬거든? 할머니랑 있는 동안은 좀 살만하게 꾸미고 싶었거든. 어느 날 자다가 눈을 떴는데 할머니는 벌써 생선 말리러 덕장 가고 없는데. 코앞에서 쥐가 새끼를 낳고 있더라? 내 눈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말이야.”

나는 마치 바로 앞에 쥐라도 있는 듯 몸서리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땅에 비친 박현조의 그림자는 과장된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 일 인극을 열연으로 펼치고 있었다. 경순이는 말을 하다 말고, 내 그림자를 가리키며 배를 잡고 웃었다.

“미안미안, 그래서 어떻게 됐어?”

별안간 아랫배를 감싸 쥔 경순이가 짧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허리를 숙였다. 나는 다급히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문이 닫혀 어둑한 애린슈퍼 앞으로 부축해 평상 위에 앉히며 괜찮으냐고, 물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경순이는 잠시 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놀라 비명도 못 지르고 속옷 바람으로 도망쳤거든? 그런데 살면서 문득문득 생각이 나. 그 어미 쥐의 눈빛이 말이야. 어떻게든 새끼를 지키겠다는 그 결연한 눈빛이. 어떻게든 새끼를 보호하겠다는 그 의지가 담긴 눈길이. 그래서 할머니한테 쥐가 새끼를 났으니 죽여 달라는 말을 못 했어.”

카디건 위에 내가 준 패딩 조끼까지 겹쳐 입은 경순이는 별로 춥지도 않은데 자꾸만 손을 떨었다.

“나는 쥐..”

“뭐라고?”

경순이의 그림자는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그림자를 한동안 응시하다가, 다시 물었다.

“아까 뭐라고 했어?”

“나는....... 쥐보다도 못하다고.......”




# 8화의 작은 조각

[2022년 3월 8일 화요일]

문득문득. 아니 자주. 후회를 한다. 달무리가 하늘 가득 퍼지던 그 밤. 얇은 너의 몸을 안고서 네 가슴에 고인 바닷물이 넘쳐흐를 때까지 끌어안지 못한걸. 너와의 여름방학이 계속될 줄 알았던 열두 살 그때처럼 너와의 이상한 동거가 영원할 줄만 알았으니까. 이토록 사무치게 아프리라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안아주고 또 안아주고. 새겨듣고 또 새겨듣고. 위로하고 또 위로할 것을. 눈물 많은 너를. 남의 일에는 작은 것에도 통곡을 하는 너를. 자신의 고단함 앞에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너를 위해 펑펑 울어 줄 것을. 미치게 후회할 날이 올걸, 알았더라면, 눈 자욱이 짓무를 만큼 울어줄 것을. 이토록 휘청 일 만큼 그리울 줄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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