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바다를 품고 사는 경순이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버텨내고 있는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다 나의 얕디 얇은 호기심이 참으로 못돼먹었다는 생각에 먼데를 바라보면서 마른 손을 만지작거렸다. 책장 끝에 삐딱하게 걸쳐있는 자명종 시계를 보니 어느새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경순이도 나도 누구 하나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올라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현조는 결혼 생각 없어?"
경순이가 물었다.
"뭐.. 굳이?"
망설임 없는 대답에 경순이가 숨을 쉬는 것처럼 조용히 웃었다. 고요한 이 밤, 그녀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헌 책들 사이사이 은하수처럼 흘러 다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고리타분한 옛일을 끄집어냈다. 오롯이 감성 돋는 이 밤의 분위기 하나 때문에. 아마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이불킥을 하며 후회할 말들이지만.
"살면서 딱 한번 사랑을 해봤어. 결혼을 한다면 그 사람이랑 하고 싶었지."
"언제였어?"
"보자.. 지금이 2020년이니까. 이십 대 초반이 2003년? 서른 중반까지가 2015년 정도... 와아 그 새끼랑 십 년 넘게 만났네.."
"예뻤겠네? 사랑을 하던 문현조는. 한번 보고 싶다."
"예쁘기는.. 찌질하고 치열하기만 했는데."
씁쓸하게 웃으며 식어가는 난로를 응시했다.
"거의 십 년을 바라봤어. 뭐 싸운 적도 많았고. 같이 본 영화도 많았고. 가 본 식당도 많고. 나눈 대화도 많고. 그래서 그 애 옆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았어.. 그런데 서 있더라 다른 사람이. 카톡 프로필 사진 보고 알았어. 하얀 드레스를 입은 낯선 여자 옆에 서 있는 그 애를.."
"그냥 뒀어? 결혼식장을 뒤집어놨어야지! 어떻게 그래?"
"그러게.. 점점 연락이 안 돼서 바빠 그런가 했지. 그렇게 다른 사람 옆에 서 있는 줄은 몰랐지."
목언저리까지 단풍잎처럼 붉게 물든경순이를 마주 보던 나는 뜬금없이 풋, 하고 웃어버렸다. 그러나파안대소하기에는 그녀의 눈이 슬퍼 보여서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간신히 웃음보를막았다. 그런 내 표정이 우스웠는지, 경순이는 울다가 웃었다. 나는 또 그 모양이 우스꽝스러워 배를 잡고 나무바닥에 주저앉아 낄낄거렸다. 곧이어 경순이도 깔깔거리면서 내려앉았다. 우리는 취한 사람처럼 한참 폭소를 터뜨렸다. 어릴 때도 별일 아닌 거에 먹던 주스를 뿜고, 오줌을 지릴 만큼 웃었던 기억이 올라와서. 경순이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컥컥거렸다. 열두 살, 그때처럼 경순이와 나는 바닥을 뒹굴고 땅을 치면서 이러다 죽겠구나 싶을 만큼 웃었다. 간신히 잔웃음을 털어내면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책방에 문을 걸어 잠갔다. 그동안 경순이는 화목난로에 불을 지피고 라면물을 올렸다.
"세 개 끓여?"
"엥? 세 개나? 이 밤에?"
"허어 이경순 님 왜 이러실까? 뱃속 아기는 입 아니냐? 가슴속에 복실이도 먹어야 하고."
가볍게 면박을 주는 나를 경순이는 따뜻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경순아 근데 너 은조라는 이름. 서류상에도 이은조로 된 거야?"
"아니? 호적에는 이경순이지."
"뭐야! 그럼 개명이 아니잖아!"
"다방에서 그렇게 불렀는데?"
나는 황당한 눈으로 경순이를 바라보다가, 이래야 이경순이지 싶어 치켜뜬 눈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미니 냉장고에서 김치통을 꺼내면서 넌지시 물었다.
"경순아.. 복실이 가슴에 넣고는 어떻게 살았어?"
"응.. 부산으로 가서 다방에서 일했어. 십 년은 했을 걸? 그때 두 번째 사랑을 만났지."
"지금 애 아빠?"
"아니? 내 두 번째 사랑은 다방손님이었어. 그 사람 일하는 공사장으로 매일 배달을 갔거든. 그러다 눈이 맞은 거지. 그 사람이랑 살고 싶어서 사장님 몰래 속초로 도망쳤어. 바다가 보이는 작은 집을 얻었어. 우리는 눈만 마주쳐도 숨이 넘어가게 웃었어. 우리는 서로를 웃게 해 줬어. 너무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었는데. 피부는 엄청 까맣고 어릴 때부터 공사장에서 일을 해서 지문도 없는 그런 남자. 뭐 지금쯤 우리 할머니 만나서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있을 거야. 더 이상 무거운 짐도 안 들고. 힘들게 막노동도 안 하고.. 그렇게 두 번째 사랑을 떠나보냈어."
경순이는 또 아픈 말들을 숨 쉬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뱉어놓는다. 늘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건 내 몫이다. 이럴 땐 어떤 말을 해주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
"그렇게 내 두 번째 사랑을 보내고. 속초를 떠나지 않고 횟집에서 일을 했는데, 지금 뱃속에 있는 애기 아빠를 만났어. 일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카스 건네주던 다정한 사람이야."
"다정한 사람인데. 왜 사라진 거야.."
"사라진 거 아니야. 지금쯤 부모님 설득하고 있을 거야. 반드시 만날 거야. 만나면 지으려고 아기 태명도 안 지었는데... 현조가 지어주라!"
"내가?"
"응!"
"흠.. 한번 생각해 볼게."
경순이는 난로 위에서 바글바글 거품을 뿜어대는 냄비 물에 라면을 넣으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프를 넣자 뜨거운 물은 화르르 성질을 내며 더 끓어올랐다. 곧 구수하고 매큼한 향기가 책방 가득 퍼졌다. 그다지 배도 고프지 않은데 혀 밑으로 침이 고였다.
"현조는 그 남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응.."
"나쁜 놈! 천벌 받을 거야!"
"그러지도 않더라. 잘 먹고 잘살더라."
"어째 알아?"
"페이스북에서 훔쳐봤지. 좀 못살기를 바랐는데, 아들 낳고 잘 먹고 잘살더라. 와이프는 또 기가 막히게 잘 골랐더라고. 여우 같은 게."
"현조 다시 사랑하자. 더 좋은 사람 만나서."
"뭐.. 그놈 결혼하고 엄청 선을 보긴 했었지."
"정말? 어땠어?"
"첫 소개팅남은 만나기 전날, 열한 시 넘어서 전화를 하더라고. 대뜸 술 마시냐고 묻더라? 그래서 적당히 마신다 했지? 지는 술 못 마시는 여자는 싫다는 거야. 예의 없고 재수 없지만, 그래도 비위를 맞췄어. 그때는 어떻게든 누구라도 만나서 복수하듯 결혼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잘 보이려고 절절맸지. 어우 아직도 열받네? 어쨌든 다음날 소개남을 만났어. 보자마자, 술집으로 데려가더라? 모텔골목 있는 술집으로! 그 독한 소주를 빈속에 들이부었어. 잘 보이고 싶어서."
"으윽! 미친놈!"
"근데, 또 지는 잘 안 마시더라? 그러다가 술집에서 틀어놓은 티브이 화면을 가리키더니, 어? 우리 학굔데? 제가 서울대 나왔거든요! 으스대는 거야. 그래서 아 그러냐고. 머리가 좋으신가 봐요. 칭찬했지? 조금 있다가 술 한잔 따라주면서 뭐라는 줄 아냐?"
"뭐라고?"
경순이가 붉어진 눈시울을 손등으로 비비더니 얼굴을 내 쪽으로 바짝 붙이면서 물었다.
"원나잇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만나면 속궁합부터 확인하거든요? 저랑 가치관이 맞는지 알고 싶네요."
"미 미친놈이네.. 서울대 미친놈이네?"
"그런데 그 미친놈한테 나 까였어. 애프터 왔으면 억지로라도 만났을 거야. 그때는 복수의 혈안이어서 제정신아니었거든. 어떤 남자라도 상관없었으니까. 나도 카톡에 웨딩사진 올려야 했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첫 소개팅은 시원하게 까였고. 두 번째 소개팅이었어. 친척언니가 해준 거였는데. 자기 동창이라고 정말 착하다고 해서 만났거든? 걔는 또 더 가관이더라.."
두 번째 소개팅 남은 첫 번째 소개남과는 다른 분위기여서 조금 기대를 걸었다. 택시를 타고 한참을 찾아 들어가야 하는 외곽, 한식당에서 접선했다. 찾아오기 힘든 곳에 약속장소를 잡아서 미안하다는 소개남은 외모는 못났어도 사람은 착해 보였다. 애석하게도 그 착함은 얼마못가 와장창 깨져버렸지만. 갑자기 키득키득 혼자 웃던 두 번째 소개남이 얇은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못 들은 척,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그러나 두 번째 소개남은 집요하게 자위도구로 원위치했다. 집에 갈 때까지 여성의 자위가 어떻고 주둥이를 나불거렸다.
"뭐? 뭐? 뭐 그런 변태새끼가 다 있어?"
"그런데 더 웃긴 건, 뭔 줄 알아?"
경순이가 창백한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변태한테 나 까였어. 진짜 비위가 상하는 거 참고서 내가 먼저 애프터 비슷하게 문자 보냈어. 돌아온 답장이, 네 편히 쉬세요."
“감히?”
"응 감히. 나보다 못생긴 게."
"똥차들 갔으니까. 새 차 올 거야!"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떠는 경순이를 보며 생각했다. 똥차 가면 새 차가 아니고. 똥차 가면 쓰레기 차, 쓰레기 차 가면 폐차가 온다고. 여기서 더 나이가 들면 고물 자전거도 만나기 힘들다고. 똥차들에게 차이는 나는 폐차 수준도 안 되는 모양이라고. 이 말은 경순에게 하지 않았다. 분명 너 문현조는 외제차,것도 최고급 승용차라고! 이래 말할 것이 뻔하니까.
"누굴 탓해. 내가 못나 그렇지. 이렇게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소개팅은 끝이 났습니다."
"할머니가 그랬어. 살면서 자책은 말라고. 남 탓도 말고. 내 탓도 말라고. 고민 있어도 잘 자고. 아파도 잘 먹고. 생각 없이 그저 허허 웃으라고. 그러다 보면 주니 나고 쓰디쓴 세상이 좀 살만해지지 않겠냐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겼지만, 난로에 따뜻한 불도 헌책방의 조명과 간판도. 우리의 움직임과 대화도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활활 타올랐다.
"가을이 할머니, 자주 오시라 하고. 도망가지 마시라 해."
"현조 불편하잖아.."
“아니야... 너 거는 다 이해할 거야!"
"뭐?"
경순이가 휘둥그레 눈을 크게 뜬다. 놔두면 눈물샘 폭발 할 것이 분명하다. 나는 급하게 말을 돌렸다.
"그런데 나비 왔나?"
"응 집으로 들어가는 거 봤어."
"나비 걔. 괜히 은혜 갚는다고. 쥐새끼 같은 거 물어오지 말라 해라!"
"응 매일 밥 주면서 당부한다고! 쥐 물어오는 날, 너는 쫓겨난다고."
"알아듣디?"
"그럼 얼마나 영특한데.."
고단함도 없이 밤에 취한 우리는 라면을 국물까지 싹싹 비워내고 원두물을 내리고 우엉티백을 찻잔에 우렸다.
"그런데 가을 할머니 보면, 할머니 생각나서 안 슬퍼?”
“응 안 슬퍼, 할머니 생각나서 좋아. 나 웬만하면 잘 안 슬퍼해. 우리 첫아기는 가슴에 있고. 둘째는 배에 있으니까. 그런데 쥐를 보면 슬퍼져.”
“애액! 그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야?”
“남해 친척집에서 일해줄 때 창고에서 살았다고 했잖아. 그때 창고를 꾸민다고 벽에 그림도 그려 붙이고 그랬거든? 할머니랑 있는 동안은 좀 살만하게 꾸미고 싶었거든. 어느 날 자다가 눈을 떴는데 할머니는 벌써 생선 말리러 덕장 가고 없는데. 코앞에서 쥐가 새끼를 낳고 있더라? 내 눈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말이야."
"으윽!"
나는 바로 앞에 쥐가 있기라도 한 듯이 몸서리를 쳤다.
"비명도 못 지르고 속옷바람으로 도망쳤거든? 그런데 살면서 문득문득 생각이 나. 그 어미 쥐의 눈빛이 말이야. 어떻게든 새끼를 지키겠다는 그 결연한 눈빛이. 어떻게든 새끼를 보호하겠다는 그 의지가 담긴 눈길이. 그래서 할머니한테 쥐가 새끼를 났으니 죽여달라는 말을 못 했어.."
나는 먹먹해지는 가슴을 쓸어내고 또 쓸어내면서,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따뜻한 우엉차를 마시면서 뜨거운 난로 앞에 앉아 있는 경순이는 춥지도 않은데 자꾸만 손을 떨었다.
"그래서 쥐만 보면 슬퍼져.. 나는 쥐보다 못한 엄마라서..."
2021년.
문득문득. 아니 자주. 후회를 한다. 달무리가 하늘 가득 퍼지던 그 밤. 얇은 너의 몸을 안고서 네 가슴에 고인 바닷물이 넘쳐흐를 때까지 끌어안지 못한걸. 너와의 여름방학이 계속될 줄 알았던 열두 살, 그때처럼너와의 이상한 동거가 영원할 줄만 알았으니까. 이토록 사무치게 아프리라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안아주고 또 안아주고. 새겨듣고 또 새겨듣고. 위로하고 또 위로할 것을. 눈물 많은 너를. 남의 일에는 작은 것에도 통곡을 하는 너를.자신의 고단함 앞에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너를 위해 펑펑 울어 줄 것을. 미치게 후회할 날이 올걸알았더라면, 눈자욱이 짓무를 만큼 울어줄 것을. 이토록 휘청일 만큼 그리울 줄 알았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