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배꼽 한 뼘 아래, 골반을 중심으로 22센티 선이 그어졌다. 열두 살에는 담임선생의 차별로 인해, 보이지 않는 등급도장이 이마에 찍힌 것만 같더니, 서른일곱에는 자궁과 이별한 자리에 붉은 선이 낙인처럼 남은 것이다. 수술자국은, 사랑받지 못해 생긴 결핍 같다. 사랑이 이루어져서 남들처럼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다면, 내 몸에 22센티의 낙인은 남지 않았겠지. 아랫배는 텅 비어졌다. 폐경여성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갱년기와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세상이 회색빛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회색으로 물들려던 찰나에, 경순이 배를 가르고 구원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 지혜롭고 따뜻한 아이 지온.
배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고. 붉은 장미가 만개하는 싱그러운 계절에 여름아기가 태어났다. 아기의 이름은 지온이다. 나는 경순이가 산후조리원에 있는 동안, 이층 살림집은 아기를 위한 맞춤형 대공사에 들어갔다. 수술 받고 받은 보험금을 몽땅 쏟아 부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낡은 방충망은 전부 걷어내고, 초미세먼지까지 걸러주는 고급 방충망으로 화장실 쪽 작은 창까지 싹 교체했다. 그렇게 안방은 말 그대로 ‘아가 방’으로 대변신! 노란색 친환경 도배지에 따사로운 커튼, 아기 침대까지 모두 오가닉이다. 경순이 뜯어 말렸지만, 지온이를 향한 나의 열정은 선풍기 앞에서도 식을 줄 몰랐다. 부모님이 상주로 내려가신 뒤, 방치돼 있던 옥상 화단은 가을 할머니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했다. 상추, 깻잎, 방울토마토, 고추, 가지, 애호박, 오이, 블루베리까지. 옥상 한편에 심긴 채소와 과일 덕분에, 밀면 위에 오르는 고명의 직판장이자, 비밀의 정원 부럽지 않은 옥상 공원이 되었다. 일층에서 올려다보면 초록 모자를 쓴 것처럼 풍성해진 옥상은 흡족함을 넘어 대만족이다. 요즘은 밀면 가게에 자리가 없으면, 책방이 아닌 옥상으로 올라가라고 손님들에게 안내한다. 가을 할머니와 허여사의 아이디어로, 옥상에는 파라솔이 달린 테이블과 평상을 놓아 손님을 받고 있다. 옥탑 방은 오래된 물건들을 싹 정리한 뒤, 두 개의 방과 주방 딸린 마루에 좌식 테이블을 들여놓았다. 이제는 식당에 자리가 있어도 손님들은 밀면 한 그릇씩 쟁반에 들고 자연스럽게 옥상으로 향한다. 루프 탑 카페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한강 전망이 기가 막히기 때문이다. 옥상 자리가 부족해 일층으로 내려 보내는 일도 번번이 일어난다. 식사를 마친 손님들은 식당에 그릇을 반납한 뒤, 자연스럽게 헌책방으로 발길을 옮긴다. 커피를 타 마시고, 조용히 책을 읽다 간다. 어릴 적 봤던 만화책을 발견하고 사 가는 이도 있고, 커피와 책만 보고 가는 게 미안하다며 레몬사탕이 든 유리병에 돈을 두고 가는 이도 있다. 이렇게 헌책방과 밀면 가게는 자연스럽게 공조 운영을 하게 되었다.
“현조 양, 손님들이 옥상 정원을 참 좋아하죠?”
“그러게요, 다 가을 할머니 덕분이죠.”
옥탑 정원의 창시자이자, 나비의 새끼 중에서 한 마리를 입양한 가을할머니가 흙이 묻은 손으로 우아하게 입을 가리며 웃는다. 마치 유럽 어딘가, 전원이 아름다운 저택을 가진 마담처럼 보인다. 나비는 새끼를 세 마리 낳았는데, 한 마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한 마리는 가을 할머니가, 또 한 마리는 단골손님 중 한 분이 데려갔다. 밀 면을 먹으러 왔다가 헌책방에 단골손님이 된 남자분인데, 군대에서 갓 제대한 사회 초년생으로 아직까지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순박한 청년이다.
“저 진짜 고양이 키우고 싶어요. 제가 데려가면 안 될까요? 우리 누룽지 무지개다리 보내고, 정말 힘들어서 다신 안 키우려고 했는데, 누룽지랑 너무 닮아서요. 아무래도 누룽지가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누룽지가 나비새끼로 환생했다는 증거는?”
“저만 보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웃어요.”
“불합격!”
“아아 잠시 만요!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혼자 살아요?”
“아니요, 친형이랑 같이 살아요.”
“형 직업은?”
“웹툰 작가요. 매일 집에 있습니다.”
“그럼 집에 햇볕이 잘 들어오나요?”
“커튼 쳐야 할 정도에요. 그리고 아직 누룽지 물건이 그대로 있어서요. 백숙이 살기에는 최적입니다.”
“백숙이는 누구?”
“나비 새끼 이름이요. 미리 지어놨어요. 누룽지 백숙할 때, 백숙으로요.”
“불 합 격.”
“아........ 왜요.......”
나비 새끼의 입양에 굉장히 신중했던 내가 청년을 끝내 허락한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만화책 취향 때문이었다.
“인생 만화책은?”
“천재 유 교수의 생활!”
“합격!”
웃는 모습이 순박한 청년의 집은 우리 건물과도 가까워서 백숙이를 종종 가게에 데리고 오지만, 나비는 백숙이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물론 백숙이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그녀들을 쿨한 모녀라 부르고 있다. 어쨌든 백숙이는 마포에 사는 두 남자에게 무한한 애정을 받으며 행복한 묘생을 보내는 중이다.
“봄이 키우기 안 힘드세요?”
“아이구~ 전혀요. 고녀석 애교에 살 맛 나요. 집에 생명이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몰라요.”
“이젠 가을봄할머니라 부르겠습니다.”
“그럴까요? 오호호호.”
“봄이 아프거나 동물 병원 갈일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가을봄 할머니가 여름 햇살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온이도 옥탑 정원 좋아하죠?”
“그럼요, 엄청 좋아하죠.”
지온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이면, 옥상 정원을 체험학습장으로 활용할 생각이다. 문제는 내가 식물계의 마이너스 손이라는 것. 내 손만 닿았다 하면 식물들이 시름시름 앓다 결국 죽어버린다. 다행히 가을 할머니가 옥탑 정원의 책임자라,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아파트에 사는 할머니는 평소엔 화초 정도만 키워봤기에, 잎채소나 과일나무를 제대로 길러보는 게 오래된 소원이었단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가. 옥탑 식물들은 내 손 안 타서 좋고, 할머니는 꿈을 이뤄서 좋고.
“할머니 안 계셨으면 어쩔 뻔했어요. 아마 옥탑은 정글이 되거나, 사막이 되거나 둘 중 하나였겠죠?”
성인 얼굴만 한 호박잎을 솎아내는 가을 할머니를 도우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나야말로 두 사람 안 만났으면, 우울증에 걸리거나, 상심으로 아파 누웠거나 둘 중 하나였겠죠?”
“그럼 우리 셋은 운명인걸로!”
“그래요! 하늘이 정해준 운명인 걸로!”
전문가용 가위로 호박 넝쿨을 싹둑싹둑 정리하는 가을 할머니께, 존경의 눈빛으로 따봉! 한 방을 날린다. 수고비도 손사래 치시니, 이런 서비스라도 해드려야지!
“경순이가 젖이 안 나와서 분유 먹이는데 잘 안 맞나 봐요 변색이 안 좋아요. 맘 카페 보니까 무슨 독일 분유가 좋다는데. 그걸 먹여야겠어요.”
“극성대모야! 극성대모!”
상추, 깻잎을 잔뜩 따놓은 바구니에 호박잎 몇 장을 얹으면서 이마에 줄줄 흐르는 땀을 훔쳤다.
“현조 양, 경순이도 그렇고. 둘 다 수술하고, 애 낳은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몸 좀 잘 챙겨요. 저번 보니까, 애 안고 다니던데. 그냥 유모차에 태우고.”
흐르는 땀방울이 눈 안으로 들어와 따끔하지만,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그런 채로 아기 엎는 것이 박현조의 로망이라고 말했다. 가을할머니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살짝 올리면서 별 로망이 다 있네, 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기 때 말이에요. 제가 너무 울보라서, 엄마가 늘 엎고 다녔거든요?”
서울 중랑구 묵동이라는 작은 마을에는 울보로 소문난 아기가 살고 있었다. 밤낮 없이 우는 통에, 어린 엄마는 늘 아기를 등에 업고, 얇은 카디건을 머리끝까지 씌운 채 부족한 잠을 재우려 동네를 돌곤 했다. 어느 날, 아기는 카디건 구멍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모래알로 변해서 엄마 등에 박히는 것을 보았단다. 노란 햇살이 작은 조약돌처럼 박히다가 모래처럼 흩어지는 것이 신기해서 엄마 등을 콕콕 찔러 햇살을 잡으려 했단다. 엄마 등에 박힌 모래햇살을 콕, 찍으면. 반짝이는 모래알이 작은 손톱 위로 옮겨가는 것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더군다나 모래햇살을 찌를 때마다 엄마가 몸까지 흔들며 노래를 불러주니 놀이기구라도 탄 것 같았겠지. 아기는 성인이 되어서도, 기억하고 있단다. 엄마의 등과 카디건 안에서 부서지던 모래햇살과 자장가를. 그 안에서 아기는 안전했고. 어른이 되어 세상살이가 무서워지면, 그때 모아놓은 기억으로 안전함을 느낀다고 한다. 이 스토리는 박현조의 실화가 되시겠다.
“지온이가 따뜻한 추억이 많은 어른이 되면 좋겠어요. 그래서 많이 업어 주려고요.”
“어머나! 현조 양은 그게 기억이 나? 엄마 등에 업힐 때면 꽤 어렸을 건데.”
“이상하게 기억이 나더라고요.”
“신기하네, 혹시 현조 양, 천재인가?”
가을 할머니를 향해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렇지만, 진짜 그때가 기억난다. 엄마 등에 박힌 모래 햇살이. 지금도 허 여사 등만 보면, 콕콕 찌르고 싶다. 몇 번 그러다가 한 대 얻어맞기는 했다만, 그래도 엄마 등에는 왠지 모래 햇살이 있을 것 만 같고. 그런 생각이 들면 찌르고 싶어진다.
“지온이 다 커도 대모 등 콕콕 찌르게 할 거예요.”
여름 바람이 풀잎을 스치며 노래 한 구절 남기고 간다. 사르륵, 사르륵. 옥상은 푸르게 빛나고, 이층에는 사랑스러운 아기가 있고. 일층에는 재정을 책임져주는 경순이의 밀면 식당과 돈은 안 돼도 이웃의 요새가 되어주는 헌책방이 있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나는 꿈을 다 이룬 것 같다. 헌책방은 여전히 적자지만, 밀면 가게가 기꺼이 돈을 벌어다 주니 내 작은 헌 책방은 조급함 없이, 마음 편히 이어갈 수 있다. 한때 ‘뿌리서점’에서 위로를 받았듯, 이곳도 누군가에게 잠시 몸을 숨길 수 있는 피난처이자, 또 다른 길로 나아갈 작은 희망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이제, 그 바람대로 이곳이 그렇게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 그러니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
“너무 더워요. 적당히 따고 이층 내려가요. 경순이가 수정과 만들었는데 맛있어요.”
“호박잎은 8월 가기 전에 따야 해. 아니면 질겨 못 먹어. 현조양이나 어서 내려가, 쉬어요. 수술한데 덧날라.”
“그럼 조금만 하고 내려오세요. 저 먼저 갈게요. 지온이 목욕시켜야 해서요.”
“그려~ 극성대모님! 아 맞다! 예영이는 저녁 장사에 나와?”
“그 지지배, 나오다 안 나오다 그랬어요. 경순이가 애 먹어요. 다른 알바 구하라고 해도. 예영이만 붙들고 저런다니까요?”
“그래? 그럼 내가 저녁에도 나와야 하나? 봄이 때문에 저녁에는 집에 일찍 들어가긴 해야 하는데 이걸 어쩌나...”
“아니에요, 그 계집애 마음 다 잡는데요, 또 말없이 안 나오면, 그땐 해고라고 말했어요.”
김예영은 이촌동 확성기 1인자 반찬가게 사장의 외동딸이다. 대학을 졸업한 지 꽤 되었지만 아직까지 백수로 지내고 있다. 반찬가게 사장님이 경순이에게 부탁해 밀면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풀타임으로 일했지만 힘들다며 지금은 저녁 시간만 나온다. 게다가 어떤 날은 말없이 결근하기도 한다.
“예영이 엄마도 참, 애 많이 먹겠어.”
“정신 차리려면 한참이에요, 지가 나처럼 몸이 아프길 해, 아니면 대학을 못나왔어. 제 엄마 고생하는 것도 모르고 철없기는.”
남 흉보다 보니까, 좀 찔린다. 나 박현조, 마흔 가까이 들어갔다 나온 회사만 여섯 군데가 넘고, 부모님이 물려주신 건어물 가게도 몰래 헌책방으로 바꿔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진 않잖아? 부모님 건어물 가게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내 꿈을 펼치고, 하나는 밥벌이를 채워주고 있으니까. 건어물 보다 경순이 밀 면이 더 잘 팔리는구만.
“그래! 박현조의 전략은 성공적이야!”
“뭘 그렇게 혼자 떠들어?”
가을 할머니가 솎아낸 호박넝쿨을 돌돌 감으면서, 물었다. 민망함에 배시시 웃어보였다.
“경순이가 저녁장사 끝내고 삼겹살 파티한데요.”
“그래? 옥탑에서 할 거지?”
“그럼요, 예영이 붙들고 애기 좀 한데요.”
“쌈 채소는 넘쳐나고, 고기만 사오면 되겠네? 내 얼른 가서.”
“이미 예약 걸어놨죠, 윤기 아줌마가 갖다 준 데요.”
“윤기 엄마도 오나?”
“가지러 간다는데, 굳이 온다는 거 보면 슬쩍 한 자리 차지하겠죠?”
“윤기네 오면, 예영이 엄마도 오고, 부동산 처자도 오겠네.”
“아우! 이제 삼겹살 파티 할 때는 어디 다른 정육점 가서 사 올까 봐요.”
“그러다 큰일 나지, 고기 냄새 풍기는데 윤기네서 안사가면 한 소리 하지.”
“동네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면 이런 게 불편해요.”
“득과 실이 있지. 어여 내려가, 지온이 목욕 시킨다며.”
“할머니도 빨리 하고 내려오세요!”
“아! 현조 양! 아직은 애기 엎고 다니지 말어. 애기 다리 휘어!”
“넵!”
지온이를 떠올리니, 방실방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터질 것 같은 웃음보 단단히 붙들고, 나의 공주님을 향해 가볼까? 가슴이 두근두근 하다.
“우리 공주님, 지금 맘마 먹고 계시려나? 아니면 꿈나라로 여행가셨나?”
아기 단잠에 방해가 될까 싶어 도어록 비밀번호도 조심조심 누른다. 기계 소리 안 들리게 할 수 없나? 이것도 바꿔야겠다.
“현조야! 땀 좀 봐! 수술하고 그렇게 무리하면 못써.”
주방에서 젖병을 닦고 있는 경순이가 땀이 범벅이 되어 들어오는 나를 보며 미간을 좁힌다. 꽤 언짢은 목소리다.
“많이 움직이랬어! 운동이야 운동!”
“어우, 선풍기 앞으로 어서 가! 에어콘 좀 틀던지.”
“지온이는?”
“일어났어. 목욕물 받으려고.”
“아니! 내가 받을게. 온도계로 체크해야지!”
공중에서 살랑 살랑 돌아가는 나비 모빌을 보며 꼼지락거리는 지온이를 향해, 광대 짓을 하는 나를 한참 바라보던 경순이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다. 결국은 지도 웃을 거면서. 내 광대 짓은 지온이보다 경순이가 더 좋아한다.
“현조야, 가게 내려갈게. 저녁장사 준비.”
“김예영 왔어?”
“응 벌써 와서, 나비 밥도 챙겨주던데?”
“웬일이래?”
경순이가 피식 웃는다.
“결혼이 하고 싶은가 봐.”
띠옹, 신경선 하나가 피아노 줄처럼 튕겨져 나온다.
“스물 셋 인데?”
“나이차가 좀 나나봐.”
“얼마나? 돈은 많데? 남자는 뭐한데?”
“그 얘기를 오늘 하려고. 이따 삼겹살 파티 하면서.”
“예영이 엄마 온데?”
“응. 언니들 다 오겠지 뭐.”
“야! 예영 엄마 불판 앞에 앉히지 말어라.”
“왜?”
“예영이 다칠까 봐, 아니면 둘 다 다치던지.”
푸하하하하, 또 별말 아닌 거에 고개까지 쳐들며 웃는 이경순이다. 저러다 허리 나갈까봐 걱정이다. 몸 푼 지 오십 일도 안 돼서 식당 일이라니, 만류해 봤지만 억척스러운 그녀, 이렇게 말한다.
“면은 기계가 뽑아주고, 설거지는 네가 사준 식세기가 해주고, 서빙은 손님들이 알아서 가져다 먹고, 이젠 계산도 기계가 알아서 해주는데? 내가 손이 갈게 없어. 예영이도 있고.”
돈 들여서 키오스크랑 식기세척기 들여놓은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볼 때마다 뿌듯하다. 예전엔 손님들 계산해주는 것도 일이었는데, 지금은 그 수고 하나 덜었다. 키오스크 안 들였으면, 산수도 못 하는데 애 업고 계산대 지켰을 판이다.
“나비, 외출 하고 돌아왔나?”
“응, 자꾸 식당으로 들어오려고 해서, 책방에 들여놓고 문닫아놨는데, 자고 있을 거야.”
우리 집 계단 밑에 사는 나비도 나와 같은 수술을 얼마 전에 받았다.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안쓰러워 책방으로 거주지를 옮겨 주었다. 외출 고양이라, 나가고 싶으면 문 앞에서 야옹, 거린다. 그때는 문을 열어주면 된다. 마음껏 쏘다니다가, 배고프면 들어온다.
“나비 참 신기한 게, 비만 오면 구석에 숨더라?”
서두르는 경순이를 붙들고 날씨를 육감으로 간파하는 나비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궁금했다. 어떻게 비가 오기 전에 알아채는지, 생각해보니 나비가 구석으로 숨을 때, 경순이는 옥상에 빨래 거두러 간다. 둘 다 길거리출신이라, 육감이 발달한 건가?
“비 오면 수제비지.......”
경순이가 신을 꿰어 신으면서 중얼거린다.
“삼겹살 먹고, 후식으로 끓여 먹자.”
“안 돼!”
경순이가 고개를 젓는다. 얼마 전, 엄마가 경순이와 나를 한약방에 데려가 보약 한 채씩 지어줬는데, 약발 떨어지는 음식은 피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피하라는 음식에 당당히 맞서 먹는데 경순이는 순한 양처럼 종이에 적어놓고 음식을 가린다. 왜냐 물었더니, 엄마의 성의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겠다며 이런 말도 덧 붙였다.
“현조 집에 들어와서, 천지로 누리고 있어. 엄마가 한약을 챙겨주시는 게 눈물 나게 감사한일이잖아.”
어쨌든 경순이는 허 여사에게 하루 한번 꼬박 전화를 드리며, 내 일거수일투족도 고하고. 밥은 드셨는지, 땡볕에 오래 나가시면 안 된다느니. 딸도 안하는 안부를 챙긴다. 하긴 진짜 딸은 그런 거, 안한다. 흥!
“어쨌든 현조야, 지온이 자꾸 안지 말어. 안고 싶으면 앉아서 안어. 몇 년은 무거운 거 금지야.”
“너나 몸 좀 사려! 애 낳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우리 할머니는 아빠 낳자마자, 밭 매러 나갔데.”
무슨 고릿적 얘기를 하시는지, 요즘 젊은 엄마들이 들으면, 난리 날 소리를 한다.
“삼겹살 파티 끝나고 오랜만에 밤 산책 가자.”
“좋지, 밤 산책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경순이가 손가락으로 오케이 표시를 하며 나간 뒤, 목욕물이 담긴 아기 욕조를 낑낑대며 마루로 옮겼다.
“쪼니, 물놀이 할까? 하! 하! 하!”
아기가 좋아하는 너털웃음을 만들며 배를 내밀자, 지온이는 숨이 넘어가도록 까르륵, 웃는다. 귀여운 두 볼이 통통하게 올라오자 내 심장은 흉골을 뚫고 해처럼 솟아난다. 아기가 나를 향해 손을 뻗어 안아 달라 보챌 때마다, 내 가슴은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 같은 봉선화가 되어버린다. 나의 여름 아기를 위해서라면, 온 몸이 펑 하고, 터져도 괜찮다오. 분홍 꽃물 흩뿌리며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오.
“우쭈쭈 마이 엔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렸다. 혹여 내 호들갑에 지온이가 놀랄까 봐, 삐져나오는 탄성을 주먹으로 막았다. 겨우 참아낸 흥분은 뼛속까지 간질인다.
“지온이~ 사랑받기 위해~태어난 아기~”
소문난 음치 목청으로 흥얼거리며, 유투브에서 배운 대로 아기 목욕을 시작했다.
1번. 한 손으로 목을 받치고 깨끗한 거즈 준비.
2번. 눈→코→볼→입 주위→귀 바깥쪽 순으로
3번 기저귀 닿는 부위, 항문 주변 깨끗이
4번. 감기에 걸릴지 모르니 되도록 빨리 끝낸다.
암기한 순서대로 진행이 잘 되지 않는다. 사실, 아기 목욕을 혼자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늘 허 여사나 경순이가 곁에 있었는데, 누군가 옆에 있을 때와 없을 때는 확실히 다르다.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때처럼 긴장된다.
“나는 대모다! 하 하 하!”
까르륵, 지온이가 신이 나 버둥거린다. 앗, 목욕할 땐 웃기면 안 되는 거였지. 웃다가 소변이라도 보면, 목욕물을 다시 갈아야 하니까. 하지만 천사 같은 여름 아기는 ‘하하하’ 웃음소리를 한 번 더 해 달라, 앵콜 싸인을 보낸다. 에라이, 모르겠다.
“하 하 하!”
“까르르르르, 끼아악!”
오십 일이 채 안 된 아기라고 얕보면 안 된다. 힘이 얼마나 센지, 웃으며 발을 버둥거리는 순간 목욕물 절반이 안방으로 튀었다. 허 여사 있었으면, 등짝 스매싱감이다. 그렇지만, 그 덕에 여름 아기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등짝이 땀으로 흠뻑 젖어도. 청소를 다시 해야 해도. 행복하고 또 행복하다. 흥분한 아기를 진정시키고, 젖은 천으로 얼굴을 닦으려는데, 조금 전까지 참방참방 물장난 치며 웃던, 지온이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예쁘다.”
불현 듯 물속에서 졸고 있는 아기가 왜 이렇게 짠하고 안쓰러운지, 가슴이 미어진다. 느닷없이 눈물이 흘렀다. 출산은 경순이가 했는데, 옥시토신은 내 몸에서 분비가 되나 보다. 가끔은 예영이가 생리할 때, 없는 자궁이 아플 때도 있다. 여자의 몸은 참으로 신비하기 짝이 없다. 나는 요즘 여름아기를 가슴으로 낳고 나서 바보처럼 울거나, 광대처럼 웃거나, 꼭 그 둘 중 하나는 하고야 만다.
“너를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어! 맹세!”
작고 어여쁜 나의 지온이. 지혜롭고 따뜻한 천사. 정말이다.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것이다. 다만 너의 친부가 나타나지 않기를 밤마다 기도하는 나를 용서해 주겠니. 만약에 친부가 나타나 너와 경순이를 데리고 떠나버린다면 견딜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안 하던 기도를 하고 안 가던 교회를 가고 있다.
“하나님 제발 지온이 친부가 나타나지 않게 해 주세요. 경순이와 지온이가 평생 내 옆에 있게 해 주세요. 제발 이 기도만은 들어주세요! 다른 건 한 개도 안 들어 주셨잖아요! 만약 지온이와 경순이를 내 몸에서 떼어간다면, 나는 반드시 기필코 죽어버릴 겁니다!”
허 여사가 내 기도를 들었다면,
“이 미친것아, 어디 하나님 아버지 앞에 협박을 하고 있어!”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어서 회개하라고 난리를 치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 기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집착이라고 흉을 봐도 상관없다. 흐르는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순면 타월로 머리까지 감싸 안은 아기를 이불 위에 눕혔다. 엉덩이에 분을 바르고 마사지를 해주는데. 창가에 스며든 햇살이 목욕물에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물결이 찰랑일 때마다, 천장으로 반사된 빛이 반짝거렸다. 자연이 만든 모빌 아닌가. 아름다워서 또 눈물이 나온다.
“예쁘다 진짜 예쁘다.......”
여름 아기가 깨어날 때까지, 목욕물 버리지 말아야지. 일부러 목욕물을 흔들어 천장에 별빛이 더 반짝이게 해야지. 그러면 나의 아기가 까르르 웃겠지? 방안 가득 은하수가 흐르면 지온이가 웃고. 나는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리겠지. 배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어지고, 담장 너머 여름장미가 한가득 피어난 계절에 태어난 아기는 자면서도 배냇짓을 하며 웃는다. 배꽃처럼 예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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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옥탑 정원에 모인 확성기 삼총사 중 2짱과 3짱, 가을 할머니, 그리고 우리는 그 재밌다는 싸움을 바로 코앞에서 관전했다. 예영이는 당장 내일 결혼하겠다고 소리를 질렀고, 예영 엄마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외치며, 키워준 돈을 내 놓으라 울부짖다가 앞에 있던 상추 바구니를 집어던졌다. 예영 엄마를 불판 앞에 앉히지 말라했던 내 예언을 떠올린 경순이는 나를 향해 쌍따봉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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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뒤, 장마가 한풀 꺾이고 매미가 지져지게 울어대는 한낮에, 밀면 집과 헌책방 앞으로 청첩장이 새처럼 날아들었다. 예영이는 결국 그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 그런데 신랑 될 사람과 예영이 엄마의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는단다. 신랑은 은행원인데, 버는 족족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생활비를 보내야 하는 형편이라 예영이도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예영이는 밀면 집의 풀타임 정직원이 되었고, 예영이 엄마는 한 동네에 셋방을 얻은 예영이와 남처럼 지낸다. 확성기 삼총사는 예영이 엄마가 빠지면서 이인조로 활동 중이다. 삼총사가 왜 와해되었느냐고 경순에게 물으니,
“부동산 언니랑, 정육점 언니가 예영이 엄마 뒤에 있는 줄 모르고, 흉을 봤데.”
네 그럴 줄 알았다. 그 아줌씨들 한명 없으면, 없는 사람 껌처럼 씹어대는 걸 내가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어쨌든 동네는 확성기 하나가 줄어들어, 한동안 조용했다. 며칠 뒤 동네 한복판에서 예영 엄마랑 정육점 윤기 엄마가 머리채를 붙들고 싸우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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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덥던 여름이 한 풀 꺾이자, 선선한 가을이 찾아왔다. 그래도 한낮의 햇살은 아직 여름 기운을 품고 있어서 유모차 덮개는 반쯤만 내렸다. 모기장이 드리워진 유모차를 밀며 고수부지로 향했다. 물론 유모차 안엔 우리 지온이가 타고 있고, 그 옆에는 도시락과 돗자리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경순이가 있다. 우리는 추석 연휴에 가게 문을 닫고, 가까운 한강으로 소풍을 나왔다. 원래는 상주에 내려갈 예정이었지만, 허 여사가 애기 먼 길에 병난다고, 서울에 있으라고 했다.
“하늘 엄청 예쁘다. 구름 한 점 없는 저 푸르름. 하늘을 하늘색으로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게 원통하다. 뭔가 더 칭찬해주고 싶은데, 나의 한계야.”
“경순아, 너 검정고시 준비 해봐.”
“에잉 다 늙어서 무슨....”
“야! 울 엄마는 예순둘에 영어도 배우고, 서예도 배우는데?”
“어머님이야....... 기본 가닥이 있으시니까. 나는 지금으로 만족할래. 여기서 하나 더 욕심낸다면, 현조 좋은 짝 만나서 가정 이루는 거 보는 게.”
허 여사 레파토리, 요즘은 경순이가 대신 한다. 나는 앞서 걷는 경순이 말을 막으며, 그동안 세운 계획을 발표했다.
“밀면 가게만큼은 아니어도, 돈을 벌겠어. 온라인 헌책방을 열겠어!”
“돈이 모자라? 내가 더 낼까?”
“아니! 충분해! 나 지온이 앞으로 청약 들 거야! 나중에 지온이 시집보낼 때 아파트 하나는 해줘야 할 거 아냐. 너는 평생 나랑 산다 해도, 지온이는 시집보내야지.”
경순이는 양손을 휘저으며 뒷걸음쳤고, 나는 유모차를 밀며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비처럼 결의에 찬 얼굴을 했다.
“나도 이젠 대모야! 책임감을 가져야지, 우리 지온이 시집갈 때까지 열심히 키워보자! 알았지?”
“현조야......”
“아! 왜! 또 이상한 소리 하려면 그만 둬.”
“너도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가정 이루어야지. 너 자꾸......”
“옥탑 방을 서가로 꾸민 건 진짜 대박 아이디어야.”
나는 경순이의 잔소리가 더 길어지기 전에, 서둘러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어제 옥탑에 맞선 보러 온 남녀 봤어?”
“응, 진짜 예뻤어.”
옥탑 방에 책장을 맞춰서 헌책방에 쌓이다 못해 처치 곤란인 책들을 진열해서 서가처럼 꾸며 놓았는데, 몇몇 손님들이 옆 건물 카페에서 커피 한잔씩 사들고 와, 책을 보고 사진을 찍다가, 기념으로 한권씩 사들고 가기 시작했다. 원래 주말엔 쉬었지만, 옥탑서가 때문에 주일에도 헌책방만 문을 열게 되었다. 근처 교회 청년들은 예배를 마치고 옥탑 서가에서 몇 시간씩 놀다 가고, 데이트하러 오는 커플들도 하나둘 늘고 있다.
“덕분에 커피공방 사장님도 매출이 늘었데.”
“잘됐네, 책방에서 믹스커피 주는 것이 내 로망이긴 했다만, 다 같이 먹고 살아야지.”
“그르게, 내가 미처 그 생각을 못했어. 확성기 언니들도 커피 공방에 커피 마시러 잘 안 갔데.”
“어쩐지, 커피 공방 사장님 마주칠 때마다 표정이 안 좋으셨어. 믹스커피 치우길 잘했다.”
“지금은 괜찮으시지?”
“그럼~ 평일엔 직장인들이 밀면 먹고, 커피 마시러 가지. 주말엔 또 젊은 사람들이 커피 사들고 우리 책방 오고. 덕분에 고맙다고, 지온이 옷 사주신 거 아니겠니?”
“언제 이웃상인들 모셔서 밀면 한 그릇 대접해야지, 너 수술하고 나도 지온이 낳고 그러느라, 정신없었어.”
“확성기 삼총사는 그만 좀 먹여.”
“이젠 확성기 이 총사.”
“아직? 화해안했어?”
“응, 반찬사장님 예영이 얼굴도 안보는 데 뭐.”
“에이긍, 근데 예영이 신랑은 사람 괜찮아?”
“응 괜찮아, 서글서글하고. 성실하고. 일단 예영이를 사랑해주니까.”
“나는 별로....”
“왜?”
“저번에 버스정류장 있는 골목에서 담배 피우더라고. 짜증나, 담배냄새 때문에, 지온이 호흡기 상하면 어쩌라고.”
“에이~ 버스정류장 골목이면, 우리 집에서 한참인데? 그 정도는 봐주자.”
“아니 요즘 자꾸 담배냄새가 올라오는 거 같아 그래. 그래서 그런지, 요즘 꿈자리도 사나워”
“왜? 또 자순이가 비둘기 귀신 되서 쫓아 다녀?”
“그건 아니고. 너랑 지온이가 날아가 버리는 꿈 꿔.”
“뭐어~?”
그런 악몽을 꾼다. 선녀 옷을 입은 경순이가 지온이를 안고서 하늘로 떠올라, 저 멀리 아주 멀리, 날아가 버리는 꿈.
“무슨 그런 꿈을 꾸지?”
“암튼 집에 있을 때 담배냄새 안 나?”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경순에게 재차 물었다.
“잘 모르겠는데.”
경순이는 송아지 같은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하지만 불굴의 대모, 박현조는 포기하지 않는다. 담배 냄새가 올라온다는 걸 증명하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다.
“아니이이~ 건널목 건물 짓는다고 공사하잖아. 거기 인부 아저씨들이 쉬는 시간에 담배 피우더라고! 그게 우리 집까지 올라오는 것 같아. 명절 지나면 가서 한마디 할 거야! 우리 쪼니 몸상하면 어쩔 건데?”
“냄새난다 싶으면 창문 닫으면 되지.”
“매번 어떻게 그래. 그리고 너는 잘 맡지도 못하잖아. 나 없을 때 담배냄새 들어와서, 쪼니 호흡기 망가지면 어쩔 거냐고! 가서 진짜 한마디 할 거야!”
별안간 경순이가 걸음을 멈췄다. 이내 시선을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한강의 윤슬로 옮기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뭐해? 가자. 자리 뺏기겠다.”
재촉하자, 경순이가 늦은 걸음으로 따라왔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물결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 사이로 잠자리가 한가로이 유영하다가, 살포시 내려앉는다. 그 모습을 보며 나와 지온이는 웃었고, 경순이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현조야. 내가 살면서 사랑을 딱 세 번 했거든? 그런데 돌이켜보면, 정말 이게 사랑이구나... 했던 사람은 그 사람이었던 것 같아.”
아련한 눈빛으로 강물을 바라보는 경순이가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다방에서 일할 때 만났다던 아저씨, 내가 말한 적 있지? 공사장에서 일했었다는. 아저씨.”
“응, 부산으로 같이 도망가서 살다가 죽었다는 남자.”
“그 사람은 고아원에서 자랐데. 나이가 차서 원에서 나오고 막노동판을 돌아다녔다는 거야.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하다 보니까 익숙해졌데. 그리고 처음 배운 일이라 그런지 공사판에서 돈을 버는 게 마음 편했다는 거야. 그 사람이 담배를 피웠거든? 뭐 내 앞에서 피지는 않았고. 공사장에서 일하다 피운 거겠지? 어느 날 내가 그랬어. 아저씨 담배 몸에 안 좋데요. 일찍 죽으면 나 혼자되잖아요. 그랬더니 아저씨가 막 웃더라?”
경순이는 잠깐 말을 멈추고 옅은 한숨을 깊이 내뱉으면서 호수처럼 맑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어느 날, 도시락을 싸서 아저씨가 일하는 공사장에 갔어. 점심시간이라 시꺼먼 땀에 얼룩진 인부들이 삼삼오오 흙바닥에 앉아 빵을 먹고, 집에서 싸 온 차가운 도시락을 꺼내거나 라면을 호호 불어 먹고 있었어. 아저씨는 어디 있나 한참을 두리번거렸는데, 구석에서 담배 피우는 무리 사이에 끼어 앉아 있더라. 말없이, 부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어.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피식 웃으며 다가갔는데, 인부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왈칵 눈물이 터지고 말았어.”
“담배를 피우는데 인상을 구겨야지. 왜 울어? 화를 못 내서 운거야?”
온화하게 미소 짓는 경순이가 내 볼을 톡 건들면서 말을 이었다.
“담배 한 개비 손에 쥐고 공중으로 연기를 날리고 있는데. 모든 시름을 연기 속에 털어버리는 행복한 얼굴들인 거야. 고작 담배 한 개비에 가난함을 잊어버리는 그 소박함이..... 나는 슬펐어.”
경순이는 등을 지고 강물을 응시했다. 나는 경순이가 돌아보기 전까지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마 울고 있을 것이다. 바보 같은 이경순. 지는 더 가난하면서. 지는 더 고단하면서. 지는 더 외로우면서. 천치맹꽁이 경순이는 항상 남을 위해 울어준다. 경순이의 작은 등을 보면서 묻고 싶었다. 왜 너는 한 번도 너를 위해 울지 않는지. 왜 너의 슬픔을 이야기할 때는 웃으면서 말하는지. 어떤 단어와 어떤 문장을 조합해서 질문을 던질지 고민하고 있을 때. 경순이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현조야 그래서 나는 아저씨한테 공사장에서 쉴 때는 담배 피우라고 했어.”
덜떨어지고 바보 같은 이경순은 그렇게 담배를 이해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