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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주양 Nov 07. 2024

18. 깨어진 유리병

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드르륵, 탁.


문 닫히는 소리에 설핏 들었던 잠에서 깨어버렸다. 시계를 보니 오전 여덟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옅은 숨을 몰아쉬면서 조그마한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 계속 선잠을 잔다. 꿈도 너무 많이 꾸고. 일어나 있으면 졸렵고, 누우면 잠이 오질 않는다. 베갯잇에 코를 박고 깊게 들이마쉬다가 꿀꺽 삼킨다. 손수 만든 작고 노란 아기의 베개. 딸랑이도 이불도 목욕가운도 직접 만들었지만 베개를 만들 때 제일 심혈을 기울였다. 목화씨에 붙어있는 솜을 하나하나 분리해 구름처럼 뭉친 후, 부드러운 헝겊으로 감싸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바느질하여 인견천으로 호청을 만들어 씌웠다.


귀여운 숨으로 새근새근 잠에 들던 아기가 배던 베개. 향기가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 내일이면 완전히 사라지겠지. 어쩌면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기가 떠난 지 265일이 지났는데, 어찌 체취가 남아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맡을 수 있다. 내일이 되고 또 내일이 되면 지온이의 향기는 다시 살아나 코로 눈으로 심장으로 파고들것이다. 아마도 그리움이 향기가 되었는가 보다. 그리움이 사라지지 않는 한, 지온이의 체취도 여전할 것이다. 가만히 엎드려 생각했다. 베개를 만들고 남은 씨앗을 어찌했는지.. 맞아, 옥상화단에 심었었지. 7월 하순 과일나무가 열매를 맺고 여름 장미가 피어날 때. 노란색 분홍색 하얀색으로 피어날 목화꽃을 한 살 생일에 보여주려 심었었지.. 씨앗을 화단에 심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이따금씩 담벼락이 높은 그 집 앞을 찾아가곤 한다. 짙은 푸른색 대문을 가만히 응시하기도. 이층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기도 한다. 그런 도둑방문은 지온이가 떠나고 일주일 뒤 시작되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고. 아기가 태어난 계절이 일년 만에 돌아왔음에도. 우연은 단 한 번도 지온이를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기도했다. 제발 단 한 번만 아기를 보여달라고. 그런데 그렇게 매정하던 우연은 어제 나에게 작은 틈을 내어주었다. 오늘도 공을 쳤네, 돌아서려던 그때. 은색 승용차가 그 집 앞에 멈추더니 양복을 입은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었고. 풋낯의 그녀가 나의 지온이를 품에 안고 내렸다. 드라마 주인공은 그녀라는 듯, 뭉근한 햇살이 여자에게 조명처럼 내려앉았다. 그녀는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고 다정하게 아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의 아기. 나의 천사.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 나를 웃게도 울게도 만드는 심장의 주인. 나의 지온이가 그녀를 바라보며 낭창낭창한 음성으로 엄마,라고 불렀다.


동시에 내 심장은 아래로 쿵 떨어졌다. 기묘한 감정이 정신과 육체를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흔들리는 하체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자는 지온이가 좋아하는 하하하, 너털웃음을 흉내 냈고. 지온이는 까르륵 웃었다.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은 높은 담벼락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땅꺼미가 질 때까지 무릎을 세우고 멍하게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이제는 정말 이별이구나, 같은 말을 중얼대면서. 그렇게 지온이와 두 번째 이별을 하고 돌아와 경순에게 덤덤하게 말했다. 지온이가 그 여자에게 엄마,라고 불렀다고. 정말 사랑받고 있다고. 얼굴에서 사랑이 보인다고. 자신 있는 눈빛과 그늘 없는 표정이 받고 있는 사랑을 증명한다고. 그런데 왜 이리 마음이 헛헛한지 모르겠다고.


"다행이네... 매일 기도했는데... 백일동안의 기억은 다 잊게 해 달라고."


경순이는 샌드위치 속재료를 만들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너는 지온이가 우릴 다 잊었으면 좋겠어?"


경순이는 무표정으로 주억거렸다. 나는 경순이와 반대다. 지온이가 나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고. 기억해줬으면 싶다. 그리고 지온이가 조금이라도 불행해 보이면 훔쳐 올 생각이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허나,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젠 그 여자와 지온이는 모녀사이가 되었다는 걸. 둘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걸.


"현조야 이젠 안방 치우자.."


지온이 방으로 꾸며놓았던 안방은 그대로다. 아기가 떠나고 무엇하나 건들지 않았다. 이불에 토한 자국까지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경순이도 나도 안방문을 열지 않는다. 안방문을 열면 지온이가 방긋 웃으며 작은 손과 발로 장난을 치고 누워있을 것 같아서. 우리는 바람은 다르지만 마음은 같을 것이다. 달이 뜨는 밤이면 가슴을 치는 소리가 경순이 방에서 들렸고. 나는 벽에 기대어 안방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현조야.. 이젠 안방 치우자고.."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치울 수가 없다. 그때까지는 열병에 난 사람처럼 이마가 뜨겁고 눈시울이 따갑고 턱끝이 떨릴 것이다. 지온이가 남기곤 간 백일의 흔적은 밤이고 낮이고 상관없이 나락 같은 슬픔에 빠지게 할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안방문을 열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흘러 아기의 토한 자국, 옷가지들을 만지며 그저 그런 호젓함만 느끼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그때까지 충분히 아프고 싶다. 나의 상실을 애도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현조야.."


방문 앞에 달아놓은 커튼을 젖히고 경순이가 화사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아기 베개에 묻었던 얼굴을 들면서 물었다.


"어디 가? 주말마다 나가네.."


과한 볼터치와 핑크색 립스틱 그리고 한껏 멋을 낸 옷차림. 요즘 들어 경순이의 차림새와 모양새가 미심쩍다. 애를 둘이나 낳고도 봄처녀 같은 그녀가 탐탁지 않게 느껴지고, 이런 내 감정도 마뜩잖다. 나는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면서 들었던 얼굴을 다시 파묻었다.


"쉬는 날인데 집에서 뭐 해. 너는 나가자해도 안나 갈 거고. 그냥 바람이라도 쐬려고."


"바람 쐬는 것 치고는 너무 꾸몄는데?"


잠긴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뭘 꾸며..."


빈정대는 걸 칭찬으로 알아들은 이경순은 하얀색 린넨원피스 자락을 살포시 잡으며 수줍게 웃음을 내비쳤다. 문득,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면서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도둑고양이처럼 눈치를 살피는 이경순 꼴이 보기가 싫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등을 돌렸다.


"현조야.. 콩물 갈아놨어. 오이 채 썰어서 냉장실에 있어. 소면만 삶아서 말아먹으면 돼. 금방 올게."


곧이어, 쿵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엉금엉금 기어서 선풍기를 강으로 틀어 열나는 얼굴을 식히며 씩씩거렸다.


"어제도 열두 시 넘어 들어와서는. 또 아침 되자마자 나가? 미쳤네... 미쳤어.."


3월부터 맞은편 건물 일층 상가에서 공사를 하더니, 일본향취가 물씬 풍기는 초밥집이 생겼다. 서부이촌동을 휘어잡고 다니는 이경순은 때를 놓치지 않고 초밥집 사장과도 오빠동생 사이가 되었다. 종종 검은색 요리복을 입은 허여멀건하게 생긴 젊은 남자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러 왔는데. 초밥집 사장이냐 물었더니, 직원이라고 답했다. 경순이가 있을 때는 경순이만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커피를 마셨고. 경순이가 없을 때는 두리번거리다가 샌드위치 두 개와 커피 세 잔을 포장해 가던 젊은 남자. 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가을할머니도 눈치를 챌 정도다. 둘이 마주 서 있으면 옥시토신이 마구 뿜어지는 게 느껴진다.


"아악! 열받아!"


참지 못하고 표독스럽게 소리를 내질렀다. 목언저리까지 벌게져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방으로 나왔다. 냉장고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치지직, 뜨거운 주전자에 물을 붓는 소리가 들린다. 울화가 치밀어올라 발을 동동 굴리다가 싱크대에 발가락을 찧어 악,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웅크린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끙끙거렸다. 두 손으로 발을 감싼 채로 안방 쪽으로 구겨진 얼굴을 들었다. 찌르르 전기가 흐른다. 곧 숨통을 조이고 무언가가 울컥 쏟아지기 전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눈물을 털어버렸다.


"난 아직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엄마라는 년이.. 저럴 수가 있지? 제 멋대로 내 인생에 들어와서 슬픔만 떠 안기고. 지는 어린 남자랑 좋다고 시시덕거리는... 저 저.. 하아..."


하다 보면 더 한 말도 나올 것 같아서. 울분을 삭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끌고 계단을 내려와 1층 현관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비가 이틀째 보이지 않는다. 작년에 새끼를 낳으면서 바로 중성화 수술을 해줘서 발정기도 아닌데... 밤이면 돌아오던 녀석의 외출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참내.. 자식들은 남 주고, 아주 신바람들이 나셨네.."


잔뜩 눈살을 찌푸리면서 책방으로 몸을 돌렸다. 도어록을 열고 비번을 눌러 안으로 들어갔다. 한 여름에 덥고 습한 기운이 온몸에 덕지덕지 들러붙는 기분이다. 이경순처럼... 나는 급하게 에어컨을 틀고 혹여 나비가 들어올지 몰라 출입문을 반쯤 열어놓았다. 책방은 지온이의 흔적이 덜한 공간이라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 일인용 소파에 등을 깊게 대고 앉아 천장을 올려보았다. 차창으로 스며든 햇살이 천장으로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우리 아기 햇살모빌, 참 좋아했는데.. 그지?"


또 눈물이 난다. 단단히 고장이 났다. 어제 본 지온이는 많이 낯설었다. 지온이는 더 이상 나의 아기가 아니었다. 코를 훌쩍이면서 라디오를 틀었다.


"네 이번 곡은 노리플라이에 그대 걷던 길.."


디제이에 곡소개와 함께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가끔 시간이 멈추길 바라. 너의 생각에 잠기게 되면 한참을 걷잡을 수 없어 힘이 들어. 내 마음속 그 어딘가에 숨겨둔 아득했던 시간의 끝에. 우리 언젠가는 잊혀지겠지. 그대 걷던 길로 난 늘 같은 길로만 걷네.]   


가슴이 저며 온다. 곡을 쓴 사람은 그래도 같이 걷던 길을 혼자도 걸을 수 있나 보다. 나는 한치도 나아가지질 않는데. 감은 눈 위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경순이도 지온이도 모두 자기의 길을 걸어간다. 나만 홀로 남겨둔 채로. 어제부터 알 수 없이 올라오는 속상한 감정은 소외감이었나... 다들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데. 나는 계속 아프고. 못 걷겠고. 못 웃겠다. 나 혼자만 다른 기분이다. 이제는 아무도 나와 같이 울어주질 않는다.





"현조야! 현조야?"


누군가 어깨를 흔들며 이름을 부른다. 뻐근한 눈을 비비며 일어나니 경순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찾았어. 왜 여기서 자는 거야?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소파에서 등을 떼고 몸을 일으키면서 밖을 내다보니, 어스름이 내려앉은 캄캄한 밤이었다. 아득한 눈으로 차창밖을 내다보았다. 다르랑 다르랑 지온이의 코 고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다가 볕의 그림자처럼 잠시 비추다 이내 사라진다. 데스크 쪽으로 걸어가 스탠드를 켜는 경순이로 눈을 돌렸다.


"나 꿈을 꿨어.."


경순이가 말없이 나를 돌아본다.


"지온이를 낳는 꿈. 그래서 내가 키우는 꿈. 꿈은 절대 이루어지질 않지. 아니면 반대이던지.."


경순이는 데스크 안에서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어두워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책상 위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는 걸 보면서 덧붙여 말했다.


"집에서는 안방 쪽으로는 지나가지도 못하고. 한강도 못 나가. 왠 줄 알아? 지온이 생각나서. 나는 지온이가 아직도 미어지도록 아프고 사무쳐서 아무것도 못해."


"현조야.. 왜 그러는데... 왜.."


백지 같은 표정일 것이 분명한 이경순의 덤덤한 물음이 쓰라린 염장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았다.


"왜냐고? 왜냐고 물었니? 야! 내가 모를 줄 알아? 너 요즘 남자 만나지? 초밥집 아르바이트생! 그 핏덩이를 남자라고 만나고 다니냐?"


"왜 안되는데.. 나는 사랑을 하는 건데.."


"기가 찬다. 진짜.. 너는 남자 없으면 못 사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남들처럼 사랑하고. 사랑받고. 가정 이루고. 평범하게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왜 안 되는 건데?"


분노는 눈덩이 같다. 굴리면 굴릴수록 거대한 산사태를 일으킨다.


"너는 부끄럼도 없냐? 수치도 몰라?"


지온이를 보내고 265일 동안 참고 참았던 슬픔은 재난이 되었다.


"평범하게 살아?"


그리고 나의 교만은 생각보다 크고 위험했다.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팔아버린 년.. 혐오스러워.."


끝내, 내 손은 레몬사탕이 든 유리병을 집어 바닥으로 던지고 있었다. 쨍그랑,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노란 조각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른 손으로 얼굴을 가린 경순이를 남겨두고 책방을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으나 한강변 반대방향으로 무조건 뛰어갔다. 용문시장을 지나 효창공원을 넘어 마포로 건너갔다. 그리고 무작정 서현의 오피스텔 벨을 눌렀고. 서현의 음성이 들리자마자 울어버렸다. 그 뒤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서현이 꿀물을 건네줬고, 출근하는 서현을 따라 나와서는 마포역과 공덕역 사이를 어슬렁 거리고 있다. 조금씩 아침의 해가 강렬해지면서 후회는 밀려온다.


'어제 내가 왜 그랬지...'

'왜 그랬을까..'

'경순이 얼굴을 우째 보냐..하아..'

'어떻게 보긴... 뭐 한두 번 싸워?'


목 늘어난 티셔츠에 츄리닝 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군중들 사이에서 고뇌에 찬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모양새는 딱 봐도 정신 나간 아줌마 같다. 번듯한 차림새의 사람들 시선이 따갑다. 움츠린 어깨를 더 구부리고 공덕역과 마포역 사잇길로 종종걸음 쳤다. 효창공원역으로 넘어가는 언덕을 오르면서 어제 서현과의 대화를 곱씹었다.


"정신 차려! 지온이가 니 자식이야? 무슨 권한으로 판단인데? 아무리 아파도 경순 씨보다 아플까. 너는 지온이가 널 잊지 않았으면 하지? 경순 씨는 지온이가 다 잊고 행복하기만 했음 하고. 그게 엄마 마음이야.. 지온이 태어나고 하는 꼬라지가 딱 집착주순이었어. 문현조 잘 생각해 봐. 지금 너의 상태가 정상인지!"


"뭘 맨날 생각을 해보래?"


"이년아! 우리 내일모레 마흔이다. 자꾸 수준 없이 굴 거야? 섭섭해? 나는 그래도 죽어라 쓴소리 할 거야. 왜? 친구니까! 경순 씨 말이 뭐가 틀린데? 좋은 남자 만나서 버젓한 가정 이루고 싶다는데 뭐가 미친 소린데? 지온이 같이 키우자는 게 미친 사람인거지! 너 정말 지온이를 키우려고 했어? 너 죽고 싶냐? 너 자꾸 이래?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이를 거야!"


바른말만 하는 계집애 얄미운 이서현. 그렇지만 서현의 거친 조언 중에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경순이의 말도 다 맞다. 그런데 속상함이 헛헛함이 지독한 슬픔이 조금도 옅어지질 않는 걸 어떡하라고. 내 마음이 내 마음처럼 안 되는 걸 어쩌라고.


"그래 니들은 아주 이성적이라 조오켔다아~"


속으로 생각한 말이 크게 쏟아졌고. 놀란 얼굴로 걸음을 멈췄고. 그 상태로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언덕을 내려가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안도의 숨을 쉬면서 생각했다. 지온이를 향한 마음이 정말 집착인 걸까? 그렇다면 그 집착은 왜 생겼을까. 정답은 알고 있다. 결핍. 결핍. 결핍. 또한 감정을 비교할 순 없다만, 굳이 비교하자면 내 슬픔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면 털어버릴 수 있는 슬픔이고. 경순이의 슬픔은 털어도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슬픔이라는 걸. 그래서 마음껏 울지도 못하는 슬픔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하아..."


한숨을 폭폭 쉬면서 집 앞을 서성이고 있다. 도착한 지는 한참 되었는데, 선뜻 들어가질 못하고 어슬렁거리고 있다. 길 건너 성촌공원을 세 바퀴 정도 돌고, 음악에 맞춰 에어로빅을 하는 어르신들을 구경하다가, 트럭에서 파는 사과 한 봉지 사 들고 책방문을 밀었다. 삐걱... 소리와 함께 열려야 하는 문이 철컹! 소리를 내면서 굳게 닫혀있다. 문을 몇 번 밀었다 잡아당기면서 유리창 사이로 책방 안을 건너보았다. 책방 안은 경순이의 손길이 묻어있는 깨끗함이다. 어제 바닥으로 던져버린 유리병의 흔적도 없다. 오전 열 시, 경순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덟 시에는 책방문을 열고 가게 앞을 오른쪽 길부터 왼쪽 골목 끝까지 빗질하는 아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층 계단을 올라 살림집으로 들어갔다. 구수한 냉이된장국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식탁에는 땡땡이 밥상보가 올라와있다. 성큼성큼 걸어가 밥상보를 들춰보니 분홍 소시지 계란 부침과 오징어젓갈, 매실장아찌, 그리고 스테인리스 밥공기가 수저 한벌과 놓여 있었다.


"이경순! 밥뚜껑 안 열리게 또 밥을 눌러 담았어?"


식탁에 사과봉지를 올려놓고는 경순이방으로 걸어갔다. 유리로 된 미닫이문을 옆으로 밀면서 겸연쩍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밥 같이 먹..."


너무도 깨끗한 방. 순간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내려왔다. 화장대에 화장품들, 2년 동안 마련한 옷가지들은 그대로인데 이상하게 낯설고 공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옷장문을 열어 경순이의 낡은 에코백과 할머니의 지갑을 찾았다.


'없다....'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비틀거리며 마루로 나와 현관에서 아무 신발에 발을 구겨 넣었다. 때마침, 초인종이 딩동하고 울렸다.


"경순아!"


누구냐 물어보지도 않고 벌컥 문을 열었다.


"현조사장! 경순 씨 있어?"


문 앞에는 가을 할머니와 정육점, 초밥집, 반찬가게 사장님들이 난색 한 얼굴로 있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가을 할머니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가을 할머니는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그때 초밥집 사장이 송충이 같은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따지듯 물었다.


"경순 씨도 없죠?"


"네?"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그때 가을 할머니가 초밥집 사장을 밀면서 앞으로 다가왔다.


"경순이는 그런 애 아니에요! 경순이도 그 집 일하는 총각한테 돈 빌려준 걸로 알아요."


가을할머니는 초밥집 사장을 올려다보면서 쏘아붙이더니 내쪽으로 바짝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현조야. 경순이 있지?"


가을 할머니의 눈빛에는 염원과 애원이 담겨있었다. 나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이것 봐! 이것 봐! 년놈들이 같이 튀었네! 밤새 둘이 시시덕 붙더니만! 너무 친절한 사람은 이렇게 뒤통수친다니까? 경순 씨도 초밥가게 총각도 얼마나 살가웠어. 안 그래?"


"말 함부로 말아요! 경순이도 그 총각한테 돈 빌려줬다니까? 그리고 왜 여기서 따져요? 궁극적으로는 직원 관리 못한 초밥집 사장님이 잘못 아닌가요?"


가을할머니가 눈에 쌍심지를 켜면서 소매를 걷어붙였다.


"직원 속내까지 어떻게 압니까? 어머니가 위독하셔서 가불 해달라는 녀석 믿은 게 잘못입니까?"


"초밥집 사장은 그럼 합이 천 넘게 뜯긴 거네? 우진이네는 얼마 빌려줬어?"


길길이 날뛰던 반찬가게 윤기엄마가 정육점 사장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나야 초밥집 사장보다는 덜 하지.. 백만 원. 윤기네는?"


반찬가게 윤기 엄마는 모기만 한 소리로 삼십만 원이라고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옆에 있던 가을할머니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한 대 쥐어박을 듯 윤기엄마에게 달려들었다.


"경순이가 돈을 빌렸다는 건가요?"


나는 목소리에 간신히 힘을 주고 물었다.


"아니야! 경순이가 빌린 게 아니고. 초밥집 총각이 빌린 거야!"


가을할머니가 질색팔색하면서 허공에 양손을 휘저었다.


"어머! 할머니! 누가 보면 경순 씨가 딸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그럼! 내 딸이지!"


"그럼 그 사기꾼이랑 붙어먹고 도망친 년이 할머니 딸이니까, 내 돈 내놔요!"


"뭐야?"


가을할머니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이마에 핏대가 서서는 윤기엄마 멱살을 휘어잡았다. 옆에 있던 초밥집 사장은 두툼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면서 한숨을 몰아쉬었고. 정육점 사장님은 혀를 끌끌 차며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가을할머니 손에 붙잡혀 버둥거리는 반찬가게 사장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어제 던져버린 유리병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이윽고 귓가에서 삐이..... 이명이 울려 퍼졌고. 눈앞이 뿌예지더니 몸이 공중에 부웅 떠오르다가 현관 천장에 박힌 센서가 허연 달로 변해서 안면을 덮쳤다.





다음 날.


아침 일찍이 경찰서로 가서 실종신고를 내었는데. 시시티브이 장면 때문에 접수가 되질 않았다. 네모난 화면에는 처음 왔던 그 차림에 경순이가 임산부키링이 달린 에코백을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그리고 초밥집 직원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오토바이 핸들을 잡고 있었고. 그 뒤에 타는 경순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이경순씨 실종 아니네요."


고아처럼 몸을 떨고 있는 나에게 입매가 가지런한 경찰물어보았다.


"이경순 씨와는 무슨 관계신데요?"


"가족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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