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유리병의 에필로그
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우리 이모는 늘 데스크 위에 레몬 사탕이 들어있는 유리병을 놓아두는데, 창가에 스며든 햇살이 볼록한 유리 표면에 닿으면 왕관처럼 반짝반짝 빛이 난다. 여왕이나, 공주님, 또는 왕자님들만이 왕관을 쓸 수 있지만, 유리병 안에 담긴 노란 레몬사탕은 아무나 다 먹을 수 있다. 새벽녘 거리를 깨끗하게 해주는 미화원. 신선한 우유와 계란을 집 앞으로 갖다 주는 배송 기사님. 종이책을 팔고 사는 손님들. 누구나 차별 없이 사탕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가을 언니는 출근하면서 하나 쏙. 퇴근하면서 두 개 쏙. 매일 들러 새초롬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쏙쏙 빼먹는다. 얄미워! 가을 할머니는 참 좋은 분이셨다고 한다. 무작정 세상밖으로 튀어나오는 나를 받은 사람이 가을할머니라고 한다. 옥상화단에서 찍은 가족사진에 나를 안고 인자하게 웃고 계신 가을할머니. 기억은 안 나지만, 좋은 사람인 건 사진만 봐도 알겠다. 그러나 가을 할머니의 손녀, 가을언니는 외국생활을 오래 해 그런가? 이기적이고 말투도 톡톡 쏘고 두루두루 싫다. 이모와 엄마는 가을할머니를 생각해서 그 언니랑 잘 지내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정을 주려 해도 정나미가 뚝뚝 떨어진다. 그렇지만 언젠가 가을 언니가 할머니 얘기를 하면서 운 적이 있다. 그 언니도 나름 슬픔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
이모가 슬픔이 있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내어줘야 한다고 했다. 엄마와 이모는 슬픔은 아름다운 거라 했다. 슬픔은 희망의 반대가 아니란다. 오히려 짝꿍 같은 거란다. 나의 아름다운 슬픔은 뭘까? 아빠가 없는 거? 이건 안 슬픈데? 친구 같은 현조이모가 있고. 금사빠지만 순수한 경순엄마가 있고. 가출할 때마다 집을 내어주는 서현이모가 있고. 늘 맛있는 도시락을 싸주는 초밥아저씨가 있고. 돌아가셨지만 넘치게 사랑을 준 청평 할머니 할아버지가 마음속에 있으니까.
지혜로운 비! 내 이름은 지우. 부족함 없는 사랑 속에 하고 싶은 건 원 없이 하면서 열아홉 해를 만족스럽게 살아내고 있다. 일 년 전,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엄마는 결사반대했고 이모는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내 선택을 존중해 줬다. 나를 낳은 건 엄마이지만 나와 닮은 건 현조이모다. 이모를 닮아 두 번째 발가락이 길고. 이모를 닮아 굴과 토란대를 못 먹는다. 소울푸드로 쌀국수를 먹는 것도 똑 닮았다. 나와 이모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쌀국수를 곱빼기로 시켜 고수를 산만큼 쌓아 한 그릇 뚝딱한다. 이모는 내가 이모의 자궁까지 닮을까 봐 어릴 적부터 엄청난 관리로 나를 키웠다. 첫 생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여성호르몬이 있다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못하게 했다. 내 옷은 반드시 이모가 손수 만든 비누로 따로 빨았고. 로션부터 샴푸까지 이모가 만들어준 걸 쓰고 있다. 나는 그런 이모가 단 한 번도 귀찮은 적이 없다. 이모가 내게 왜 그러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모와 엄마 하선이와 나. 우리 가족은 서부이촌동 토박이. 한 번도 동네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렇지만 갑갑함을 느껴본 적도 없다. 오래된 우리의 헌책방을 중심으로 높은 빌딩과 고급아파트가 들어섰지만, 2층짜리 헌책방 건물만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다. 굉장한 보상금을 준다고 팔라 했지만 이모와 엄마가 결사반대했기 때문이다. 멈춰있는 우리 헌책방이 참 좋다.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햇살도 좋고. 헌책 냄새도 좋고. 밟을 때마다 삐걱대는 나무바닥도 좋다. 백 년이 넘은 책들로 가득 쌓여 있는 나의 보물섬을 아낀다. 하지만 카운터는 좀 바꿨으면 한다. 너무 낡아서 나무껍질이 벗겨지기 때문이다. 여하튼 나는 이모의 헌책방이 좋다.
"니야옹"
보석이의 딸 하선이는 겨울에 태어나서 그런가 더운 걸 무지하게 싫어한다. 나는 여름에 태어나서 추운 게 싫은데. 나비가 데려왔다는 보석이 자식 중 둘째 딸인 하선이는 나보다 팔 개월 먼저 태어났다. 쌓아놓은 책위에서 아슬하게 잠을 자다가 떨어지곤 하는 이상한 고양이 하선이는 다른 사람들 말은 잘 들으면서 내 말은 죽어라 안 듣는다. 고작 팔 개월 언니라고 으스대는 건가? 나비도 보석이도 보석이가 낳은 자식들도 무지개천국으로 돌아갔는데. 하선이만 저래 팔팔하다. 아직 아기처럼 하얀색털이 보송보송한 하선이가 나무바닥으로 착지해서 게으른 기지개를 켠다.
"하선아. 네 침대 여기 있잖아. 왜 자꾸 책위에 올라가는데?"
심술 맞은 얼굴로 데스크 위로 올라와 동글게 몸을 말고 누운 하선이의 등을 쓸어내리면서 반쯤 엎드렸다. 그러고는 지혜롭고 따뜻한 아기를 생각하면 가슴에서 파도소리가 들린다는 이모의 슬픔을 생각했다. 나는 슬픔을 잘 모르겠다. 슬픔은 무엇일까? 내일이면 주민등록증이 나오는 완전한 성인이 되고. 나의 보물섬 헌책방을 이모가 물려준다 했으니 어엿한 사장이 될 테고. 부족한 게 없는데. 대체 나의 아름다운 슬픔은 어디에 있을까?
“짤랑!”
책방의 문이 종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안녕하세요.”
앳되보이는 여자가 삐걱대는 나무바닥을 밟고 책방 안으로 들어온다. 여름장미처럼 붉은 입술. 솜처럼 하얀 얼굴. 자신 있는 눈빛과 그늘 한점 없는 표정. 낯선 처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는데 왠지 모르게 서글퍼진다. 그녀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로 생각했다. 나 왜 슬픈 거지? 아무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생겼나. 홈이 패인 그곳으로 물이 스며들어 바다가 고이는 것 같았다.
"문현조,라는 분을 찾는데요."
내 가슴에 파도를 만든 그녀가 웃는다. 배꽃처럼 예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