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2021년 11월 20일 토요일]
경순아! 나는 반딧불이가 조명이 되어 가로등이 필요 없다던 앵강만 당산나무 아래 있어. 네 말처럼 수만 개의 동그랗고 노란 레몬사탕들이 춤을 추고 있어. 마치 유리병 안으로 들어온 것만 같아. 서남쪽 끝단 고요하고 작은 마을에 땅거미가 지면 레몬사탕들이 춤을 춘다던 말은 진짜였어. 말도 안 된다 비웃었던 거 미안해. 내일은 소매물도와 바람의 언덕을 가 볼 참이야.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으로 사라지는 해를 보고 싶어. 노을에 눈동자가 타버릴 만큼 볼 거야. 바라보고 바라보다 내 영혼도 따라 들어갈 만큼 말이야. 그전에는 몽돌해변에서 네가 갖고 싶다던 동그란 돌을 주울 거야. 파도에 밀려 서로가 부딪치고 깨져 모난 부분 없이 둥글해졌다는 몽돌 위에 너에게 하고픈 말들을 적어보려 해. 그렇다면 아주 큰 몽돌을 주워야겠지? 그리고 그곳은 아직 찾지 못했어. 어두운 밤에도 환하게 빛을 낸다는 배꽃 농원 말이야. 하루 종일 덕장에서 생선을 말리고 쉴 틈 없이 건어물을 포장하고 초라한 저녁밥을 먹고는 잠자는 시간을 쪼개 할머니와 거닐었다는 그 배 밭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어. 남해대교가 놓인 해안선을 따라 벚나무 길로 쭉 들어가면 된다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혼자 찾는 건 무리일 것 같아. 아직은 겨울이니까. 한 계절만 견디면 벚꽃이 피고 벚꽃이 질 무렵, 배꽃이 만개한다니까. 우리 그곳을 찾아보자. 할머니와 함께 걸었던 그 밤을 이젠 나와 거닐자.
[2021년 11월 21일 일요일]
경순아 너와 할머니를 남해로 불러들인 친척아줌마를 찾았어. 만나면 멱살이라도 잡고 혼을 내주려고 했는데. 이미 죽었더라.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비참하게 죽었기를 바랐어. 그렇지만 그런 마음을 돌이켜야 하겠지? 누군가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건 네가 원하지 않을 테니까. 친척아줌마의 딸은 착하더라. 너를 안데. 노을 지는 바다 앞에서 봉숭아꽃잎을 빻아 손가락을 물들여 주던 경순 언니를 기억한데.
# 경순이를 기억하는 그녀와의 대화
- 엄마가 할매랑 경순언니한테 잘 해주진 몬했지만, 할매 돌아가시고 경순언니 찾으러 온 친엄마 따라가겠다 카는 경순언니를 못가게 붙잡았어예. 경순언니 친엄마, 그 사람 진짜 나쁜 사람이거든예.
- 엄마라고요? 친엄마요?
- 예, 우리 엄마가 할매 부탁 받고 경순언니 키울라 했습니더. 근데 할매 사망보험금 소식 듣고, 경순언니 친엄마라는 사람이 느닷없이 찾아왔데요. 할매가 없는 살림에도 보험은 단단히 들어놓으셨다 카대요. 경순언니 혼자서라도 잘 살아보라고... 그라모, 할매 삼일장 끝나기도 전에 그 친엄마라는 사람이 언니를 데려갔어예. 우리 엄마랑 그때 얼마나 싸웠는지 아십니꺼? 보험금 욕심 나가꼬 경순이 안 내놓는다꼬 지랄지랄하고, 동네엔 또 우리 집이 할매 보험금 꿀꺽하고는, 경순언니 섬에 팔아묵을라 했단 소문까지 싹 퍼뜨려가꼬.... 한동안 진짜, 고생 마이 했심니더.
- 저는 경순이에게 이집 아줌마가 섬에 팔았다고 들었어요. 섬에 있는 작부 집에 팔린 거라고...
- 아니라예. 언니가 와 그라고 말했는지 모르겄지만, 나는 어릴 때 일이래도 또렷이 기억하거든요. 살 날 얼마 안 남았다던 서울 할매가 내려오셔가꼬, 경순언니 성인 될 때까지만 좀 맡아달라고 부탁했심니더. 믿을 사람은 우리 엄마밖에 없다 카시면서요. 우리 엄마가 살뜰히 챙겨주진 못했을랑가 몰라도, 보험금 가로채가꼬 경순언니를 팔아묵을 그런 사람은 절대 아니라예. 그때는 우리 집도 형편이 워낙 빠듯하고, 잘 데도 마땅찮아가꼬.... 우리 식구는 하우스서 자고, 할매랑 경순언니는 창고에서 지내게 한 걸, 엄마도 내내 맘에 걸려 하셨지예.
- 그럼 경순이 친엄마 되는 사람 행방은 아세요?
- 저도 확실치는 모르겠심니더. 조도라 했는지, 호도라 했는지.... 경순언니 가고, 몇 년 지나가꼬, 우리 엄마 꿈에 경순언니 할매가 포대기에 아기 안고 바다 앞에 서가 눈물만 뚝뚝 흘리더래예. 엄마가 그 꿈 꾸고 나서는,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어가꼬 경순언니 소식 알아보러 여기저기 수소문했지예. 근데 트럭 모는 아재 한 분이 하는 말이, “경순이 고년 엄마라는 인간, 짐승만도 못하다 아이가. 지 딸을 사창가에 팔아묵었다 아이가.” 그라더라꼬예. 그것도 육지에 있는 사창가라 카더만예.
- 아닌데요. 열여섯에 섬에 봉사 온 의대생이랑 도망쳐서 살림도 차렸고. 아기까지 낳았는데요.
- 의대생이라카요? 그런 말은 못 들었고예. 사창가서 손님 받다가 애가 들어섰다 카더만, 포주가 애 지우라 캐서 도망쳤다 아입니꺼.
- 혹시, 경순이가 이곳에 찾아올까요?
- 모르겄심니더. 그래도 할매가 여기서 돌아가셨으니, 한 번쯤은 오지 않겠습니꺼? 제가 언니를 알아볼 수나 있을란가 모르겠지만예.... 언니가 어릴 때 그 얼굴 그대로겠습니꺼. 서울사람이라 그런지 얼굴이 참 하얗고, 오목조목 참말로 예뻤거든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안타깝고, 아깝고... 어린 나이에 사창가에 팔렸다 카는 소리 들었을 때는, 억장이 무너졌다 아닙니꺼. 우리 엄마는 며칠이고 밥 숟가락도 못 들고, 그라꼬 그냥 앉아만 있었심니더.
- 경순이에게 들은 것과는 너무 달라서....
- 잘은 모르겠지만예, 저는 거짓말 안 합니더. 내 눈으로도 똑똑히 봤습니더. 제 생각으론 말입니더, 언니가 그 친엄마라는 사람을 그래도 믿고 따라간 거 같은데.... 그렇게 당하고 나서는, 충격이 워낙 컸던지 현실을 좀 비틀어 받아들이게 된 건 아닐라 카는기라예. 친엄마라는 인간이 지한테 그런 짓 했다는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진짜 못 살 것 같아서예. 그걸 그냥 마음속에서 딴 식으로 바꿔놓은 기 아닐까 싶다 아닙니꺼.
- 경순이라면 그럴 수 있겠네요. 모든 것을 동화처럼 바라보는 순수한 아이니까요.... 혹시 경순이가 이곳을 찾아온다면, 집에 빨리 돌아가라고 꼭 전해주세요. 현조가 찾으러 다닌다는 말도요. 그리고 은영 씨가 알고 있는 것들은 모른 척, 해 주세요. 혹여 경순이가 많은 말을 늘어놓더라도, 설령 거짓말 같아도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다 들어주세요. 부탁할게요.
[2021년 11월 22일 월요일]
경순아 어제 은영씨 집에서 신세지고 아침밥까지 야무지게 얻어먹고, 나오는 길이야. 은영씨도 알더라, 너의 고봉밥 사랑말이야. 경순이 네 밥은 꼭 은영씨가 퍼줬다더라. 밥 다푸고, 주걱을 꼭 은영씨에게 쥐어주고 내 밥 좀 퍼줘, 은영아. 했다면서? 으이구, 이경순. 외로움을 그렇게 탔으면서 왜 맨날 행복한 척을 한거야? 아니다 너의 아픔을 보지 못한건 나일테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만나면 백번 천번 말할거야. 보고싶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이젠 같이 행복해지자는 말도. 그리고 할머니를 찾았어. 화장해서 바다에 뿌렸데. 시장에서 생선을 팔아 너를 키운 할머니는 결국 바다가 되었어. 그래서 너의 가슴에서 그렇게 파도소리가 들렸나 봐. 복실이는 바다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게 아니었어. 바다가 된 할머니가 복실이를 키우고 있었어. 이 기쁜 소식을 빨리 알려주고 싶어 애가 탄다. 네가 그랬지? 복실이가 사는 그 곳은 늘 여름 바캉스라고... 너도 언젠가는 그곳으로 갈 거라고. 그래서 끝나지 않은 바캉스를 즐기고 싶다고.... 그래 그러자, 할머니와 복실이가 있는 그곳에 가자. 그런데, 좀 있다가. 이곳에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그곳에 가자. 그때까지는 이곳에서 버티고 버텨보자. 몽돌처럼 부딪치고 깨지고 굴려 다녀도 어떻게든 버텨보자. 경순아 나의 경순아... 그러니 이젠 크고 둥근달이 뜬 날 그만 몸을 흔들어. 구슬픈 자장가는 그만 부르고. 나랑 살자 우리 살아보자. 모난 조각들을 파도에 깎아 둥글게 만들어 그저 그런대로 살아보자. 하 하 하, 웃으면서 모진 세상을 굴러다니자.
[2021년 11월 23일 화요일]
경순아 남해의 하늘은 머리 가까이에 붙어있구나. 낮은 하늘 때문인지 유난히 햇살이 진하고 짙어,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열두 살 너에게 할머니의 죽음은 얼마나 또렷하게 박혀있을까. 열다섯에 상처는 더 잘 보였을 테고. 그 아픔들을 어떻게 견딘 거니. 견디기 힘들어 차라리 바다처럼 안아버린 거니. 사람들이 쏜 화살에 맞고도 다시 사람에게 안기는 너를 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 대답 좀 해줘. 네가 없는 나도. 책방도. 작은 식당도. 서부 이촌동도. 한없이 쓸쓸하기만 해. 네가 떠나고 한동안은 가게 문을 닫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간신히 숨만 쉬었어. 밥도 먹지 않았고. 씻지도 않았어. 바닥에는 헌책들이 흩어져있었고. 한입 베어 물다 버린 사과만 식탁에 뒹굴고 있었어. 그때 집안의 모든 창을 열고. 어질러진 집안을 치워준 사람은 가을 할머니였어. 확성기 삼인방도 차례로 고기랑, 반찬이랑 놓고 가더라. 하지만 나는 네가 만들어 준 밀 면이 가장 먹고 싶었어. 내가 담아주는 고봉밥도 그립고 말이야. 그리고 한강으로 피크닉 갈 때 싸줬던 도시락도, 어떤 날은 치자로 물들인 단무지와 유부초밥. 어떤 날은 문어모양으로 자른 소시지와 쌀밥. 밀면 가게 손님들도 너만 찾아. 예영이가 너의 레시피 그대로 만드는데도 그 맛이 아니야. 손님 떨어질 까봐, 문을 닫았어. 그래도 언제까지 닫아 놓을 수는 없는데 말이야, 네가 적어준 레시피대로 내가 만들어볼까? 너 올 때까지, 내가 헌책방도 밀면 가게도 다 할 수 있을까?
[2021년 11월 25일 목요일]
“경순 씨가 자기 없으면, 현조 두유만 먹는다고, 밥 좀 챙겨달라고 하더라.”
“호르몬약이랑 칼슘제 먹었어? 오후2시에는 현조 약 챙겨 먹는 시간이라고 경순이가 그러던데.”
“현조 언니, 걸어 다닐 때 무릎 보호대 꼭 하고 다녀요. 수술하고 나서 무릎 아프다면서, 맨다리로 다니면 꼭 보호대 하라고 전해 달래요. 경순 언니가요.”
너는 나를 위해 많은 씨앗을 뿌려놨더라. 네가 뿌린 씨앗은 새싹이 돋고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고 숲을 이루겠지. 네가 만든 숲은 나를 살릴 거야. 그리고 너를 살릴 거야. 생각해 봐, 우리는 서로에게 파랑새 같은 거야. 나는 너로 통해 내 외로운 섬에 누군가 나무를 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러니 나도 너에게 알려 줄 거야. 언제든 뒤를 돌아보면 너의 아픔을 조용히 어루만져주는 바다가 있다는 것을.
[2021년 12월 24일 금요일]
경순아, 진짜 재미있는 소식 하나 전할게. 너를 찾으러 부산에 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용산 역 근처 땡땡거리를 지나면서 오랜만에 뿌리서점에 들렀거든? 사장님은 안 계시고, 어떤 젊은 남자가 책을 정리하고 있는 거야.
“주인이 바뀌었나요?”
하고 물었더니, 한참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남자가 뭐라고 한 줄 알아?
“박현조? 너 박현조 맞지?”
너무 당황해서 눈만 껌뻑거리는데, 그 남자가 성큼 다가오더니, 진짜 무섭게 웃는 거야. 하 하 하, 이러면서 말이야.
“나 전민영이야! 5학년 7반! 6학년때는 5반!”
전민영 기억나지? 아빠가 교수라서 담임이 유난히 예뻐하던 그 남자애 있잖아. 암튼 너무 당황해서,
“너 뭐야?” 하고 물었더니,
“사람한테 뭐야, 가 뭐냐?” 이러더라.
어린 시절의 기억은 전부 악몽 같아서, 특히 전민영은 내 비참했던 장면을 모두 아는 목격자잖아. 내가 반가울 리가 있겠어? 새초롬하게 입술을 삐죽이며 돌아서려는데…
“왜 연락 안 했어?”
그러는 거야.
“뭐?”
황당해서 되물었지?
“졸업식 때, 너 서랍에 선물이랑 편지 넣어놨는데.”
중학교 가서 친하게 지내자고 자기 방 전화번호도 적었다는 거야. 난 그런 선물은 받은 적이 없고, 왜 그랬어? 물으니까. 그냥 친해지고 싶었데. 허! 말도 안 돼! 5학년 7반 왕따를? 공부도 못하고, 담임에게 허구한 날, 두들겨 맞는 구박 덩어리 박현조를? 그래서 따져 물었지.
“나를? 왜?”
“제일 좋아하는 책이 어린왕자라고 했잖아, 그때 독후감에 [어린왕자가 자기 별로 돌아가서 기쁘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죽은 거라서 슬프기도 합니다. 어린 왕자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가 어린이 필독서인 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두 책은 어린이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슬픔입니다.] 라고 쓴 걸 봤거든.”
“그게 뭐......”
“그냥 인상적이었다고.”
그러면서 얼굴을 붉히는 거 있지?
“너 얼굴 벌게. 너도 갱년기야?”
농을 던졌더니. 나보고 많이 변했다면서 또 웃더라.
“운동회 날, 경순이랑 네가 소윤혜 뒤통수에 콩 주머니 날릴 때 나도 거들었는걸!”
순간 호감도가 급상승 하더라?
“옛날에 책방 자주 올 때도 알아봤는데, 아버지가 만날 책방에 숨어서 우는 애가 있다고 그러셔서 구경 갔는데 박현조, 너더라? 말 걸고 싶었는데, 울고 있어서 아는 척을 못했어. 언젠가는 오겠지 싶어서, 기다렸어.”
“뿌리서점 사장님이 아버지?”
“응”
“아버지 교수님 아니셔?”
“교수는 책방 하면 안 되냐?”
“그것 말고도 나 너 지하철에서 구해준 적도 있는데?”
“뭐?”
“5년 전인가? 지하철 4호선에서 너 배 잡고 쓰러졌잖아. 그때 내가 부축해서, 보호자 자격으로 병원까지 따라갔는데, 난 줄 몰랐지? 나는 단번에 넌 줄 알았는데.”
“그 남자가 너였어?”
“응, 나 그때 너 임신한 줄 알았는데....... 강윤식이랑 결혼 한 줄 알고..”
“네가 강윤식은 어떻게 알아?”
“대학 동창이야.”
“헐........ 대박....”
“어쨌든 너 그때 내 옷 가져갔어.”
“어....... 야구잠바....”
“내놔.”
어쨌든 내가 그렇게 선망하던 뿌리서점 사장님 아들이 전영민이었고, 썩을 전 남친 대학동창이라 하고...... 지하철 그 남자가 전영민이었고....... 외로울 때마다 어깨에 걸친 그 남자의 잠바가 전영민꺼라 하고..... 무슨 거미줄도 아니고 날파리 마냥 조롱조롱 걸려있는지....... 암튼 찬찬히 뜯어보니, 어릴 때 얼굴이 좀 남아있었고. 뭐 내일모레 마흔치고는 봐줄만한 얼굴? 뭐 그 후로, 우리 책방에 자주 놀러오고. 온라인 서점 운영하는 방법도 전수받았어. 그러고 싶진 않았는데, 꽤 도움을 받고 있는 건 사실이야. 그리고 내가 애정 하는 뿌리서점에 믹스커피는 전민영이 타주었던 거래. 놀랍지 않아? 나는 정말 놀랐어. 사실 뿌리서점에서 그 아이를 본 적은 없거든. 그렇게 말했더니, 전민영 하는 말이.
“너는 늘 눈을 땅에 붙이고 다니더라, 그러니 날 못 보지. 나는 너 많이 봤는데....”
하지만 난 정말 기억이 나질 않아. 하여튼 뭐, 그건 그렇고. 전민영 걔는 말이야, 볼 때마다 밥 먹었냐고 물어본다? 그럴 때 마다 나는 경순이 네가 생각나고. 그래서 몇 번 밥을 같이 먹었어. 밥 먹으면서 그 아이가 그러더라.
“선물 진짜 못 받았어?”
“응. 근데 선물이 뭐였어?”
“몸통을 손으로 잡으면, 어떤 문장이 나타나는 샤프.”
“어떤 문장?”
“I LOVE YOU”
[2022년 1월 2일 일요일]
경순아, 나비가 가출을 했어. 너처럼 말이야. 둘 다 집에 들어오면 아주 혼내 줄 거야! 경순아, 네가 만들어 준 샌드위치가 너무 먹고 싶어. 양배추 가득 들은 샌드위치. 대충 기억을 더듬어 만들어봤는데, 그 맛이 아닌 거야. 들어봐! 양배추는 채 썰어 차가운 물에 한 시간 담근다. 사과, 양파는 찹찹 다지고. 계란은 잘게 부숴 마요네즈에 버무린다. 마지막 통후추를 갈아 뿌린다. 반드시 르네상스제과점 우유식빵이어야 한다. 식빵 한 면에는 땅콩 잼, 다른 면에는 딸기잼을 발라서 아낌없이 속을 채워 랩으로 야무지게 밀봉한다. 맞지? 정말 나는 한 치의 창의력도 더하지 않고 그대로 만들거든? 뭐가 문젠거야?
[2022년 1월 13일 목요일]
경순아, 너를 뒤에 태우고 사라졌던 초밥 집 직원을 찾았데. 너와는 전주에서 헤어졌다고 하는데, 사실이니? 그 남자가 그곳에 너를 버린 거니? 경순아, 너도 그 남자에게 가진 돈을 다 주었다면서. 바보같이 왜 그랬냐고, 책망하지 않을게. 너는 단지 사랑을 원했을 뿐이니까.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경순아 바보 같은 사랑을 한 거니. 그렇더라도 상관없으니 돌아와. 또 다른 사랑을 찾아보자. 반드시 우리는 행복해질 거야. 너는 그럴 자격이 있어.
ps 경순아, 만약 지금 당장 네가 금붕어로 변해서, 일초마다 기억을 잃는다면, 나는 일초마다 말해줄 거야.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2022년 1월 14일 금요일]
“경순이는 반드시 돌아올 거란다”
“이젠 금방 추워지는데 돈도 없는 애가 길 위를 헤매고 있을 거예요.”
울먹이면, 가을 할머니가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주셔. 그렇지만 상실감은 사라지질 않아. 떠나는 것보다는 남겨지는 게 더 힘든 거야. 지독한 슬픔은 오롯이 남겨진 자의 몫이 되어버리는 걸 아니? 자기 연민에 휩싸이는 날이 있어. 그 감정은 끝없는 나락으로 잠식시켜. 나를 원망하다가 마지막에는 너를 미워해. 그럴 땐 어김없이 가을할머니가 나타나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씀하셔.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지, 믿을 수도 없지, 그렇지만 사랑해야지.”
[2022년 1월 25일 화요일]
경순아 너와 나비를 찾는 전단지를 또 붙이고 왔어. 비가 와서 찢어지고 색이 바래졌더라. 요즘은 너와 나비를 목격했다는 장난전화조차 오질 않아.
[2022년 1월 26일 수요일]
경순아 카운터에 레몬사탕을 올려두었어. 플라스틱 병에 사탕을 넣었는데, 햇살이 예쁘게 반사되질 않더라? 그래서 생각해봤지, 우리 유리병 깨뜨리기로 했었잖아, 굳이 레몬사탕을 왜 유리병에 넣어야 해? 꺼내먹기도 힘들게. 그래서 나무 바구니에 담았어. 주둥이가 넓어서 꺼내먹기 쉽게 말이야. 실수로 떨어뜨려도 깨지지도 않아, 떨어진 사탕만 다시 주워 담으면 되는 거야. 그지?
[2022년 2월 10일 목요일]
경순아 드디어, 밀면 가게를 다시 열었어. 가을할머니랑 연습에 연습 끝에, 너의 밀면 육수와 비슷한 맛을 찾아냈어. 밀면 반죽은 그럴싸하고, 육수는 가을 할머니가 경순이 맛을 찾아냈지. 대파는 뿌리까지 통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걸 놓친 거야. 그렇게 단순한 이유로 국물 맛이 달라질 수도 있는 거니? 경순이도 몰랐지? 너의 레시피 공책에도 그냥 대파라고 쓰여 있지, 뿌리까지 있는 대파라고는 안 쓰여 있거든? 너 빨리 와서 해명해야 할 거야. 혹시 육수만큼은 경순이 전매특허이길 바란 거니? 그렇다면, 밀 면은 경순이 전매특허 맞아. 우리가 아무리 너를 흉내 내도, 너의 밀 면 맛은 나오지 않을 거야.
ps 경순아, 백숙이 입양해 간 군인 청년은 회사를 그만 뒀데. 형처럼 웹툰 작가가 꿈이었데, 그래서 형 밑에서 배우고 있데. 형이 좀 유명한 사람이래.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건 비밀이란다. 우리가 또 이런 비밀은 못 참잖니? 어서 와서 백숙이 큰 형 정체를 밝혀내자! 어쨌든 백숙이는 형 둘 다 매일 집에 있어서, 엄청 귀찮아 한데.
[2022년 2월 11일 금요일]
경순아 희소식이 있어. 김예영 계집애, 드디어 자기 엄마랑 화해를 했어. 밀면 가게가 한동안 문을 닫아서, 반찬 가게에서 일을 도왔는데, 제 엄마랑은 같이 못하겠다고, 빨리 밀면 가게 문 열라고 성화도 그런 성화가 없었어. 예영이 때문이라도, 가을이 할머니랑 새벽까지 육수에 대해 연구를 했지. 예영이도 많이 철들었어. 나는 너 찾는 데만 전념하라면서, 밀면 가게도 혼자 새벽부터 문을 열고 있어. 가을 할머니도 아침저녁으로 도와주시고, 그리고 책방에는 알바생을 하나 뒀어. 아무래도 너를 찾으러 나갈 때 마다 문을 닫기도, 누구 한테 맡기기도 뭐해서 말이야. 그리고 알바생이 필요할 때 만 불러도 괜찮데. 알바생은 너도 아는 사람이야. 누구냐면 바로 전민영이야. 애가 자꾸 보니까, 괜찮은 구석이 많더라고. 온라인 헌책방 때문에 도움도 받아야 해서 겸사 겸사 부르는 건데, 확성기 삼총사가 자꾸 사귀라고 주책을 떨잖아. 그 아줌씨들은 언제 철들려나 몰라.
ps 근데 전민영 걔 있잖아....... 멀쩡하게 생겨서 왜 아직 장가를 못 갔는지 몰라.
[2022년 2월 12일 토요일]
경순아 나는 지금 서울 역에서 하루를 보내고 오는 길이야. 전화를 받았어. 너와 닮은 여자를 봤다고. 낡은 에코백에 핑크색 임산부 키링을 달고 있었다는 얘길 듣고, 단번에 너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배가 볼록하게 나온 것이 임신한 것처럼 보였다는데. 경순아, 왜 말을 안했어. 아니야! 미리 알아채지 못해서 미안해. 멸치 우리는 냄새에 고개를 돌릴 때 알아챘어야 했어. 자꾸만 아랫배를 만질 때, 알아챘어야 했어. 경순아 또 그런 몸으로 길을 헤매고 다니는 거니? 경순아...
[2022년 2월 13일 일요일]
너를 찾기 위해 밤새 돌아다녔어. 노숙자들에게 돈을 주고 너를 보면 반드시 연락해 달라는 당부도 해뒀어. 또 뭐를 할 수 있을까. 어찌해야 너를 찾을 수 있을까. 경순아 배고프지는 않아? 다리는 안 아파? 추운 것도 싫어하면서. 옷도 얇게 입었잖아. 무거운 몸으로 어디를 헤매이고 있니. 경순아 우리 목욕탕 갔다가 귤 한 봉지 사들고 솜이불 위에서 드라마 보자. 손끝을 노랗게 물들이면서 드라마 보자.
[2022년 2월 14일 월요일]
경순아, 오늘도 나는 서울 역으로 가는 중이야. 그런데 그만 서울 역에서 내려야 하는 걸 깜빡하고 두 정거장이나 지나쳐 버렸지 뭐야. 딴 데 정신을 팔았냐고? 아니. 사실 출근길의 4호선은 거의 지옥철 수준이잖아. 숨 쉴 틈도 없이 꽉 찬 공간 속에서, 어려 보이는 임산부 한 분이 쩔쩔매며 서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녀를 불러서 핑크색 임산부석에 앉게 했어. 그리고는 내 튼튼한 두 팔로 그녀의 배가 다른 사람들에게 부딪히지 않도록 지켜줬지.나, 좀 기특하지? 예전처럼 임산부석 질투하던 그런 박현조 아니다. 헌데, 그녀의 동그란 배와 가방에 달린 분홍색 키링을 보는데. 자꾸 눈물이 나는 거야. 한 손은 손잡이를 또 한 손은 기둥을 잡고 뒤에서 미는 승객들에게 그녀를 보호해줘야 해서 닦아 낼 손도 없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는 거야.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그녀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축축이 젖은 내 뺨을 닦아줬어.
“선물이에요.”
예쁘게 말하면서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어주더라. 너처럼 마음씨도 말투도 예쁜 임산부는 동대문에서 일을 한데. 그녀를 따라 내렸다가 서울 역으로 되돌아가려고 플랫폼에 서 있어. 그리고 너를 생각해. 웃을 때 생기는 인디언 보조개, 말끝을 흐리는 버릇. 자주 행복해하던 얼굴. 지겨울 만큼 생각하는데도 질리지가 않네.
[2022년 2월 15일 화요일]
경순아, 서울 역에서 너를 찾고 돌아오는 지하철 4호선에서 작은 날갯짓으로 날아다니는 하얀 나비를 봤어. 저 나비는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걸까? 모든 승객들이 한눈이 되어 하얀색 나비를 바라보았어. 쟤를 어떻게 구해주지? 삼각지역에서 나비를 내보내주려 시도했는데 실패했고 나는 이촌 역에서 내렸어. 속으로 누군가 구해줬겠지....... 했는데 계속 마음에 남네. 끝까지 하얀색 나비를 구해주지 못한 것이. 해도 들지 않는 곳에 갇혀서 빛을 찾아 헤매고 있을 하얀 나비가 자꾸 눈에 밟혀. 오늘밤도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아.
[2022년 2월 16일 수요일, 새벽 1시30분]
경순아 나는 역시나 잠을 설치고 있어. 멍하니 티브이를 보는데,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저 낮에 지하철에 갇혀 있던 하얀색 나비의 연약한 날갯짓만 아른거려. 티브이를 보는 건지 낮에 보았던 장면을 떠올리는 건지 잠시 헷갈렸어. 제 작년, 여름 아기를 떠나보내고 롯데월드에서 바이킹을 타면서 네가 말했지.
“놀이기구를 탈 때는 눈을 감고 머리를 풀어야 해. 그럼 하늘을 나는 것 같아. 나 다음에는 나비 같은 걸로 태어났으면 좋겠어.”
나 지금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어. 혹시 경순이가 하얀 나비가 된 걸까? 나는 점점 이상해지고 있어. 경순아 나는 잠도 잘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고. 잘 웃지도 못해. 이런 내 소식이 너에게 닿았으면 좋겠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오는 너를 매일매일 상상하고 있어. 경순아 기억하니? 2020년 3월 30일 새벽 한시 반, 내가 기억하라고 했잖아. 우리 그날 약속했잖아, 서로 미워질 일이 있어도. 이 밤을 기억하면서 용서해주기로. 경순아, 그러기로 했잖아.....
[2022년 2월 20일 일요일]
경순아! 드디어 나비가 돌아왔어. 책방 문을 열려고 아침에 나왔는데. 책방 앞 테크에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는 거 있지? 녀석을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아니? 혹시 몰라 매일 놓아둔 사료그릇은 말끔히 비워놓고 말이지, 좋다고 골골송을 부르는 녀석이 배를 좀 곯았는지 말라있어. 병원을 데려가 볼 참이야. 헌데 나비와 병원에 동행할 군식구가 하나 늘었어. 푸른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아름다운 페르시안 고양이야. 아무래도 집고양이인 듯한데, 가출한 건가? 혹시 사람에게 버림받은 아이라면? 경순이 너라면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하겠지?
“제발 우리가 키우자~~~~”
걱정하지 마. 우리가 키우자. 그렇지만, 주인을 못 찾는다는 전제하에 하는 말이야! 그런데 나비가 데려온 페르시안 고양이가 임신을 한 것 같아. 나비 처음 봤을 때랑 배 모양과 걸음걸이가 똑같아. 나비 녀석 오지랖인 건, 날 닮았나 봐. 다정하고 친절한 건 너를 닮았고. 새로운 군식구 페르시안 고양이는 보석이라고 이름 짓자. 눈이 진짜 보석을 박아 놓은 것 같거든. 사람 손도 엄청 탔는지, 강아지처럼 쫓아다니고. 내 다리에 지 얼굴이 뭉개 질만큼 비벼대고 있어. 치대는 모양이 딱 이경순인데?
[2022년 3월 3일 목요일]
경순아 보석이가 새끼를 낳았어. 세 마리야. 누런 녀석은 수놈인데 전민영이 데려갔고. 암놈 둘은 나비와 보석이가 사는 옥탑에서 같이 살기로 했어. 햇살과 바람을 좋아하는 나비와 보석에게 옥탑 방은 최적의 보금자리가 되어 줄 거야. 나비 녀석 옥탑 정원이 마음에 드는 지, 이젠 밖으로 외출하려고 들지를 않네. 하지만 옥상 난간에 가끔 매달려서, 보호 판을 설치했어. 진짜 거금 들었다. 철제는 저렴하다는데, 대신 한강 조경을 가리잖니? 그래서 결국 투명 보호 판으로 선택했어. 나비가 몇 번 뛰어들다가 얼굴을 세게 부딪치더니, 이제는 엄두도 못 내더라. 그리고 보석이는 집고양이가 맞았는지, 정원도 잘 안돌아 다녀. 옥탑 방안에 설치한 캣타워에서 거의 안내려와. 아, 보석이는 주인을 못 찾았어. 아이가 임신도 했고, 건강도 좋지 않아서, 아무래도 버림받은 것 같다더라. 어쨌든 꾸준히 병원도 데려가고 약도 잘 챙겨줘서 많이 건강해졌어. 보석이 눈이 경순이랑 닮은 것 같아. 성격도 닮은 것 같고. 사람을 아주 많이 좋아하거든. 보석이 새끼 두 마리는 각각, 하선이 하랑이라 지었어. 보석이를 닮아 털이 온통 하얀 녀석은 하선, 배만 하얗고 등은 누런 녀석은 하랑이야. 두 마리가 한 배에서 나왔는데, 성격이 너무 달라. 하선이는 엄청 앙칼져서 나비한테까지 대들어. 하랑이는 겁이 너무 많고. 다행히 나비가 하랑이와 하선이를 제 자식처럼 챙겨. 저번에는 젖도 물리더라? 나비가 그러는 동안 보석이는 캣타워에 누워서 한강의 윤슬만 바라보고. 아주 낭만 고양이셔. 손님들도, 나도 모두들 옥탑 방에 사는 고양이들을 사랑해. 사료 값은 꽤 나가는데, 간식 값은 굳었어. 손님들이 넘치도록 사다주거든. 경순아 나는 요즘 이층 살림집을 비워놓고, 옥탑 방에서 고양이들과 생활해. 이층은 너무 외롭거든.
[2022년 3월 7일 월요일]
경순아..... 나는 다시 남해를 왔어. 같이 찾으려던 배꽃농원을 혼자 찾게 되었네.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그곳을 너와 찾고 싶었는데. 농장 주인이 그러는데, 배꽃은 4월 말경에 하얗게 피어난데. 7월쯤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고 9월쯤이면 달고 촉촉한 배를 수확한데. 꽃이 지지 않으면 열매는 맺어지지 않는다더라. 열매는 꽃의 상처로 만들어진다고. 식물들은 끊임없이 상처를 만들어 씨앗을 퍼뜨린데. 상처가 없으면 번식하지 않는데. 결국, 상처들이 모여 울창한 숲을 만든 거야.
[2022년 3월 8일 화요일]
문득문득. 아니 자주. 후회를 한다. 달무리가 하늘 가득 퍼지던 그 밤. 얇은 너의 몸을 안고서 네 가슴에 고인 바닷물이 넘쳐흐를 때까지 끌어안지 못한걸. 너와의 여름방학이 계속될 줄 알았던 열두 살 그때처럼 너와의 이상한 동거가 영원할 줄만 알았으니까. 이토록 사무치게 아프리라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안아주고 또 안아주고. 새겨듣고 또 새겨듣고. 위로하고 또 위로할 것을. 눈물 많은 너를. 남의 일에는 작은 것에도 통곡을 하는 너를. 자신의 고단함 앞에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너를 위해 펑펑 울어 줄 것을. 미치게 후회할 날이 올걸, 알았더라면, 눈 자욱이 짓무를 만큼 울어줄 것을. 이토록 휘청 일 만큼 그리울 줄 알았더라면. 싸락눈과 달빛이 부서져 내리는 밤. 실낱같은 희망을 수도 없이 다짐해 본다. 사는 동안은 너를 위해 대신 울어줄 거라는 다짐을 수도 없이 하면서.
[2022년 4월 7일 목요일]
옥상 화단에 심어놓은 목화가 작은 꽃을 피웠어. 씨앗을 내어주고 숨을 거두는듯하더니 다시 피어나더라. 노란색 하얀색 분홍색 초록색, 가지각색의 식물들 위로 햇살이 내려앉았어. 옥상에는 봄의 생명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 모든 식물들을 사랑하지만, 유독 목화 꽃이 마음 쓰여. 야자나무와 수선화 사이에 자라난 목화 꽃. 키 큰 식물들에 가려, 그늘진 땅에서 자라다 보니 저렇게 볼품없게 된 걸까. 조심스레 손끝으로 쓰다듬던 찰나, 볕을 가장 많이 받는 자리에서 자라난 윤기 나는 수선화 한 송이가 지나가는 바람을 붙잡듯 몸을 흔들었어. 수선화가 흔들릴 때마다 그 아래 작고 여린 목화 위로 햇살이 한 줄기씩 스며들었지. 그래... 목화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건, 수선화가 노란 햇살을 나눠 주려고 끊임없이 제 몸을 흔들었기 때문이었어. 경순아 나도 그럴게. 끊임없이 내 몸을 흔들어 너에게 햇살을 나눠 줄게.
# 12화의 작은 조각
- 현조언니! 여기 사탕 바구니 좀 보세요! 백날 천 날 레몬 사탕만 있더니, 사과 맛도 있고, 박하도 있고. 여러 맛 사탕이 레몬 사탕과 섞여 있네요? 언니가 그런 거 아니에요? 어? 그럼 누구죠? 가을 할머니도 아니시고, 우리 자기도 아니랬는데. 민영 오빠 아닌가요? 그런데 민영 오빠도 열쇠 갖고 있어요? 민영 오빠한테 열쇠 안줬다고요? 그럼 누가 사탕을 이렇게 채워 넣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