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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주양 Nov 13. 2024

19. 대신 울어줄게

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2021년 8월 23일 월요일   

경순아! 나는 반딧불이가 조명이 되어 가로등이 필요 없다던 앵강만 당산나무 아래 있어. 네 말처럼 수만 개의 동그랗고 노란 레몬사탕들이 춤을 추고 있어. 마치 유리병 안으로 들어온 것만 같아. 서남쪽 끝단 고요하고 작은 마을에 땅거미가 지면 레몬사탕들이 춤을 춘다던 말은 진짜였어. 말도 안 된다 비웃었던 거 미안해. 내일은 소매물도와 바람의 언덕을 가 볼 참이야.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으로 사라지는 해를 보고 싶어. 노을에 눈동자가 타버릴 만큼 볼 거야. 바라보고 바라보다 내 영혼도 따라 들어갈 만큼 말이야. 그전에는 몽돌해변에서 네가 갖고 싶다던 동그란 돌을 주울 거야. 파도에 밀려 서로가 부딪치고 깨져 모난 부분 없이 둥글해졌다는 몽돌 위에 너에게 하고픈 말들을 적어보려 해. 그렇다면 아주 큰 몽돌을 주워야겠지? 그리고 그곳은 아직 찾지 못했어. 어두운 밤에도 환하게 빛을 낸다는 배꽃농원말이야. 하루종일 덕장에서 생선을 말리고 쉴 틈 없이 건어물을 포장하고 하찮은 저녁을 먹고는 잠자는 시간을 쪼개 할머니와 거닐었다는 그 배밭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어. 물어보니, 남해대교가 놓인 해안선을 따라 벚나무길로 쭉 들어가면 된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혼자 찾는 건 무리일 것 같아. 아직은 여름이니까. 겨울만 견디면 벚꽃이 피고 벚꽃이 질 무렾, 배꽃이 만개한다니까. 우리 그곳을 찾아보자. 할머니와 함께 걸었던 그 밤을 이젠 나와 거닐자.



2021년 8월 24일 화요일     

경순아... 너와 할머니를 남해로 불러들인 친척아줌마를 찾았어. 만나면 멱살을 잡고 경찰서로 끌고 가려했는데. 이미 죽었더라.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비참하게 죽었기를 바랐어. 그렇지만 그런 마음을 돌이켜야 하겠지? 누군가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건 네가 원하지 않을 테니까. 친척아줌마의 손녀는 착하더라. 너를 기억한데. 노을 지는 바다 앞에서 봉숭아꽃으로 손가락을 물들여 주던 경순 언니를 기억한다고. 만나면 대신 사죄하고 싶데. 그래서 내가 뭐라 그랬게? 밥을 좀 달라고 했어. 고봉밥으로 꾹꾹 눌러 담아 달라했어. 나 잘했지? 그리고 경순아.... 할머니도 찾았어. 어른들이 화장해서 이름 없는 바다에 뿌렸데. 시장에서 생선을 팔아 너를 키운 할머니는 결국 바다가 되었어. 그래서 너의 가슴에서 파도소리가 들렸나 봐. 복실이는 바다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게 아니었어! 바다가 된 할머니가 복실이를 키우고 있었어. 이 기쁜 소식을 너에게 하루라도 빨리 알려주고 싶어 애가 탄다. 경순아 나의 경순아.. 이젠 크고 둥근달이 뜬 날 그만 몸을 흔들어. 구슬픈 자장가는 그만 부르고. 경순아 나의 경순아 나랑 살자. 모난 조각들을 파도에 깎아 둥글게 만들어 그저 그런대로 살아보자. 허허 웃으며 모진 세상을 굴러다니자.

         


2021년 8월 25일 수요일     

경순아 남해의 하늘은 머리 가까이에 붙어있구나. 낮은 하늘 때문인지 유난히 햇살이 진하고 짙어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열두 살 너에게 할머니의 죽음은 얼마나 또렷하게 박혀있을까. 열다섯에 상처는 더 잘 보였을 테고. 그 아픔들을 어떻게 견딘 거니. 견디기 힘들어 차라리 바다처럼 안아버린 거니. 인간들이 쏜 화살에 맞고도 다시 인간에게 안기는 너를 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 대답 좀 해줘. 네가 없는 나도. 책방도. 서부이촌동도. 한없이 쓸쓸하기만 해. 네가 떠나고 한동안은 책방 문을 닫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간신히 숨만 쉬었어. 밥도 먹지 않았고. 씻지도 않았어. 바닥에는 헌책들이 흩어져있었고. 한입 베어 물다 버린 사과만 식탁에 뒹굴고 있었어. 그때 집안의 모든 창을 열고. 어질러진 집안을 치워준 사람은 가을 할머니였어. 초밥집 사장님도 종종 도시락을 갖다주고 있어. 어떤 날은 치자로 물들인 단무지와 유부초밥. 어떤 날은 문어모양으로 자른 소시지와 쌀밥. 또 어떤 날은 참치죽. 돈을 준다니까 멋대가리 없는 표정으로 고개만 흔들고 가데? 근데 그 사장은 나만 보면 왜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지는 건지 모르겠어. 남자도 갱년기가 오나? 어쨌든 경순아.. 너는 나를 위해 많은 씨앗을 뿌려놨더라. 네가 뿌린 씨앗은 새싹이 돋고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고 숲을 이루겠지. 네가 만든 숲은 나를 살릴 거야. 그리고 너를 살릴 거야.                



2021년 9월 1일 수요일     

경순아, 네가 없으니 손님도 줄은 것 같아. 네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샌드위치를 만드는데 왜 맛이 변했다고 하는 걸까? 들어봐! 양배추는 채 썰어 차가운 물에 한 시간 담근다. 사과, 양파는 찹찹 다지고. 계란은 잘게 부숴 마요네즈에 슥슥 버무린다. 마지막 통후추를 갈아 뿌린다. 반드시 르네상스제과점 우유식빵이어야 한다. 식빵 한 면에는 땅콩잼, 다른 면에는 딸기잼을 발라서 아낌없이 속을 채워 랩으로 야무지게 밀봉한다. 맞지? 정말 나는 한치의 창의력도 더하지 않고 그대로 만들거든? 커피도 말이야! 탈지분유 한 스푼, 맥심커피 두 스푼에 설탕 셋 프림 하나. 알려준 고대로 만들거든?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빨리 와. 이러다가 책방 망하겠어.                



2021년 9월 2일 목요일  

경순아, 너를 뒤에 태우고 사라졌던 초밥집 직원을 찾았데. 좀 전에 초밥집 사장님 통해 들었어. 너의 안부를 물었는데 그 남자가 그랬데. 경순이 누나와는 전주에서 헤어졌다고.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그 사람은 너를 사랑하지 않는데. 네가 헛짓한 거래. 귀찮아서 아무 데나 버렸데. 경순아 또 바보 같은 사랑을 한 거니. 그렇더라도 상관없으니 돌아와. 괜찮아. 또 다른 사랑을 찾아보자. 반드시 행복해질 거야. 너는 그럴 자격이 있어.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매초마다 말해줄게. 괜찮아.               



2021년 9월 3일 금요일  

경순이는 반드시 돌아올 거란다, 가을 할머니는 늘 확신에 차 있어. 이젠 금방 추워지는데 돈도 없는 애가 길 위를 헤매고 있을 거예요. 곧 겨울인데 경순이 어떡해요, 울먹이면 가을 할머니가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 줘. 그렇지만 내 절망은 상실감은 사라지질 않아. 떠나는 것보다는 남겨지는 게 더 힘든 거야. 지독한 슬픔은 오롯이 남겨진 자의 몫이 되어버리는 걸 아니? 자기 연민에 휩싸이는 날이 있어. 그 감정은 끝없는 나락으로 잠식시켜. 나를 원망하다가 마지막에는 너를 미워해. 그럴 땐 어김없이 가을할머니가 나타나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씀하셔.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지, 믿을 수도 없지, 그렇지만 사랑해야지.



2021년 9월 4일 토요일     

경순아... 나비와 너를 찾는 새 전단지를 붙이고 왔어. 비가 와서 찢어지고 색이 바래졌더라. 요즘은 너와 나비를 목격했다는 장난전화조차 오질 않아.       

         


2021년 9월 6일 월요일     

경순아... 카운터에 레몬사탕을 올려두었어. 플라스틱 병에 사탕을 넣었는데, 햇살이 예쁘게 반사되질 않더라? 그래서 밀폐유리병을 샀어. 견고해서 잘 깨지지 않는데. 혹시라도 실수로 떨어뜨려도 괜찮아. 깨진 유리는 새로 사면 되는 거야. 전보다 더 좋은 유리병으로. 그 병에 우리의 희망과 슬픔을 담아보자. 켜켜이 쌓여 노랗고 아름답게 빛날 때까지.             

    


2021년 9월 28일 화요일    

경순아 나는 지금 서울역에서 하루를 보내고 오는 길이야. 전화를 받았어. 너와 닮은 여자를 봤다고. 보풀이 일어난 스웨터에 얇은 종아리가 드러난 바랜 원피스를 입고 있었데. 낡은 에코백에 핑크색 임산부 키링을 달고 있었데. 너를 찾기 위해 밤새 돌아다녔어. 노숙자들에게 돈을 주고 너를 보면 반드시 연락해 달라는 당부도 해뒀어. 또 뭘 할 수 있을까. 어찌해야 너를 찾을 수 있을까. 경순아... 배고프지는 않아? 발은 안 아파? 추운 것도 싫어하면서 곧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올 텐데.... 경순아 목욕탕 갔다가 귤 한 봉지 사들고 솜이불 위에서 드라마 보자. 손끝을 노랗게 물들이면서 드라마 보자.



2021년 9월 29일 수요일     

경순아 오늘도 나는 서울역으로 가고 있어. 서울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두 정거장을 지나친 거 있지? 딴 데 정신을 팔았냐고? 아니.... 실은 출근길이라 4호선은 거의 지옥철 수준이거든. 숨쉴틈 없이 승객들로 빽빽한 공간에 어려 보이는 임산부 한 명이 쩔쩔매고 서 있더라고. 그녀를 불러서 핑크색 임산부석에 앉히고 나의 튼튼한 두 팔로 그녀의 배가 사람들에게 부딪치지 않도록 보호해 줬지. 나 기특하지? 예전처럼 임산부석 질투하는 그런 문현조가 아니지? 헌데... 그녀의 동그란 배와 가방에 달린 분홍색 키링을 보는데. 자꾸 눈물이 나는 거야. 한 손은 손잡이를 또 한 손은 기둥을 잡고 뒤에서 미는 승객들에게 그녀를 보호해줘야 해서 눈물을 닦아 낼 손도 없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는 거야.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그녀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얼굴을 닦아줬어. 애기 태어나면 주려고 만든 손수건인데 선물이에요, 예쁘게 말하면서 주머니에 넣어주더라. 너처럼 마음씨도 말투도 표정도 예쁜 임산부는 동대문에서 일을 한데. 그녀를 따라 내렸다가 서울역으로 되돌아가려고 플랫폼에 서 있어. 그리고 너를 생각해. 웃을 때 생기는 콧등에 주름. 말끝을 흐리는 버릇. 자주 행복해하던 얼굴. 지겨울 만큼 생각하는데도 질리지가 않네.

           


2021년 10월 1일 금요일     

경순아, 서울역에서 너를 찾고 돌아오는 지하철 4호선에서 작은 날갯짓으로 날아다니는 하얀 나비를 봤어. 저 나비는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걸까? 모든 승객들이 한눈이 되어 하얀색 나비를 바라보았어. 쟤를 어떻게 구해주지, 삼각지역에서 나비를 내보내주려 시도했는데 실패했고 나는 이촌역에서 내렸어. 속으로 누군가 구해줬겠지 했는데 계속 마음에 남아. 끝까지 하얀색 나비를 구해주지 못한 것이. 해도 들지 않는 곳에 갇혀서 빛을 찾아 헤매이고 있을 하얀 나비가 자꾸 눈에 밟혀. 오늘밤도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아.                          



2021년 10월 1일 금요일, 밤 12시     

경순아 나는 역시나 잠을 설치고 있어. 멍하니 티브이를 보는데,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저 낮에 지하철에 갇혀 있던 하얀색 나비의 연약한 날갯짓만 아른거려. 티브이를 보는 건지 낮에 보았던 장면을 떠올리는 건지 잠시 헷갈렸어. 일 년 전, 지온이를 보내고 롯데월드에서 바이킹을 타면서 네가 말했지... 놀이기구를 탈 때는 눈을 감고 머리를 풀어야 한다고. 그래야 하늘을 나는 것 같다고. 다음에는 나비 같은 걸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나 지금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어. 혹시 경순이가 하얀 나비가 된 걸까? 나 점점 이상해지고 있어. 경순아 나는 잠도 잘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고. 잘 웃지도 못해. 이런 내 소식이 너에게 닿았으면 좋겠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오는 너를 매일매일 상상하고 있어.



2021년 10월 2일 토요일

경순아! 드디어 나비가 돌아왔어. 책방문을 열려고 아침에 나왔는데. 책방 앞 테크에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는 거 있지? 녀석을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아니? 혹시 몰라 매일 놓아둔 사료그릇은 말끔히 비워놓고 말이지, 좋다고 골골송을 부르는 녀석이 배를 좀 곯았는지 말라있어. 병원을 데려가 볼 예정이야. 헌데 나비와 병원에 동행할 군식구가 하나 늘었어. 푸른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아름다운 페르시안 고양이야. 아무래도 집고양이인 듯한데, 가출한 건가.... 혹시 사람에게 버림받은 아이라면, 걱정하지 마. 우리가 키우자. 사료값이 제법 나가겠어. 그런데 나비가 데려온 페르시안 고양이가 임신을 한 것 같아. 나비 처음 봤을 때랑 배 모양과 걸음걸이가 똑같아. 나비 녀석 오지랖인 건 나를 닮았나 봐. 다정하고 친절한 건 너를 닮았고. 새로운 군식구 페르시안 고양이는 보석이라고 이름 짓자. 눈이 진짜 보석을 박아 놓은 것 같거든. 사람 손도 엄청 탔는지, 강아지처럼 쫓아다니고. 지 얼굴이 뭉개 질만큼 비벼대고 있어. 치대는 모양이 딱 이경순인데?

 


2021년 11월 13일 토요일

경순아 보석이가 새끼를 낳았어. 누런 녀석은 수놈인데 초밥집 사장이 데려갔고. 암놈 둘은 나비와 보석이가 사는 옥탑방에서 같이 살기로 했어. 햇살과 바람을 좋아하는 나비와 보석에게 옥탑방은 최적의 보금자리가 되어 줄 거야. 대신 옥상 난간에서 매달리다 떨어질 수 있으니, 옥탑 전체에 그물망을 씌어야 하나? 고민을 좀 해봐야겠어. 네가 돌아오면 우리 헌책방 건물은 종일토록 왁자지껄할 거야.



2021년 11월 14일 일요일

나는 다시 남해를 왔어. 같이 찾으려던 배꽃농원을 혼자 찾게 되었네.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너와 찾고 싶었는데. 경순아, 배꽃은 4월 말경에 하얗게 피어난데. 7월쯤 꽃이 자리에 열매가 맺고. 9월쯤이면 달고 촉촉한 배를 수확한데. 농장주인이 그러더라. 꽃이 지지 않으면 열매는 맺어지지 않는다고. 열매는 꽃의 상처로 만들어진다고. 식물들은 끊임없이 상처를 만들어 씨앗을 퍼뜨린데. 상처가 없으면 번식하지 않는데. 결국, 상처들이 모여 울창한 숲을 만든 거야.  



2021년 12월 4일 토요일

싸락눈과 달빛이 부서져 내리는 밤. 실낱같은 희망을 수도 없이 다짐해 본다. 사는 동안은 너를 위해 대신 울어줄 거라는 다짐을 수도 없이...



2022년 8월 15일 월요일

옥상 화단에 심어놓은 목화가 꽃을 피우다 지다, 씨앗을 내어주고 숨을 거두는 듯하더니 다시 피어났다. 노란색 하얀색 분홍색 초록색, 가지각색의 생명들 위로 햇살이 내려앉았다. 옥상에는 여름 식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유독 마음이 쓰이는 목화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볕을 제일 많이 받는 곳에 자리 잡은 키가 껑충하고 윤기 나는 잎을 가진 목화꽃 한 송이가 지나가는 바람을 붙들어 흔들흔들 몸을 꺾는다. 키 큰 목화꽃이 몸을 흔들자, 그 밑에 줄기는 짤뚱만 하고 콩알처럼 작고 시든 목화꽃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늘진 곳에서 자라나 저래 볼품이 없나? 손가락 하나 들어 조심조심 쓰다듬는데 키가 큰 목화꽃이 또 몸을 흔든다. 그제야 그늘진 곳에 자라난 작은 목화꽃 위로 햇살이 스며든다. 그렇게 키 큰 목화꽃은 작은 꽃에게 노란 햇살을 내어주기 위해 끊임없이 제 몸을 흔들었다.





내일 마지막, 20화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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