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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주양 Nov 05. 2024

17. 너를 키우고 싶었다

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11월. 때 이른 눈이 내린다. 그것도 비가 섞인 진눈깨비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네.."


막연한 눈으로 뿌연 하늘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오늘은 지온이가 태어난 지 백일째 되는 날이다. 백일이 지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순하디 순한 나의 아기에게 기적은 따로 필요 없었다. 탄생 자체가 기적이기도 하고, 원하는 것만 들어주면 울음을 딱 멈추는 나의 지온이는 자면서도 생글생글 웃는 즐거운 아기이기 때문이다. 세 시간 간격으로 일어나 분유를 먹일 때에도, 목욕을 시키고 눕히자마자 황금변으로 이불 위에 그림을 그려놓아도 그저 기특하고 사랑스럽기만 하다. 그러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기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경순이와 나의 몸무게는 각각 오키로, 삼 킬로가 빠졌다. 돈 안 들이고 자동 다이어트까지 시켜주는 나의 지온이는 정말 효녀 중에 효녀다.


"이걸 다 어쩌지..."


내리치는 눈발 때문에 반쯤 감긴 눈으로 골몰해 본다. 나는 2주 전부터 치밀하고 촘촘하게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11월 28일은 쾌청한 날씨임을 일기예보에서 확인한 터라, 가든파티 콘셉트로 백일을 기념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이 내리고 있다. 차라리 함박눈이나 마른눈이면 좋으련만 축축하고 질펀한 진눈깨비라니.. 이름만 귀엽지 하는 짓은 온 바닥을 진창으로 만들어서 엔간히 사람 애를 먹이는 놈인데. 약이 올라 입술을 삐죽이면서 먹구름 아래로 빈틈없이 쏟아지는 을 노려보았다. 밤늦게 까지 옥탑방 외벽에 파티용 풍선과 반짝이 은박커튼, 컬링리본으로 장식을 하고, 빨랫줄과 겹쳐 색전구를 연결해 놓았다. 초대손님이라 해봤자 가을할머니, 서현이가 전부이지만 그래도 이웃들과 나눠먹을 수수팥떡이랑 백설기도 맞췄고. 소갈비, 유부초밥, 미역국, 잡채도 잔뜩 만들었다. 음식이야 이층 집이나 옥탑방에 들어가 먹어도 되지만 정성을 들여 꾸며놓은 화려한 파티장은 어쩌란 말인가. 다 뜯어서 이층으로 옮겨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입구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경순이와 눈이 마주쳤다.


"경순아 풍선이랑 다 뗄까? 이층으로 옮겨서 다시 꾸밀까?"


"눈은 곧 그친데..."


"그쳐도 기온이 확 떨어질 거니까. 지온이 감기 들면 어쩌라고."


"현조야.. 나랑 얘기 좀 하자."


테이블 위에 깔아놓은 노란색 식탁보를 탁탁 털어내면서 경순이 쪽을 흘깃 건너보았다.


"말해."


"저기..."


말끝을 뭉개고 서 있는 경순이가 이상해서 하던 일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다소 긴장한 듯 초조해 보이는 그녀가 두 손을 맞잡은 채로 눈을 감고 있다.


"왜 그래? 지온이 아파?"


"아니. 가을 할머니랑 책방 내려가있어.."


"아니 왜! 추워서 나오지 말랐잖아!"


"현조야.."


"왜 그래? 그런 표정 처음 보는데? 무서워지려 그런다... 야!"


"며칠 전부터 집 주변에 낯선 사람들이 책방을 훔쳐보는 것 같다고. 경찰에 신고한다고 했던 거 기억나?"


"응! 그 사람들 잡혔데? 경찰 왔어? 왜? 범죄자래? 여자들만 산다고 노린 거 맞지?"


"현조야. 우리 앉아서 얘기하자."


"왜 그래 진짜! 말해! 지금!"


늘 여유 있고 진지하더라도 심각한 적은 없었던 이경순은 몹시 불안해 보였다. 불안을 넘어 공포에 질린 창백한 얼굴. 무슨 일인지 예측할 순 없으나 신경다발이 팽팽하게 조여왔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경순이는 마른침을 삼키며 바람에 나부끼는 풍선 장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붉고 얇은 피부 위로 경순이의 손등뼈들이 두더지처럼 차례대로 튀어나오다 숨어버린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비비다가 포개어버리는 경순이를 주시해 보지만, 짐작이 되질 않아서 숨이 막히고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팔딱거리는 심장을 차분히 가라앉히면서 낮은 음성으로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경순아 눈 오니까,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자."


옥탑방에 철문을 열어 턱짓을 했다. 그러나 경순이는 발끝을 올렸다 내리면서 동전만 한 눈물을 뚝뚝 흘려 가슴께에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망부석이 된 그녀의 머리 위로 진눈이 닿자마자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지온이 친부가 왔어.."


경순이의 비장한 말을 듣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새벽 별을 보며 기도했던 백일의 소원은 진눈깨비처럼 땅에 떨어져 부서져버리는 건가. 나도 모르게 애달픈 신음이 흘러나왔다. 모든 피가 몸 안에서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백일 파티에 초대만 한 거지? 그 인간은 자격이 없는데? 너와 지온이를 버린 인간이잖아. 그지? 그래도 애 아빠니까 초대만 한 거지? 밥만 먹고 갈 사람인거지?"


잔뜩 등이 굽어진 경순이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경순아.. 경순아... 경순아... 그렇게 고개를 젓지 마. 죄스럽게 울지도 마. 무거운 짐이라도 진 것처럼 어깨를 굽히지 마.. 그 사람은 곧 갈 사람이고. 너와 지온이의 보호자는 나야. 그러니 당당하렴 경순아..'


나는 속으로 이런 구슬픈 애원들을 쏟아놓았다.


"처음에는 유부남인 줄 몰랐어. 알고 보니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헤어지려고 했는데... 지온이가 생겼어. 그걸 알게 된 그쪽 부모님이 나를 찾아왔어. 아내 되는 분도 찾아왔어. 머리채라도 잡고 뺨이라도 때릴 줄 알았는데. 무릎을 꿇고 아이를 낳아달라고... 키우게 해 달라고.... 그러면서 울었어. 진심으로 울었어..."


경순이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처럼 쉬지 않고 말하다가 이내 거칠어진 호흡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흥분이 고조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계약서를 주면서 부탁했어. 아내 되는 분이 아이를 못 낳는데. 정말 간절히 아이를 원한데. 목숨처럼 키워준데... 난 싸인을 했어. 그쪽 부모님들이 그러니까 지온이 친할머니, 할아버지가 아파트를 구해줬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편하게 살라고 했어.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 아파트도 돈도 준다고.. 그런데 다음날 도망쳤어. 우리 복실이때처럼 도망을 쳤어.."


"경순아..."


나의 눈과 손과 다리와 뼈와 심장과 창자와 육신을 만든 모든 세포들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눈밑은 전기에 오른 것처럼 파르르 떨리고 머리가 핑 돌았다.


"그렇지만, 현조야! 돈 때문에 싸인을 한 거 아니야! 아파트도 돈도 받을 생각 없어!"


"경순아! 변호사를 구하자! 변호사는 어디서 구하는 거지? 서현이... 서현이가 알 거야!"


다급하게 휴대폰을 찾으며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같은 자리를 맴도는 내 앞으로 다가온 경순이가 덥석 손을 잡았다.


"내가.. 현조야.. 내가.. 복실이를 죽였어.. 미안해.. 현조야 미안해.."


울먹이던 경순이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 아니야! 경순아.. 아니야! 지온이는 우리 아기잖아! 그지? 지온이는 우리 아기야! 그리고 복실이가 왜 죽어? 네 가슴에서 살고 있는데?"


내 말에 경순이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굳게 다문 입술틈으로 눈물이 우물처럼 고이다가 턱끝에서 떨어져 어딘가로 흘러가버렸다. 경순이의 눈물처럼 나의 지온이가 어딘지 모를 곳으로 흘러가 사라질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지만, 강하게 부정하며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좋은 분들이야. 나 만나고 난 그날 아기방부터 꾸몄데. 지온이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랑 한 집에서 살 거야. 복실이처럼 바다에서 혼자 사는 일은 없을 거야. 나처럼 외롭게 살 일은 없을 거야."


"나도 해줄 수 있어! 막노동이라도 해서, 지온이 남부럽지 않게 키울 거야! 경순아! 내가 할 수 있어! 아빠도 돼주고 엄마도 돼주고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다 돼줄 거야!"


"현조야. 우리 지온이 행복을 생각하자. 응?"


"그럼 나는? 나는? 나는 이 미친년아! 내가 못 산단 말이야!"


나는 발악을 하면서 엉덩이를 깔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있는 대로 비명을 지르고 발을 버둥거렸다.


"우리 복실이.. 목사님 말처럼 보내줬으면... 한 살이 되고 두 살이 되고 지금은 스물두 살이 되었을 거야.. 내가 쥐보다 더 못한 엄마지만, 본능으로 알아. 지온이가 친부에게 가야 행복하다는 걸. 많은 걸 보고 보다 넓은 세상을 걱정 없이 살아가게 할 거야. 지온이를 위해 보내주자.. 현조야. 그렇게 해줘."


"계모 밑에서 크는 거야! 계모라고! 계모! 몰래 때리면? 교묘하게 괴롭히면 어쩔 건데? 내가 그런 상상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 경순아.. 나는 못 살아. 나는 못 살아.. 경순아.. 제발 보내지 마.."


경순이 다리를 붙들고 무릎을 꿇었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면서 경순이 바짓가랑이를 흠뻑 젖혔다.


"현조야. 너는 너의 인생을 살아! 결혼도 하고! 사랑하고 사랑받아. 너의 시간을 살아.."


처음 보는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경순이에게 읇조리듯 말했다.


"경순아.. 나는.. 나는.. 애를 못 낳잖아.."


경순이가 시든 풀처럼 땅으로 아스라졌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다른 소리로 울었다. 나는 통곡을 했고. 경순이는 숨을 죽여 흐느꼈다. 그러나 몸의 떨림은 똑같았다. 전구선들은 다 떨어져 바람에 휘날리고, 벽에 붙어있던 풍선과 장식들이 설한풍에 하나둘씩 떨어져 재각기 다른 색으로 표표히 날아갔다. 불현듯 지온이를 품에 안고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나는 경순이를 떼밀고 벌떡 일어나 계단을 향해 내달렸다. 내려가다가 신발에 박힌 눈덩이에 미끄러져 넘어졌지만 상관없이 뛰어내려 갔다. 일층 현관에 도착해서 유리문을 밀고 나가보니 가을이 할머니가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고, 그 앞에는 검은색 세단이 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할머니.. 우리 아기 어디 있어요?"


훌쩍이면서 가을할머니를 향해 비틀대며 다가섰다. 그때 집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고급승용차에 뒷문이 열리더니 국화꽃처럼 생긴 여자가 눈시울을 붉히면서 내렸다. 휘청이는 걸음으로 다가와 등이 훤히 보일 만큼 허리를 굽혔다.


"우리 아기 어디 있어요?"


"죄송합니다. 정말 잘 키우겠습니다... 정말 정말 사랑하겠습니다."


잔뜩 고개를 숙인 여자의 떨리는 음성은 빗발치는 진눈깨비 사이를 뚫고 귓전에 내리 박혔다. 잠시 후, 앞 좌석에서 신사모를 쓴 점잖게 생긴 노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그 노인이 시선을 피할 만큼 노려보았다. 눈발은 더 거세졌고 숨이 막힐 만큼 얼굴을 덮쳤다.


"내가 키웠어요. 이름도 지었고. 매일 목욕도 시켰고. 세 시간마다 우유 먹였고. 변 색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새벽이라도 병원으로 뛰어갔어요. 지온이 옆에서 자는 것도 나예요! 지온이 숨소리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새벽에라도 벌떡 일어날 수 있어요? 그루잠을 자는 지온이를 재워 줄 수 있어요?"


나는 머리를 흔들어가며 고함을 질렀다. 그때, 뜨거운 손길이 내 어깨를 꽉 붙잡았다.


"현조야.. 우리 지온이 출생신고도 못했어..."


그 말에 나는 얼음처럼 굳어져 버렸다. 물기를 머금은 드센 진눈깨비가 시야를 가려 아릿해졌다.


"인사하고 보내주자."


경순이는 엄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엄마에게 끌려가는 꼬맹이처럼, 떼를 쓰다 지친 어린애처럼 경순이 손에 잡혀 차 앞으로 끌려갔다. 열려있는 창문 사이로 히터의 훈풍이 불었다. 슬쩍 내려다본 뒷 좌석에는 연세 지긋한 노년의 여성이 곤하게 잠든 지온이를 안고 있었다.


"현조야, 인사하자..."


경순이의 권유에도 나는 뿔이 난 꼬마처럼 요지부동 꼿꼿하게 서서 잠든 지온이만 애처로이 바라보았다. 심장을 망치로 내려치는 것 같고, 창자가 찢어질 듯 고통스럽다. 분명, 내 몸에는 자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랫배가 조여오듯 통증이 밀려왔다. 시야를 가리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흐려지고 겹쳐 보여 아렴풋해지는 나의 아기를, 아까운 나의 지온이를 눈에 담으려 욕심을 부렸다.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흘러내렸다. 닦고 또 닦아 보아도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지온이를 조금이라도 더 보아야 하는데. 아까운 나의 아기를 담아야 하는데. 아기를 키울 자격도 능력도 힘도 없는 무능한 눈물이 지온이를 가렸다.


"지온이 감기 들겠다. 응?"


경순이가 한번 더 작별을 권했다.


"너는 거짓말쟁이야! 너는 사기꾼이야!"


경순이의 가슴팍을 밀쳐내면서 빽 소리를 지르고 책방으로 들어왔다. 차오르는 눈물을 막아보려 애를 쓰지만 고장 난 하수처럼 울컥울컥 역류하며 솟구쳤다. 카운터밑으로 등을 지고 쪼그려 앉아 지독한 절망을 토해냈다. 누군가 내 목을 꽉 조르는 느낌이다. 숨이 쉬어지질 않아 한참을 헐떡였다. 그때, 문 밖에서 부릉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지온이가 나를 부른다.


"지온아!"


소스라치게 일어나 책방 문이 부서질 만큼 밀치고 나갔다. 승용차는 지온이의 울음소리를 안고 저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난 계절에 태어난 여름 아기를 향해 뛰었다. 몇 번을 미끄러져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 달려갔다. 곧이어 주춤주춤 차의 속도가 느려졌고, 이내 멈췄다. 뒷문이 열리더니 그 여자가 내렸다. 나의 지온이를 안고서.


"잠깐만.. 아.. 잠깐만요.. 아... 지온아..."


눈물로 범벅이 된 입술을 간신히 달싹이며 어기적 어기적 다가섰다. 여자는 내 품에 지온이를 안겨줬고 머리 위에 우산을 씌어줬다. 지온이가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손 싸게를 한 작은 손을 휘저으며 내 눈물을 닦아주려 한다. 끙끙 거리는 강아지 소리로 사랑을 고백하는 아기를 애써 만든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하하하, 웃었다. 지온이가 까르륵 좋아하는 하하하, 너털웃음으로. 다시는 보지 못할 여름장미처럼 붉은 입술과 배꽃처럼 하얀얼굴을 눈으로 저장하고 가슴에 담았다.


"지온아.. 나는 어떻게 살지? 너를 보내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겠어. 좀 알려주라.. 지온아.."


뜨거운 눈물이 지온이 뺨 위로 떨어졌고 아기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우산을 씌어주고 있던 여자가 지온이 얼굴에 차가운 눈발이 닿지 않도록 손으로 가려줬다. 매우 곱고 작은 손이었다. 흔한 반지 하나 끼지 않았고, 맨손톱은 정갈했다. 나는 눈을 들어 여자를 지긋이 바라봤다. 맑은 눈을 가진 여자의 눈과 어깨와 등과 머리가 잔뜩 젖어있었다.


"내 이름은 문현조야! 문현조! 절대 잊으면 안 돼. 알았지? 너는 지혜롭고 따뜻한 아이. 지온이야! 잊으면 안 돼. 내 이름은 문현조야 문현조! 네 이름은 지온이야! 잊지 마! 잊지 마!”


그리고 순적하게 지온이를, 손이 곱고 온몸이 젖어있는 여자 품으로 돌려줬다. 차에서 내린 노인이 지온이를 안은 여자에게 우산을 씌어줬고. 여자는 자박자박한 걸음으로 차 안으로 들어갔다. 곧 문이 닫혔고, 차에 시동과 함께 지온이가 울었다. 주홍색 불빛이 얼굴만 하다가 주먹만 해졌고,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지온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 잊으면 안 돼. 잊으면 안 돼! 내 이름은 문현조야! 너의 이름은 지온이야... 잊지 마.."


허공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주저앉아 가슴이 저미도록 울었다. 진눈은 싸라기눈이 되더니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해 거리 위에 소복하게 쌓였다. 지온이를 태운 자동차가 남긴 두 개의 선을 손갓을 쓰고 응시하면서 속으로 말했다. 나는 너를 키우고 싶었다고.




다음날,


지새는 달을 보며 밤을 새우고 김밥을 싸고 있다. 오늘 나는 경순이와 놀이동산을 가려한다. 사실 지온이를 보내고 이경순과 작별하려 했다. 그런데 어제 주저앉아 울고 있는 내게 가을할머니가 다가와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현조야. 조금만 경순이를 헤아려주렴. 몸누일 곳 하나 없는 길고양이 같은 그 아이를 나 대신 네가 좀 품어주련... 부탁할게.."


그 순간, 시장에서 생선을 팔던 등이 굽은 경순이 할머니 얼굴이 가을할머니에게 겹쳐 보였다. 나는 너무 놀라서 눈물을 멈추고 가을 할머니를 빤히 응시했다.


"아! 김밥 더럽게 안 싸지네!"


개수대 안으로 대나무김발을 내던지며 인상을 구겼다. 그러자 뒤에서 조용히 서성이던 경순이가 주춤거리며 다가섰다.


"이경순! 김밥은 안 되겠다! 그냥 사 먹자!"


"내내가 만들게!"


"됐어! 생때같은 자식 떼놓은 년한테 김밥 만들라는 친구는 없어!"


경순이의 얇은 어깨가 솟아나고 고개는 밑으로 떨어졌다. 마치 얼굴이 없는 사람 같았다.


"뭐 해! 옷 입어! 롯데월드 가자! 어릴 때 가고 싶어도 돈 없어서 못 갔잖아!"


어수선한 주방을 그대로 둔 채 경순이와 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잠실역으로 가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표를 끊고 한적한 놀이동산을 돌아다녔다. 표정 없이 머리띠를 사서 쓰고는 무슨 맛인지 모르겠는 추로스를 사 먹었다.


"바이킹 타자."


"바이킹?'


"기억 안 나? 바이킹, 한 맺혔던 거?"


"아.. 장은혜.."


공기놀이를 사명처럼 하던 열두 살. 그날도 5학년 3반 교실 한쪽 구석에서 경순이와 열심히 공기놀이를 하는데.


"촌스럽게 요즘 누가 공기놀이?"

"살 수 있는 장난감이 공기라서?"


장은혜 무리에 빈정거림을 우리는 여태 기억하고 있다.


"우리 아빠 해외 출장 다녀온 기념으로 롯데월드 갔었어. 바이킹을 열 번은 넘게 탔지 뭐야?"


길고 웨이브진 머리칼을 찰랑이며 으스대는 장은혜를 부럽게 바라보던 경순이가 우리 커서 돈 많이 벌면 바이킹 타러 가자, 속삭였다. 마흔이 넘어서 우리는 바이킹을 타러 롯데월드에 왔다. 한 명은 아랫배에 있어야 할 자궁과 난소와 나팔관을 다 도려내고. 또 한 명은 살점 같은 자식을 떼어내고. 바이킹에 외로운 몸을 실었다. 우리는 겁도 없이 맨 뒤에 앉았다. 곧 커다란 배는 공중을 좌우로 가르며 항해했고, 약속이라도 한 듯 경순이와 나는 풀어헤친 머리카락으로 눈을 가리고 얼굴을 숙였다. 그리고 뒤에 앉은 어린 커플은 이마와 뺨을 닦아내면서 연방 같은 말을 했다.



"자기야.. 비가 오나 봐..."


"그런데.. 실내에서 왜 비가 내리지?"





다음 편 18화, 깨어진 유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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