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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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아기가 떠난 다음날, 지새는달을 보며 밤을 새웠고, 지금 나는 김밥을 싸고 있다. 경순이와 놀이동산을 가려한다. 사실 지온이를 보내고 이경순과 작별하려 했다. 그런데 어제 주저앉아 울고 있는 내게 가을할머니가 다가와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현조야. 조금만 경순이를 헤아려주렴. 몸 누일 곳 하나 없는 길고양이 같은 그 아이를 나대신 네가 좀 품어주련. 부탁할게.”
그 순간, 시장에서 생선을 팔던 등이 굽은 경순이 할머니 얼굴이 가을할머니에게 겹쳐 보였다. 그래서 경순이를 다시 받아들였다. 경순이를 쫓아냈다가는 죽은 경순이 할머니가 끈질기게 따라다닐 것만 같았다. 그건 아니고, 사실 경순이는 여름 아기와 연결된 끈이다. 설마 친모인데, 한 달에 한번이라도 지온이를 보내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 있다. 그리고 지온이가 선택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재판을 걸어서라도 다시 데려올 것이다. 그런 계획을 세우니, 무너졌던 성을 다시 세울 힘이 생겨났다.
“아! 김밥 더럽게 안 싸지네!”
개수대 안으로 대나무 발을 내던지며 인상을 구기자, 뒤에서 조용히 서성이던 경순이가 주춤거리며 다가섰다.
“김밥은 안 되겠다! 그냥 사 먹자!”
“내가 만들게!”
“됐어! 생때같은 자식 떼놓은 년한테 김밥 만들라는 친구는 없어!”
경순이의 얇은 어깨가 솟아나고 고개는 밑으로 떨어졌다. 마치 얼굴이 없는 사람 같았다.
“뭐 해! 옷 입어! 롯데월드 가자! 어릴 때 가고 싶어도 돈 없어서 못 갔잖아!”
어수선한 주방을 그대로 둔 채 경순이와 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잠실 역으로 가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표를 끊고 한적한 놀이동산을 돌아다녔다. 표정 없이 머리띠를 사서 쓰고는 무슨 맛인지 모르겠는 츄러스를 사 먹었다.
“이경순, 바이킹 타자.”
“바이킹?”
“기억 안 나? 바이킹, 한 맺혔던 거?”
공기놀이를 사명처럼 하던 열두 살. 교실 한쪽 구석에서 경순이와 열심히 공기놀이를 하는데,
“촌스럽게 요즘 누가 공기놀이? 살 수 있는 장난감이 고작 저거라서?”
소윤혜 무리에 빈정거림을 우리는 여태 기억하고 있다.
“우리 아빠 해외 출장 다녀온 기념으로 롯데월드 갔었어. 바이킹을 열 번은 넘게 탔지 뭐야?”
길고 웨이브 진, 머리칼을 찰랑이며 으스대는 소윤혜를 부럽게 바라보던 경순이가 속삭였다.
“현조야 어른 돼서 회사원 되면, 바이킹 타러 가자.”
그래서 우리는 바이킹을 타러 롯데월드에 왔다. 둘 다 회사원은 되지 못했지만, 어른은 되었으니까. 한 사람은 아랫배에 있어야 할 것들을 모두 도려냈고, 또 한 사람은 살점 같은 자식을 떼어낸 채, 외로운 몸을 바이킹 위에 실었다. 우리는 겁도 없이 맨 뒤에 앉았다. 곧 커다란 배는 공중을 좌우로 가르며 항해했고,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는 풀어헤친 머리카락으로 눈을 가렸다. 우리 뒤에 앉은 어린 커플은 이마와 뺨을 닦아내면서 연신 같은 말을 내뱉었다.
“자기야 비가 오는 것 같아.”
“그래? 하지만 여기는 실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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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르륵, 탁.
문이 닫히는 소리에 설핏 들었던 잠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오후 6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잠깐 엎드려 있다가, 옆에 놓아둔 지온이가 쓰던 베개를 안고 현관문 밖으로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 일층에 도착하니, 뿌옇게 김이 서린 밀면 가게 안은 사람들 소리로 왁자지껄했다. 예영이와 경순이의 웃음소리가 가게 밖까지 흘러나왔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밀면 가게 앞을 재빠르게 지나 책방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걸어 잠그고 데스크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는 가지고 온 조그마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엎드렸다. 옆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책방과 밀면 가게를 나누는 가벽을 주먹으로 내리칠까 고민하다가, 결국 아기 베개에 얼굴을 완전히 파묻어버렸다.
“씨이....짜증나게....”
계속 선잠을 잔다. 꿈도 너무 많이 꾸고. 가끔은 현실과 꿈의 경계를 착각하기도 한다. 일어나 있으면 졸리고 누우면 잠이 오질 않는다. 수면제를 처방 받아야 하나 고민 중이다. 베갯잇에 코를 박고 깊게 들이마시다가 꿀꺽 삼킨다. 손수 만든 작고 노란 아기의 베개. 딸랑이도 이불도 목욕가운도 직접 만들었지만 베개를 만들 때 제일 심혈을 기울였다. 목화씨에 붙어있는 솜을 하나하나 분리해 구름처럼 뭉친 후, 부드러운 헝겊으로 감싸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바느질하여 인견천으로 호청을 만들어 씌웠다. 귀여운 숨으로 새근새근 잠에 들던 아기가 배던 베개. 향기가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 내일이면 완전히 사라지겠지. 어쩌면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기가 떠난 지, 일 년이 지났는데, 어찌 체취가 남아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맡을 수 있다. 내일이 되고 또 내일이 되면 지온이의 향기는 다시 살아나 코로 눈으로 심장으로 파고들 것이다. 아마도 그리움이 향기가 되었는가 보다. 그리움이 사라지지 않는 한, 지온이의 체취도 여전할 것이다. 가만히 엎드려 생각했다. 베개를 만들고 남은 씨앗을 어찌했는지. 맞아, 옥상화단에 심었었지. 7월 하순 과일나무가 열매를 맺고 여름 장미가 피어날 때. 노란색 분홍색 하얀색으로 피어날 목화 꽃을 한 살 생일에 보여주려 심었었지. 씨앗을 화단에 심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지온이가 떠난 뒤, 이따금씩 담벼락이 높은 그 집 앞을 찾아가곤 한다. 짙은 푸른색 대문을 가만히 응시하기도. 이층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기도 한다. 그런 도둑방문은 지온이가 떠나고 일주일 뒤 시작되었는데, 적어도 한 달에 한번은 그 집에서 지온이를 보내주지 않을까 했던 기대가 무너지면서 찾아가는 횟수가 늘어난 것이다. 경순이는 지온이의 이름조차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래서 이렇게 스토커 짓을 하게 되었다. 겨울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되고. 아기가 떠난 계절이 일 년 만에 돌아왔음에도. 우연은 단 한 번도 지온이를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기도했다. 제발 단 한 번만 아기를 보게 해달라고. 그런데 그렇게 매정하게 굴던 우연은 어제 나에게 작은 틈을 내어주었다. 오늘도 아기 얼굴을 못보고 가나, 실망하며 돌아서려던 그때. 은색 승용차가 그 집 앞에 멈추더니 양복을 입은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었고. 손이 곱던 그녀가 풋낯으로 나의 지온이를 품에 안고 내렸다. 풍성해진 검은 머리칼에 분홍색 리본 핀을 하고, 떠날 때보다 많이 컸지만 나는 단번에 여름 아기를 알아볼 수 있었다. 뭉근한 겨울 햇살이 여자와 아기에게 조명처럼 내려앉았다. 그녀는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고 다정하게 아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의 천사.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 나를 웃게도 울게도 만드는 심장의 주인, 지온이가 그녀를 바라보며 낭창낭창한 음성으로 엄마! 라고 불렀다. 아.... 그 순간 심장이 스올처럼 깊은 낭떠러지로 쿵, 떨어지고 말았다. 기묘한 감정과 충격이 정신과 육체를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흔들리는 하체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자는 지온이가 좋아하는 ‘하 하 하’ 너털웃음을 흉내 냈고. 지온이는 까르륵 웃었다.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은 높은 담벼락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땅 거미가 질 때까지 무릎을 세우고 멍하게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이별이구나. 진짜 이별이구나. 이게 현실이구나.....”
그런 말들을 혼자 내뱉으면서 평창동의 높은 언덕을 내려왔던 것 같다. 그렇게 지온이와 두 번째 이별을 하고 돌아와 경순에게 소식을 전했다. 지온이가 그 여자에게 엄마, 라고 불렀다고. 정말 사랑받고 있다고. 얼굴에서 사랑이 보인다고. 자신 있는 눈빛과 그늘 없는 표정이 받고 있는 사랑을 증명한다고. 그런데 왜 이리 마음이 헛헛한지 모르겠다고. 그 여자가 내 웃음소리를 따라 한다고. 그건 내거였다고.
“다행이네.”
경순이는 저녁 장사에 필요한 재료들을 다듬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다 잊었으면 좋겠네. 라는 말도 덧붙였다.
“너 정말 지온이가 우릴 다 잊었으면 좋겠어?”
“응.”
뻔뻔한 이경순의 대답에 기가 막혔다. 나는 철저하게 반대다. 지온이가 나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고. 기억해줬으면 싶다. 지온이가 조금이라도 불행해 보이면 훔쳐 올 생각이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러려고 했다. 그날, 여자와 지온이를 보기 전 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일 년 만에 만난 아기 얼굴에서 보이는 안전함과 여자가 아기를 바라보는 눈동자에서 나는 무언가를 보았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제 그 둘은 모녀사이가 되었다는 걸. 둘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래서 이젠 훔쳐오는 상상도 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현조야 이젠 안방 치우자.”
지온이 방으로 꾸며놓았던 안방은 일 년 째, 그대로다. 아기가 떠나고 무엇 하나 건들지 않았다. 이불에 토한 자국까지 그대로 두었다. 경순이도 나도 안방 문을 열지 않는다. 안방 문을 열면 지온이가 작은 발로 장난을 치며 누워있을 것 같아서. 배꽃처럼 예쁘게 웃으면서 안아 달라 손을 뻗을 것만 같아서. 안방의 문을 열지 못한다.
“벌써 일 년이 지났어. 이젠 너도 마음 좀 다 잡아.”
우리의 바람은 다르지만 마음은 같을 것이다. 달이 뜨는 밤이면 가슴을 치는 소리가 경순이 방에서 들리고. 나는 거실 벽에 기대어 안방을 바라보며 울고 있으니까.
“현조야. 이젠 안방 치우자고.”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그럴 수가 없다. 언젠가는 치우는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는, 머리가 뜨겁고 눈시울이 따갑고 턱 끝이 떨릴 것이다. 지온이가 남기곤 간 백일의 흔적은 밤이고 낮이고 상관없이 나락 같은 슬픔에 빠지게 할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안방을 치우지 않을 것이고, 그 문도 열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흘러 아기의 토한 자국과 옷가지들을 매만지며 그저 그런 호젓함만 느끼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그때까지 나는 충분히 아플 것이다. 나의 상실을 애도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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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장사를 마친 경순이가 책방 안으로 얼굴을 배꼼 들이밀었다. 화장을 한 건지, 화사해 보인다. 나는 다급하게 안고 있던 지온이의 베개를 숨긴다. 데스크 아래에서 아기의 베개를 만지작거리면서, 경순이의 얼굴을 피했다.
“현조야 나 어때? 예영이가 화장 해줬어.”
수줍게 화장한 얼굴을 자랑하는 이경순을 보자 괜히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나 약속 있어서 나갔다 올게.”
과한 볼터치와 핑크색 립스틱 그리고 한껏 멋을 낸 옷차림. 요즘 들어 경순이의 차림새와 모양새가 미심쩍다. 애를 둘이나 낳고도 봄 처녀 같은 그녀가 탐탁지 않다. 애기 엄마면 애 엄마답게 굴 것이지. 이런 내 심술 역시 마뜩찮다. 옅은 한숨을 내쉼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녁장사도 끝났고, 너는 나가자해도 안 나갈 거고. 그냥 바람이라도 쐬려고.”
“바람 쐬는 것 치고는 너무 꾸몄는데?”
기다렸다는 듯 쏘아붙였다.
“꾸민 티가 좀 나니?”
빈정거림을 칭찬으로 알아들은 이경순은 코트 아래 하얀색 린넨 원피스 자락을 살포시 잡으며 웃었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면서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예영이 신랑이랑 밥 먹고 있는데, 건너가서 먹지.”
“입맛 없어.”
“너 살이 너무 빠졌어. 그럼 콩물 갈아 놨으니, 집에 올라 갈 때 가져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도둑고양이처럼 눈치를 살피는 이경순 모습이 보기 싫어, 다시 엎드려버렸다. 곧 짤랑, 종소리를 남기며 조용히 문이 닫혔고, 경순이가 뿌린 촌스러운 향수 냄새만 역하게 남아 신경을 건드렸다.
“아악!”
고함을 지르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데스크위에 미니 선풍기를 강으로 틀어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씩씩거렸다. 마흔도 안돼서 갱년기라니. 자궁을 적출한 여성이 겪는 비애다.
“어제도 열두 시 넘어 들어와서는. 또 나가? 미쳤네. 미쳤어.”
제 작년부터 맞은편 건물 상가에서 공사를 하더니, 일본향취 물씬 풍기는 초밥집이 생겼다. 서부 이촌동을 휘어잡고 다니던 이경순은 때를 놓치지 않고 초밥집 사장과도 오빠동생 사이가 되었다. 종종 검은색 요리 복을 입은 잘생긴 젊은 남자가 점심을 먹으러 왔는데 초밥집 사장이냐 물었더니, 직원이라고 답했다. 밀 면을 점심 저녁으로 사 먹으로 오던 남자. 밀 면을 먹는 건지, 이경순을 먹는 건지 모를 그의 심상치 않은 눈빛, 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예영이도 가을 할머니도 확성기 삼총사도 눈치를 챌 정도다. 둘이 마주 서 있으면 옥시토신이 마구 뿜어지는 게 백 미터 전방에서도 느껴졌다. 나만 빼고, 모두들 초밥 집 직원과 이경순을 엮어주려는 눈치였다.
“아악! 열 받아!”
다시 한 번 표독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얼굴이 벌게진 채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책방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요즘 나는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질 못한다. 밀면 가게에선 예영이와 그녀의 나이 든 신랑이 뒷정리를 하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고개를 돌리고는 재빨리 식당 앞을 지나 이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치지직’ 뜨거운 주전자에 물 붓는 소리가 들린다. 울화가 치밀어 올라 발을 동동 굴리다가 싱크대에 발가락을 찧어 악,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웅크린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끙끙거렸다.
“이경순, 이경순!”
두 손으로 발을 감싼 채로 안방 쪽으로 구겨진 얼굴을 들었다. 찌르르 전기가 흐른다. 곧 숨통이 조이고 무언가가 울컥 쏟아지려 한다. 이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눈물을 털어버렸다. 난 아직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엄마라는 년이 저럴 수가 있지? 제 멋대로 내 인생에 들어와서 슬픔만 떠안기고. 지는 어린 남자랑 좋다고 시시덕거리는 천하의 몹쓸 년. 하다 보면 더 한 욕도 나올 것 같아서 울분을 삭이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끌고 계단을 내려와 일층 현관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비가 이틀째 보이지 않는다. 작년에 새끼를 낳으면서 바로 중성화 수술을 해줘서 발정기도 아닌데, 밤이면 돌아오던 녀석의 외출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참내, 자식들은 남 주고 아주 신바람들 나셨네.”
눈살을 찌푸리면서 책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혹시 나비가 들어올까 싶어, 문은 반쯤 열어두었다. 전날부터 하루 종일 비가 와서 꿉꿉한 기운이 책방 가득 퍼졌다. 히터를 틀어 온몸에 덕지덕지 들러붙는 습기를 떼어냈다.
“이경순같은 습기!”
하아.... 또다시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해진다. 한강이나 갈까? 걷기엔 무릎이 아프다. 게다가 한강은 지온이와 함께 걷던 길이다. 하긴, 그 아이와 함께 걷지 않은 길이 어디 있겠는가. 요즘 나는 한 시간 이상, 한 자리에 머무르질 못한다. 책방에 있다가 이층집으로 올라갔다가, 고수부지로 나가려다 다리 중간에서 집으로 돌아온다. 책 한 장도 넘기지 못하고, 드라마도 몇 분 보다가 꺼버린다. 아무것도 재미없고, 의미도 없다. 그저 무기력할 뿐이다. 소파에 등을 깊숙이 기대고 앉아 천장을 올려보았다. 차창으로 스며든 네온사인이 천장 벽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우리 아기 햇살모빌, 참 좋아했는데.”
또 눈물이 난다. 단단히 고장이 났다. 마지막으로 훔쳐 본 지온이는 많이 낯설었다. 지온이는 더 이상 나의 여름 아기가 아니었다.
“정말 다 잊은 거니? 그렇게 잊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왜 다 잊은 거니?”
미련한 박현조, 이제는 지온이까지 원망하려고 시동을 건다. 어떡해야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을까? 코를 훌쩍이면서 라디오를 틀었다.
“이번 곡은 노리플라이에 그대 걷던 길.”
디제이에 곡 소개와 함께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가끔 시간이 멈추길 바라. 너의 생각에 잠기게 되면 한참을 걷잡을 수 없어 힘이 들어. 내 마음속 그 어딘가에 숨겨둔 아득했던 시간의 끝에. 우리 언젠가는 잊혀 지겠지. 그대 걷던 길로 난 늘 같은 길로만 걷네.]
가슴이 저며 온다. 저 곡을 쓴 사람은, 그래도 함께 걷던 길을 혼자서도 걸을 수 있나 보다. 나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데. 감고 있는 눈꺼풀을 뚫고 눈물이 펑, 하고 터져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힘들어 죽을 것 같다. 지온이가 미치도록 보고 싶을 뿐이다. 경순이도 지온이도 모두 자기의 길을 걸어간다. 나만 홀로 남겨둔 채로. 나를 줄곧 괴롭히던 속상한 감정은 소외감이었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웃고. 아무렇지 않게 떠들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데. 나는 계속 아프고. 못 걷겠고. 못 자겠고. 못 웃겠다. 나 혼자만 다른 기분이다. 이제는 아무도 나와 같이 울어주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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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조야! 현조야?
누군가 어깨를 흔들며 이름을 부른다. 뻐근한 눈을 비비며 일어나니 경순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찾았어. 얼마나 걱정했는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밖을 내다보니, 어스름이 내려앉은 캄캄한 밤이 되었다. 아득한 눈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다르랑 다르랑, 지온이의 코 고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다가 볕의 그림자처럼 잠시 비추고는 이내 사라져버린다. 몸을 돌려 스탠드를 켜는 경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 꿈을 꿨어.”
경순이가 말없이 나를 돌아본다.
“지온이를 낳는 꿈. 그래서 내가 키우는 꿈. 꿈은 절대 이루어지질 않지. 아니면 반대이던지.”
경순이는 데스크 안으로 들어가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어두워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책상 위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는 걸 보면서 덧붙여 말했다.
“나쁜 꿈은 현실이 되고, 좋은 꿈은 절대 이루어지질 않아.”
꿈처럼 내 인생도 그렇다. 간절히 갖고 싶은 것, 처절하게 원하는 건 절대 주어지질 않는다. 신은 무심하다. 이렇게 치열한데, 이정도면 불쌍해서 하나는 주겠다. 억울하다. 슬프고 분하다.
“나 집에서는 안방 쪽으로는 지나가지도 못하고. 한강도 못 나가. 지온이 생각나서. 너무 아프고 사무쳐서 아무것도 못해.”
“그러니까 왜 그러는데.”
백지 같은 표정일 것이 분명한 이경순의 덤덤한 물음이 쓰라린 염장에 소금을 뿌린다.
“왜냐고? 왜냐고 물었냐? 야! 내가 모를 줄 알아? 너 요즘 남자 만나지? 초밥 집 알바생! 그 핏덩이를 남자라고 만나냐?”
“왜 안 되는데. 나는 사랑을 하는 건데.”
“사랑? 기가 찬다. 너는 참 사랑이 쉽다.”
“현조야 나는 우리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남들처럼 사랑하고. 사랑받고. 가정 이루고. 평범하게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왜 안 되는 건데? 왜 우리는 평범하게 사랑하고 살면 안 되는 건데?”
분노는 눈덩이 같다. 굴리면 굴릴수록 거대한 산사태를 일으킨다.
“너는 부끄럼도 없냐? 수치도 몰라?”
지온이를 보내고 365일 동안 참고 참았던 슬픔은 재난이 되었다.
“평범하게 살아? 이경순 네가?”
그리고 나의 교만은 생각보다 크고 위험했다.
“아무리 본데없이 자랐어도 현실을 직시해.”
분노는 마중물 같은 거였다. 한 바가지에 미움으로 폭포수처럼 많은 저주를 쏟아버린다.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팔아버린 년이. 평범?”
끝내, 내 추악한 손은 우리의 레몬사탕이 든 유리병을 집어 바닥으로 던져버렸다.‘쨍그랑’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노란 사탕들이 날카로운 파편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너는 절대 행복하게 못 살아. 태생이 그래.”
분은 아무리 내도 풀리지 않은 실타래처럼 엉켜 오물 같은 것들을 쏟아 붓고 나서야 끝을 내버린다.
“당장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바닥에 주저앉아 작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경순이를 남겨두고 책방을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으나 한강변 반대방향으로 무조건 뛰어갔다. 용문시장을 지나 효창공원을 넘어 공덕 역으로 건너갔다. 이경순이 있는 곳에서 되도록 아주 멀리 벗어나려 무조건 내달렸다. 처음부터 받아주는 게 아니었다. 지하철 계단에 저 애를 버리고 왔어야 했다.
“너는 내 인생을 망쳐버렸어....”
마포 대교를 건너며, 언제 꿨는지 모르겠지만, 내용만은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 꿈을 생각했다. 끝없이 높고 가파른 유리계단을 오르는 꿈.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바닥에 금이 가고 박살이 난 유리계단 꿈.
“예지몽이네. 내 미래는 유리계단이네.”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걸었다. 한강공원에 앉아서 시시덕거리는 연인을 구경하다가,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부를 발견하고는 일어나 여의도 증권가로 나왔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구겨진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나온다. 근처 찜질방으로 들어갔다. 배가 고프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우나 비용을 내고 나니, 딱 2천 원이 남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으슬으슬 한기로 가득 찬 몸속에 따뜻한 피가 돌기 시작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뜨거운 욕조 물 하나에 그런 마음이 사라지다니. 참,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 그래도 배는 고프지 않다. 눈을 감고 욕조 벽에 머리를 기댔다. 참방 참방 물 위로 퍼지는 은은한 소리와 함께, 마음속 소란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지온이가 떠난 뒤, 나는 쉬지 않고 달려온 것 같다. 감정을 계속해서 써대다 보니, 완전히 소모된 기분이다. 너무 괴로워서, 경순이도 지온이도 없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아무래도 내일 짐을 싸서, 당분간 상주 집에 내려가 있어야겠다. 경순이와는 잠시 떨어져 지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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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5시,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찜질방에서 나왔다. 성모병원 앞에서 두유 한 병을 입에 물고, 버스를 탔다. 전자상가 앞에서 내려서 집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데, 불현 듯 어제 경순에게 쏟아낸 악독한 말들이 떠올랐다. 조금씩 아침의 해가 강렬해지면서 깨달음 비슷한 감정과 후회가 떠 밀려온다.
“애를 팔았다니, 죽였다니. 그 말은 선 넘은건데....”
목 늘어난 후드 티에 무릎 나온 츄리닝 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군중들 사이에서 고뇌에 찬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모양새는 딱 봐도 정신 나간 여자 같다. 번듯한 차림새의 사람들 시선이 따갑다. 팔짱을 끼고는 어깨를 잔뜩 굽은 채로 이촌 소방서 앞을 지나쳤다. 중산 아파트 사이로 들어오니, 이성이 좀 더 또렷해졌다. 어제 속상한 마음에 찜질방에서 허 여사에게 전화를 했었다.
“정신 차려! 지온이가 네 자식이야? 무슨 권한으로 판단인데? 아무리 아파도 경순이보다 아플까. 너는 지온이가 널 잊지 않았으면 하지? 경순이는 지온이가 다 잊고 행복하기만 했음 하고. 그게 엄마 마음이여! 너 지온이 태어나고 하는 꼬라지가 딱 집착발광수준이었어.”
그러고 허여사의 맺음말은 사과 농장하는 남자 만나보라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당분간 상주로 전화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일 년 전 롯데월드에서 바이킹을 타며 미친 여자들처럼 울고 나서 경순이가 했던 말이 부표처럼 떠올랐다.
“현조야. 나는 네가 좋은 남자 만나서 가정 이뤘으면 좋겠어. 나도 너도 평범하게 살면 좋겠어. 오늘은 신랑 저녁 반찬 뭐할지 걱정하고. 동네 아줌마 흉보고,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남편 어떻게 잡을지 의논하고. 그런 거 말이야. 지온이는 언젠가는 다시 만날 거야.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자. 지온이 다시 만나는 날, 자랑스러운 어른이 되어 있자.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할머니 만나면, 경순이 잘 살다가 왔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 말을 해주고 싶어.”
그런 너에게 나는 알겠다고 약속을 했다. 지온이 만나는 날까지 잘 살아내자고, 자랑스러운 대모와 엄마가 되자고 약속을 했다. 굳게 다짐을 하고 돌아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나였다. 너는 어쩌면 지온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웃고, 최선을 다해 일을 하고, 최선을 다해 행복해지려던 거였다. 욕심을 부리고 미련을 떨고 현실을 직시 하지 못했던 건 나였다. 내 어줍잖은 결핍을 채우려고 지온이와 너를 이용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 왜 깨달음은 이렇게 사고를 치고 나서야 찾아오는 걸까?
“현조야, 너의 슬픔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면 털어버릴 수 있는 거지만, 경순이의 슬픔은 아무리 털어내려 발버둥을 쳐도 떨어지지 않는 거야. 그래서 마음껏 울지도 못하는 거야.”
허 여사가 해준 조언이 이렇게 뒤늦게 뇌리에 박힐 줄이야. 진정 미친년은 나였던 것이다.
*
한숨을 폭폭 쉬면서 집 앞을 서성이고 있다. 동네에 도착한 지는 한참 되었는데, 선뜻 집에 들어가질 못하고 어슬렁거리고 있다. 길 건너 성촌공원을 세 바퀴 정도 돌고, 음악에 맞춰 에어로빅을 하는 어르신들을 구경하다가, 트럭에서 파는 사과 한 봉지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사과봉지 내밀면서 사과할게, 하면 내가 아는 경순이는 분명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어 버릴 거다. 저만치 가게가 보인다. 이 시간이면, 경순이가 가게 앞을 빗자루로 쓸고 커피 한잔 마시고 있을 거다. 뽀얗게 김이 서린 밀면 가게 유리창에 ‘미안해 내 사과를 받아도’라고 쓸까? 고민하며 다가섰다. 그런데, 가게 앞에 다가설수록 낯선 느낌이 들었다. 뿌옇게 김이 서려 있어야 할 밀면 가게 유리창이 투명했다. 부리나케 다가가서, 유리문을 밀었다. 잠겨 있었다. 문을 몇 번 밀었다 잡아당기면서 유리창 사이로 식당 안을 건너보았다. 의자는 식탁 위에 거꾸로 올려져있었고, 가스레인지 위엔 육수를 끓였을 들통조차 없이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책방으로 건너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책방 안은 경순이의 손길이 묻어있는 깨끗함이다. 어제 바닥으로 던져버린 유리병의 흔적도 없다. 오전 7시, 경순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섯 시에는 책방과 밀면 가게 문을 열고 가게 앞을 오른쪽 길부터 왼쪽 골목 끝까지 빗질하는 아이다. 아홉시에 출근하는 예영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아직 자는지 받질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층 계단을 올라 살림집으로 들어갔다. 식탁에는 땡땡이 밥상보가 올라와있다. 성큼성큼 걸어가 밥상보를 들춰보니 분홍 소시지 계란 부침과 오징어젓갈, 매실장아찌, 그리고 스테인리스 밥공기가 수저 한 벌과 함께 놓여 있었다. 경순이가 차려 놓은 밥상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나는 작은방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경순! 밥뚜껑 안 열리게 또 눌러 담았어?”
사과가 든 검은 비닐을 들고 경순이방으로 걸어갔다. 유리로 된 미닫이문을 밀면서 겸연쩍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기 내 사과를 받아....”
너무도 깨끗한 방. 채워진 깨끗함이 아닌, 텅 빈 깨끗함이었다. 순간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내려왔다. 화장대에 화장품들, 2년 동안 마련한 옷가지들은 그대로인데 이상하게 낯설고 공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다급하게 옷장 문을 열어 경순이의 낡은 에코백과 할머니의 지갑을 찾았다. 다른 건 다 있는데, 딱 그것만 없었다. 그리고 화장대 구석에 여러 개의 통장뭉치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펼쳐보니, 전부 내 이름으로 만든 것이다.
“너 대체 뭐 한 거야...”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휴대폰을 들어 경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은 꺼져 있었다. 마침 그때, 초인종이 울리고 곧이어 누군가 주먹으로 문을 쾅쾅 내리치기 시작했다.
“경순이야?”
부리나케 현관으로 달려가 벌컥 문을 열었다.
“경순 씨 있어?”
정육점 윤기 엄마가 상기된 얼굴로 문을 밀치고 들어왔고, 그 뒤로는 가을 할머니, 초밥 집 사장, 부동산 양 언니가 난감한 얼굴로 서 있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가을 할머니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을 할머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그때 초밥집 사장이 송충이 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따지듯 물었다.
“경순 씨도 없죠?”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데, 가을 할머니가 초밥 집 사장을 밀어내면서 내 손을 잡았다.
“경순이는 그런 애 아니에요! 경순이도 그 총각한테 돈 빌려준 걸로 알아요.”
가을할머니는 초밥 집 사장을 올려다보면서 쏘아붙이더니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경순이 안에 있지?”
가을 할머니의 눈빛에는 염원과 애원이 담겨있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때 방문을 벌컥벌컥 열어젖히며 온 집 안을 헤집고 다니던 윤기 엄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이것 봐! 년놈들이 같이 튀었네! 밤새 둘이 시시덕거리고 돌아다니더니 작당을 하고 튀었어!”
“말 함부로 말어! 경순이도 그 총각한테 돈 빌려줬다니까? 그리고 왜 여기서 따져? 궁극적으로는 직원 관리 못한 초밥집 사장님이 잘못 아닌가?”
가을 할머니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윤기 엄마 머리채와 초밥 사장 멱살을 동시에 낚아챌 듯, 몸을 한껏 앞으로 숙였다.
“직원 속내까지 어떻게 압니까? 어머니가 위독하셔서 가불 해달라는 녀석 믿은 게 잘못입니까?”
초밥 집 사장이 억울한 듯 목소리까지 떨자, 가을 할머니가 치켜든 팔을 내렸다.
“초밥 사장은 그럼 합이 천만 원 뜯긴 거네? 부동산은 얼마 빌려줬어? 왜 가만있어?”
길길이 날뛰던 정육점 윤기 엄마가,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양 언니를 향해 너도 좀 거들라는 듯 언성을 높였다.
“나야 초밥 사장보다는 덜 하지.”
“그러니까 얼마!”
“삼 백...”
“아이고, 인물 반반한 젊은 총각이 애교 좀 떤다고, 거기에 홀랑 넘어가서 삼백을 날려?”
“언니는 말을 뭐 그렇게 해? 초밥 집 총각 어머님이 아프시다니 까, 내가 안타까워 빌려 준거지!”
“어떡하니? 돈은 네가 빌려줬는데, 몸은 경순이랑 튀었으니? 당했네 당했어.”
“언니이익!”
부동산 양 언니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윤기 엄마가 서 있는 거실로 달려들었다.
“뭐 하는 거야!”
참다못한 내가 고함을 치자, 당장이라도 싸울 듯 쌍심지를 켜고 있던 두 사람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경순이가 돈을 빌려갔어?”
“아니야! 경순이가 빌린 게 아니고. 초밥 집 총각이 빌린 거야!”
가을 할머니가 질색팔색 허공에 양손을 휘저었다.
“어머! 할머니! 누가 보면 경순 씨가 딸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그럼! 내 딸이지!”
“그럼 그 사기꾼이랑 붙어먹고 도망친 년이 할머니 딸이니까, 내 돈 내놔요!”
“뭐야?”
가을할머니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이마에 핏대가 서서는 윤기엄마 멱살을 휘어잡았다. 옆에 있던 초밥 집 사장은 두툼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면서 한숨을 몰아쉬었고, 부동산 양 언니는 혀를 끌끌 차며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가을할머니 손에 붙잡혀 버둥거리는 정육점 윤기엄마를 멀거니 바라보며 말했다.
“경순이가 동네북이야? 경순이가 동네북이냐고! 왜 다들 경순이한테 지랄들이야...”
내 외침은 소란 속에 묻혀버렸다. 어제 던져버린 유리병과 바닥에 흩어진 레몬사탕이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이윽고 눈앞이 서서히 뿌예졌다. 현관 천장에 박힌 센서 등이, 차오르는 달처럼 내 시야를 천천히 덮쳐왔다.
*
다음 날. 아침 일찍이 경찰서로 가서 실종신고를 내었는데, 시시티브이 장면 때문에 접수가 되질 않았다. 네모난 화면에는 초밥 집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가 오토바이 핸들을 잡고 있었고, 처음 왔던 그 차림에 경순이가 낡은 에코백을 소중하게 안고 그 뒤에 타는 장면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고아처럼 몸을 떨고 있는 나에게 입매가 가지런한 경찰이 이경순씨와는 무슨 관계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가족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