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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유리병의 에필로그

힐링장편소설(유리병 레몬사탕)

by 주양


에필로그

배꽃처럼, 예쁘게


우리 이모는 늘 데스크 위에 사탕이 들어있는 바구니를 놓아두는데, 창가에 스며든 햇살이 색색가지 다양한 사탕 위에 닿으면 왕관처럼 반짝반짝 빛이 난다.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분홍색으로. 여왕이나, 공주님, 또는 왕자님만이 왕관을 쓸 수 있지만, 바구니 안에 담긴 사탕은 아무나 다 먹을 수 있다.


새벽녘 거리를 깨끗하게 해주는 미화원. 신선한 우유와 계란을 집 앞으로 갖다 주는 배송 기사님. 종이책을 팔고 사는 손님들. 누구나 차별 없이 사탕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가을 언니는 출근하면서 하나 쏙. 퇴근하면서 두 개 쏙. 매일 들러 심통스러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쏙쏙 빼먹는다.


얄미워! 가을 할머니는 참 좋은 분이셨다고 한다. 무작정 세상 밖으로 튀어나오는 나를 받은 사람이 가을할머니라고 한다. 참고로 나는 헌책방에서 태어났다.


병원 차가 오기도 전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어쨌든 옥상화단에서 찍은 가족사진에 작은 아기였던 나를 안고 인자하게 웃고 계신 가을할머니. 기억은 안 나지만, 좋은 사람인 건 사진만 봐도 알겠다.


그러나 가을 할머니의 손녀, 가을언니는 외국생활을 오래해서 그런가? 너무 이기적이다. 현조 이모와 엄마는 가을할머니를 생각해서 언니랑 잘 지내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정을 주려 해도 정나미가 뚝뚝 떨어진다. 그렇지만 언젠가 가을 언니가 할머니 얘기를 하면서 운 적이 있다.


그 언니도 나름 슬픔이 있는가 보다. 현조 이모가 슬픔이 있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내어줘야 한다고 했다. 엄마와 이모는 슬픔은 아름다운 거라 했다. 슬픔은 희망의 반대가 아니란다. 오히려 짝꿍 같은 거란다.


나의 아름다운 슬픔은 뭘까? 아빠가 없는 거? 이건 안 슬픈데? 친구 같은 현조이모가 있고. 나를 낳아 준 경순 엄마가 있고. 가출할 때마다 책 더미 속에 숨을 곳을 내어주는 민영 이모부도 있고, 내 용돈 주머니 두둑하게 채워주는 만화가 삼촌들도 있고. 방학 때마다 놀러 가면, 맛난 음식으로 배를 터지게 만들어주시는 상주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으니까.


- 지혜로운 비! 내 이름은 이지우.


부족함 없는 사랑 속에 하고 싶은 건, 원 없이 하면서 열아홉 해를 살아내고 있다. 일 년 전,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엄마는 결사반대했고 이모는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내 선택을 존중해 줬다.


나를 낳은 건 엄마지만 나와 닮은 건 현조이모다. 이모를 닮아 엄지손가락이 못생겼고. 이모를 닮아 굴과 토란대를 못 먹는다. 스트레스 받으면, 뷔페를 가는 것도 똑 닮았다. 가끔 상주 할머니가 올라오시면, 우리 셋은 뷔페를 간다. 서울에 있는 뷔페는 거의 다 가 봐서, 요즘은 엄마가 좋아하는 부산으로 뷔페 도장 깨기 하러 간다. 엄마는 할아버지 모시고, 회를 먹으러 가고, 할머니와 이모와 나는 부산 앞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뷔페에서 재밌는 식사를 한다. 엄마가 그러는데, 셋이 꼭 쌍둥이 같단다.


하여튼 나의 대식가 기질은 상주할머니 그리고 현조 이모로부터 대물림 되었다. 현조 이모는, 어린 시절부터 나를 철저히 관리하며 키웠다. 첫 생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여성호르몬이 있다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못하게 했다. 내 옷은 반드시 이모가 손수 만든 비누로 따로 빨았고. 로션부터 샴푸까지 이모가 만들어준 걸 쓰고 있다. 나는 그런 이모가 단 한 번도 귀찮은 적이 없다. 이모가 내게 왜 그러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서부 이촌동 토박이로, 한 번도 동네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렇지만 갑갑함을 느껴본 적은 없다. 오래된 이모의 헌책방과 엄마의 밀면 가게를 중심으로 높은 빌딩과 고급아파트가 들어섰지만, 2층짜리 헌책방 건물만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다. 굉장한 보상금을 준다고 팔라 했지만 이모와 엄마가 결사반대했다. 나는 멈춰있는 우리 헌책방 건물이 참 좋다.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햇살도 좋고. 헌책 냄새도 좋고. 밟을 때마다 삐걱대는 나무 바닥도 좋다. 백 년이 넘은 책들로 가득 쌓여 있는 보물섬을 아낀다. 하지만 카운터는 좀 바꿨으면 한다. 너무 낡아서 나무껍질이 벗겨지기 때문이다.


“니야옹~~~~”


보석이 딸 하선이는 겨울에 태어나서 그런지 더운 걸 무지하게 싫어한다. 나는 봄에 태어나서 추운 게 싫은데. 나비가 데려왔다는 보석이 자식 중 둘째 딸인 하선이는 나보다 몇 개월 먼저 태어났다. 쌓아놓은 책 위에서 잠을 자다가 떨어지곤 하는 이상한 고양이 하선이는 다른 사람들 말은 잘 들으면서 내 말은 죽어라 안 듣는다. 고작 몇 개월 언니라고 으스대는 건가? 나비도 보석이도 그녀들이 낳은 자식들도 모두 천국으로 돌아갔는데. 하선이만 저래 팔팔하다. 인간 나이로 치면, 백 살도 훨씬 넘지 않았나? 아직 아기처럼 하얀색털이 보송보송한 하선이가 나무 바닥으로 착지해서 게으른 기지개를 켠다.


“박하선! 네 침대 여기 있잖아. 왜 자꾸 책 위로 올라가는데?”

어느새 데스크 위로 올라와 몸을 말고 누운 하선이 등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지혜롭고 따뜻한 여름 아기를.

현조 이모가 말해줬다. 나에게는 지온이라는 언니가 있다고, 여름에 태어나 여름아기라 부른다고. 그런데 여름만 되면 슬퍼진다고. 사실 계절에 상관없이, 밤에 잠에서 깨어 앉아 있으면 가슴 속에서 파도 소리가 들린다고. 나는 여름 아기를 사진으로만 봤다. 이모 말로는 우리 둘이 쌍둥이처럼 닮았다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눈이 좀 닮은 것도 같고.... 어쨌든 이모를 슬프게 한다는 그 여름아기를 나도 가끔 생각한다.


- 짤랑!


종소리를 내면서 책방의 문이 열렸다. 손님인 것 같다.


“어서 오세요.”


삐걱대는 나무 바닥을 밟고 책방 안으로 누군가 들어온다. 여름 장미처럼 붉은 입술. 솜처럼 하얀 얼굴. 자신 있는 눈빛과 그늘 한 점 없는 표정. 어딘가 낯이 익은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는데 왠지 모르게 슬퍼지려 한다.


“안녕하세요, 박현조 씨를 찾아 왔어요.”


아무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생긴 것 같다. 홈이 팬 그곳으로 물이 스며들어 바다가 고이는 것 같았다. 곧 그곳에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저는 지혜롭고 따뜻한 아이 지온이에요.”


내 가슴에 바다를 만든 그녀가 웃는다.

배꽃처럼 예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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