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단체협약 체결, 그러나 절반의 합의

법이 보장하지 못한 권리, 우리가 채워야 할 절반

by 기록하는노동자
928일의 끝, 최초 협약의 무게

2022년 9월 27일 단체교섭 요구 공문을 보낸 뒤, 2년 6개월 18일, 총 928일의 여정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직접 교섭을 시도하다 멈췄고, 상급단체에 위임했다가 다시 멈췄으며, 거리로 나서 싸우다가도 재개의 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2025년 4월 16일, 마침내 우리 노동조합 이름이 찍힌 최초의 단체협약서가 만들어졌다.
노조 설립 자체를 부정당하던 현실에서, 이제는 협약이라는 법적 문서에 노동조합의 존재가 새겨졌다. 그것만으로도 역사적 장면이다.

절반의 합의, 절반의 공백

하지만 협약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절반”이라는 말이 절실히 와 닿는다.

타임오프는 법상 상한인 4,000시간이 아닌 2,000시간. 그것도 사전 통보와 사후 보고 의무가 덧붙었다.

조합활동은 “근무시간 외”라는 단서가 붙어, 실질적으로 회사가 허가하는 범위에서만 가능하다.

사무실은 회사가 지정한 사외공간과 집기로 한정됐다.

홍보활동은 사전 승인 없이는 불가능하고, 회사가 임의로 철거할 수 있다.

임금교섭은 “별도 논의”로 빠져, 협약서 안에 온전히 담기지 못했다.

우리가 지켜낸 것은 조합원 자격 범위 일부였다. 팀장급 배제라는 회사의 방침에 맞서 “노조의 문은 더 넓어야 한다”는 원칙을 끝내 관철시킨 것, 그것이 이번 협약의 가장 큰 성취였다. 그러나 그것을 얻기 위해 사무실, 홍보, 교육권, 복리후생 같은 다른 요구들은 크게 양보해야 했다.

결국 협약은 노동조합 존재의 공식화라는 절반의 성취와, 권리 보장의 후퇴라는 절반의 아쉬움이 공존하는 결과였다.

현실법의 한계, “합의 없이는 권리도 없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우리 회사의 문제가 아니라, 현행 법제도 속에서 신생노조가 필연적으로 부딪히는 벽이라는 점이다.

노조법은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기본권으로 선언하지만, 동시에 “합의에 따라”라는 단서가 붙는다. 근로기준법은 근로조건이 동등한 지위에서 정해져야 한다고 규정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동등한 힘을 가진 노조는 거의 없다.

그 결과, 타임오프·사무실·체크오프(조합비 공제) 등 가장 기초적인 권리조차 협약에 없으면 행사할 수 없다. 회사가 “합의하지 않는다”는 한마디만 해도, 권리는 사실상 봉쇄된다. 합의 없이는 권리도 없다.

국회의 논쟁이 보여준 민낯

지난 8월 23~24일 국회에서 열린 노란봉투법 필리버스터는 이 현실을 그대로 드러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 법을 “불법파업 면죄부”, “기업 경영을 마비시키는 독소법”이라고 공격했다.
반대로 민주당과 조국신당 의원들은 “노동자의 권리는 불법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의 회복”이라고 맞섰다.

나는 그 토론을 보며, 이 논쟁이 단순히 노조법 2·3조만의 문제가 아님을 다시 느꼈다.
법은 늘 “노사 자율”과 “합의”를 강조하지만, 자율은 힘 있는 자에게는 특권이고, 힘 없는 자에게는 굴종을 강요하는 기제가 된다.
고용노동부가 내세우는 ‘노사 자율주의’는 결국 자본과 권력을 가진 쪽에 유리하게 작동한다는 현실을 국회 토론은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단체협약 이후, 회사의 어쩔 수 없는 대응

그럼에도 단체협약이 만들어낸 균열은 분명 있었다.
회사는 더 이상 “노조는 없다”는 태도로는 버틸 수 없게 되었다.

5월 23일, 노동조합이 임금교섭을 요구한 이후 회사는 침묵했지만, 6월 중순 재촉에 결국 “성실히 협의하겠다”는 답변을 내놨다. 7월에는 상견례까지 열렸다. 회사는 여전히 임금 동결을 주장하고 자료 제출도 지연시키고 있지만, 협약이 없었다면 임금교섭이라는 테이블 자체가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절반의 합의, 그러나 출발

따라서 이번 협약은 불완전하다.
불평등한 권력관계 속에서 나온 절반의 합의일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절반은 우리에게 “노조의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우리는 협약으로 회사를 어쩔 수 없이 교섭 테이블에 앉혔고, 임금 문제도 결국 논의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남은 절반,

충분한 보상, 복리후생개선, 합리적인 타임오프, 온전한 사무실, 체크오프, 교육권은 이제부터 채워나가야 할 몫이다.

절반의 합의였지만, 그 절반조차 없던 시절을 넘어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그 절반 위에서 우리는 나머지를 쟁취할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포맷변환]ChatGPT Image 2025년 8월 24일 오후 10_57_03.jpg


이 글은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질 노동조합의 싸움에 대한 기록입니다.공정한 사회를 위한 모든 목소리와 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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