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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진 없는 대화, 상생은 없다

10분이라도 좋다. 첫 만남이 상생의 시작이다.

by 기록하는노동자
윗물이 더러워도 아랫물은 깨끗해야 한다

윗물이 깨끗했는지는 직접 보지 못했다.
다만 아랫물이 윗물로 향하는 걸 보면, 대다수는 진흙탕을 뒤집어쓴 채 올라간다.
그래서 아랫물이라도 끝내 깨끗하게 지켜야 언젠가 윗물이 맑아질 희망이라도 생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회사라는 연못이 썩지 않으려면 노동조합이라는 순환펌프가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 펌프에 ‘노사상생’이라는 여과필터를 달아 썩은 물을 걸러내고, 맑은 물이 돌게 해야 한다.

3년째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현실

노조가 설립된 지 3년이 지났다.
그 사이 단체협약을 체결했고, 수십 차례 교섭을 열었지만
우리는 아직 한 번도 대표이사나 본부장 같은 경영진과 공식·비공식적으로 마주 앉아 본 적이 없다.
단지 ER팀 두 명이 교섭 테이블에 앉아 형식적 발언을 반복하고,
공문에 대해 기계적인 회신을 보내는 것이 전부다.


이제는 묻게 된다.
이것이 노조혐오인가? 아니면 노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인가?
대화를 요구해도 응답이 없고 교섭장에서는 같은 말만 반복된다.
법이 아니라 대화부터 시작하고 싶어도 결국 우리의 외침만 공허하게 메아리치다 끝나버린다.

이 현실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2022년 이후 대한민국의 많은 신생 노동조합들이 이와 똑같은 비극을 겪고 있다.
노사관계가 시작되기도 전에 노조는 고립되고 집행부는 지치고 조합원들은 무력감에 빠진다.
혐오를 넘어 노조 괴롭힘 수준이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다.

4차 임금교섭, 답 없는 테이블

9월 11일 열린 4차 임금교섭에서도 회사는 여전히 “검토 중”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동결인지 인상인지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은 것이다.
노동조합은 결국 교섭을 조기 종료하고 5차 교섭까지 인상률 안을 제시하지 않으면
조정신청 등 공적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 선언은 단순한 압박이 아니다.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신호이고 소통이 끊긴 현실에 대한 마지막 경고다.

이랬다면 어땠을까?

만약 4차 교섭에서 회사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이번 교섭에서 인상률 3.5%를 제안합니다.
기본급 격차 문제는 노사 공동 TF를 발족해 올해 안에 개선안을 마련하겠습니다.
그리고 대표이사가 직접 참여하는 간담회를 분기마다 열겠습니다.
오늘 교섭 이후엔 다 함께 식당으로 가서 점심 한 끼 합시다.”

그랬다면 교섭장은 싸늘한 전쟁터가 아니라 환한 회의실이 되었을 것이다.

자료를 두고 논쟁하더라도 얼굴에는 웃음이 돌고

다음 교섭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회의실을 나섰을 것이다.

노사 모두 “함께 회사를 살린다”는 감각을 공유하며

오늘보다 내일 더 나은 회사를 만들기 위해 다시 만날 약속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회사들도 있다

이건 단순한 상상이 아니다.

삼성전자는 경계현 DS부문 대표가 직접 노조 대표단과 만나 급여체계 개선과 휴식권 보장을 논의했다.

르노코리아는 사장이 노동청장과 함께 노조위원장과 간담회를 열고 고용 문제를 공유했다.

현대ITC노조는 대표이사 간담회를 통해 현장 근무환경을 직접 전달했고, 개선 논의가 시작됐다.

인천메트로서비스는 신임 대표이사가 취임 직후 노조 간부들과 만남을 갖고 요구사항을 청취했다.

롯데백화점은 대표와 노조 간의 첫 대면 간담회를 열고 감정노동·휴게공간 문제를 직접 논의했다.

이 회사들은 공통적으로 “대표이사 또는 최고 책임자가 직접 나와 듣는다”는 첫걸음을 선택했다.
그것이 대화를 열고 신뢰를 쌓는 출발점이었다.

상생을 위한 고민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회사가 원하는 것은 노동조합이 그저 서류에 사인만 하는 존재
외부에서 보기에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는 조직이길 바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없는 것이 맞다.


우리가 만든 노동조합은
그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용기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그 말문을 열어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것이 그렇게 보기 싫었는지
우리는 3년이 넘도록 경영진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별도로 회사와 접점을 만들기 위해 수차례 시도했지만
그 접점은 생기면 사라지고 생기면 사라졌다.
이제는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조선시대처럼 부월(斧鉞) 아래 엎드려 목을 쳐 달라 읍소해야 하는가?

10분이라도 좋으니, 대화를 시작했으면 한다.

무작정 찾아가면 반감만 살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고용노동부나 국회를 통해 자리라도 만들어보려 한다.
언쟁을 하든 사과를 하든 어떻게든 대화의 시발점을 만드는 것이 지금 가장 중요하다.


한 번 자리가 열리면 그 자리에서 다음 약속을 만들고
그다음에는 밥을 먹고 차 한 잔 하는 약속으로 이어가고 싶다.
그렇게 해서 이 고립된 관계가 조금씩 풀릴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이제 필요한 것은 교섭 테이블에서 숫자만 두드리는 일이 아니다.
노동조합 대표와 회사 경영진이 직접 만나 서로의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자리가 먼저다.

10분이라도 좋다.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간담회가 열려야 한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겪는 현장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회사가 고민하는 경영의 어려움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다음 약속이 만들어지고 밥 한 끼, 차 한 잔으로 이어지는 진짜 상생의 길이 열릴 것이다.

경영진과 마주 앉는 순간부터, 우리는 싸움 대신 대화를 선택할 것이다.
상생은 만남에서 시작된다.
간절히 바란다. 그 첫자리가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되기를.
방금 노조를 시작한 이들에게

노동조합을 막 세웠거나, 세우려는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처음에는 회사가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대화할 자리조차 열어주지 않을 수 있다.
그럴수록 기록하라.
교섭 요청 공문, 회신, 거절, 미팅 시도 이런 것들을 모두 남겨 두어야 한다.
기록은 언젠가 당신이 “우리는 끝까지 대화를 요구했다”는 증거가 되고
법적·사회적 힘을 얻을 때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리고 대화의 문을 여는 시도를 멈추지 말라.
작은 간담회, 짧은 면담이라도 만들어라.
심지어 회사가 거부한다면 제삼자를 통해 자리를 마련할 수도 있다.
상급단체, 노동위원회, 고용노동부, 국회 등 누군가는 중재자가 되어 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가 열렸을 때 감정 대신 해결책을 준비해 가는 것이다.
노조는 반대를 위한 조직이 아니라

회사를 더 건강하게 만드는 조직이라는 것을 보여줄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첫 대화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상생하고픈노동자들의노조록03.jpg 지난 7월 29일 노동조합을 시작한 지 3년여의 시간 동안 회사 경영진에게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메시지. 변화의 시작이길 빌어본다.


이 노조록은 상생을 위한 기록이며, 모든 연대와 토론을 환영합니다.
이 글은 노동존중사회로 가는 발자국이며, 함께 걸어줄 모든 손길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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