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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과 거울

by 서리가내린밤 Mar 17. 2025

기억을 잃은 나는 정신과 상담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언제부터 기억이 사라졌는지조차 알 수 없다.

매일 같은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한다. 나는 소음에 예민한 탓에 늘 이어폰을 꽂은 채 창밖을 바라본다. 창에 낀 서리를 소매로 닦아내며 흐릿한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내 유일한 낙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로변의 대형 광고판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뉴스 제목을 발견했다.

‘범인 없는 살인’

그 아래에는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순간, 이어폰 너머로 세상이 멀어지듯 귀가 먹먹해졌고, 머릿속이 깨질 듯이 아파왔다.




“뭐가 생각났어요?”

의사가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실망한 듯한 그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정말 단 한순간에 모든 기억이 돌아온다면, 사람들이 내 말을 믿어줄까?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어쩌면, 기억을 잃고 싶었던 것이 내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고판 속 풍경을 보고 떠오른 기억들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화를 내야 하는 걸까, 슬퍼해야 하는 걸까.




나는 어릴 적부터 귀신을 보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은 나를 멀리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내 능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두 친구를 만났다. 다연과 세정. 그들과 나는 스물다섯의 마지막을 기념하며 조용한 마을 풍연리로 여행을 떠났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스산한 기운이 우리를 감쌌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죽은 자들의 존재. 나는 단번에 떠나고 싶었지만, 다연과 세정은 풍연나무를 꼭 보고 가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들이 그 나무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주변의 귀신들이 불안한 듯 술렁였다. 마치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때, 검은 한복을 입은 무당이 나타났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귀신들은 그녀의 주변에 달라붙었다. 있었던 일들을 그 무당에게 속삭였다. 마치 무당을 조종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녀는 날 보자마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가 센 년이로구나.”

그녀는 내 친구들에게 친절하게 풍연나무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나는 불길한 느낌에 친구들을 말렸지만,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우리는 산을 올랐다. 풍연산은 그리 높지 않아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정상에 오르자,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들판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풍연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백의 설경 속, 풍연나무는 신비로울 만큼 아름다웠다. 세정과 다연은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나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때였다.

눈을 멀게 할 만큼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눈을 감아야 했다. 이내 시야가 돌아왔을 때, 무당이 내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나무 위를 보렴. 넌 그만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살고 싶다면.”

그녀의 말에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거기엔…

그 순간, 다연이 나무 아래에서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세정도 그녀를 따라갔다. 그것은 깨진 거울 조각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안 돼!”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다연은 거울을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무언가에 의해 끌어당겨지듯 나무에 목이 걸려 허공에서 몸부림쳤다. 세정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 역시 거울을 내려다보는 순간, 같은 방식으로 나무에 매달렸다.

나는 그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무당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잘됐네. 재물이 부족했거든.”

나는 몸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살려주마. 하지만, 이곳에서 본 것을 누구에게라도 말하면… 네 운명도 같을 거야.”

그녀가 내 손에 거울 조각을 쥐여주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것을 땅에 내던졌다. 하지만, 거울 조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귀신을 보지 않게 되었다. 대신, 어디를 가든 깨진 거울 조각이 내 주변을 맴돌았다. 아무리 버려도, 불태워도, 산산이 부숴도 다시 돌아왔다.

그 거울은 나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나는 누구에게도 그날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것이 내가 짊어진 저주의 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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