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선생님인 친구가 딸의 온라인 추모록에 나보다도 자주 발자국을 남기는데 정호승의 ‘봄길’을 두고 갔다.
“이 시를 읽는데 네 생각이 났다. 모두 너를 향한 새로운 사랑을 하고 있구나. 다음 주는 추석이다. 가족에게 한번 다녀가렴.”
그녀의 바람대로 딸은 가족의 꿈에 여러 번 다녀갔다. 오빠 꿈에 와서는 예전처럼 침대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하다 갔고, 아빠 꿈에서는 늘 하던 대로 환상의 티키타카를 주고받으며 놀다 갔다. 또 한 번 딸이 남편의 꿈에 왔을 때 남편은 풀지 못한 문제에 대해 물었다.
“왜... 그랬어?”
“어쩔 수 없었어요.”
꿈이긴 했지만 남편은 딸의 대답을 듣고 조금은 편안해 보였다. 딸은 내 꿈에도 와주었다. 잠에서 금방 깬 딸의 옆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약은 먹었어?”라고 내가 묻자마자 홀연히 사라졌다. 내가 늘 봐오던 아이의 옆모습이었다. 차에서 운전할 때는 아이의 왼쪽 모습을, 책상에서 공부할 때는 오른쪽 모습을 봐왔다. 그러고 보니 건강했던 시절의 딸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전체가 기억나고 아픈 시절의 아이는 자꾸옆모습만 떠오른다. 그렇게 반만 떠올라서 더 그리운 건지도 모르겠다. 언제 어디서부터 딸의 아픔은 시작된 걸까.
“엄마 아빠는 늘 제가 왜 이렇게 힘든지 궁금했겠지만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중학교 1학년 때 난데없이 찾아온 우울에 저도 모르게 잠식되어가고 있었고 이유를 알 수 없어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
딸은 마지막 편지에서 우울의 시작은 중학교 1학년 때라고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때는 중국의 끔찍했던 코로나 격리정책이 조금은 풀리던 시기였는데 앞서 2년간의 격리피로감으로 코로나 블루가 왔던 걸일까? 한국에서 예중입시를 열심히 준비하다 갑자기 중국으로 간 후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었던 일, 친하게 지내던 단짝 친구와 틀어졌던 일, 2년여를 짝사랑하던 첫사랑이 전학 온 지 한 달 된 전학생과 사귀게 돼서 슬퍼했던 일 정도가 떠오른다. 딸 본인도우울한 근본이유를 알 수 없다고했는데 자꾸 어떤 사건이있었나 되새기는 어리석음이란. 중학생이 된 딸은 확실히 깜찍 발랄했던 초등학생 때와는 달라졌다. 키도 부쩍 자라고 몸도 제법 성숙한 여성의 체취가 났다. 방문을 닫고 말수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히 찾아오는 수순으로 여겼다.
딸과 소원해지는 것 같아둘만의 시간을 많이 가지려 했다. 필라테스도 같이 다니고 딸의 친구들과 여행을 함께 가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딸과의 시간은 계림 클럽메드로 떠난 둘만의 첫 여행이다. 그즈음 아이가부쩍 말을 하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네 식구가 계림으로 여행을 갔다가 남편과 아들을 먼저 보내고 딸과 둘만의 여행을 이어갔다. 수영, 탁구, 배드민턴, 양궁, 요가 등 태능인처럼 하루 종일 운동을 하고 노래방에 가서 목청 찢어져라 노래도 불렀다. 그저 먹고 자고 놀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딸이 활기를 찾기를 바랐다.
이후에도 딸은 집에서는 조용하게 지내도 학교에서는 소문난 댄싱머신으로 즐겁게 생활했다. 아들이 졸업을 앞둔 시점에 음악을 하겠다며 선언을 한 후 집안 분위기가 냉랭할 때가 많았지만 아이는 그것에 관해 내색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의 아이 모습을 복기하면 우울증이 아니라 우울감이 있었다는 것이 맞아 보인다. 사춘기와 우울 사이의 줄타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우울증 초기증상과 사춘기는 구분하기 어렵다는 전문가들의 말처럼 딸이 우울증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내가 아이의 우울을 알아채고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청소년 우울증의 증상이라고 알려진 학업 부진, 등교 거부, 게임 중독, 식사장애 등의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다만 수면장애는 있었던 것 같다. 늦게 까지 잠에 못 들면 딸은 안방 침대로 불쑥 찾아왔고 웃으며 "나 불면증인가 봐요."라고 했다. 논다고 안 자 놓고 무슨 불면증이냐며 늦게 자는 딸을 힐책했지 수면트러블이라는 생각은 못했다. 늘 일찍 재우려는 나와 안 자려는 딸의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딸은친구들이랑 채팅이다 게임이다해서 늦게 자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단 한 번도 지각을 하지 않았다.아이는 집에서와 밖에서의 모습이 달랐는데 학교생활을 잘하는 모범생이었기에 간과했던 점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을 위해 한국으로 와서도 좀 침울하다고는 느꼈지만 환경변화에 따른 진통이겠거니 했다. 전학 온 지 일주일 만에 새 친구들을 사귀어 놀이공원으로 놀러 가는 딸은 내 눈에는 우울증과 거리가 가장 먼 부류의 사람이었다. 항상 어떠냐고 물으면 “괜찮아요”라고 대답하는 딸의 말을 과신했다. 딸의 '괜찮아요'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라는 슬픈 언어였는데 그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다.
"오래전부터 난 속에서 뭔가가 잘못되었어. 내 마음속에 항상 살고 있던 우울이 이제는 날 집어삼키려 해. 난 내가 너무 미워. 왜 힘든지 묻지는 마. 우리 집 같은 환경에서 뭐가 우울하냐고 할 거잖아. 아무도 날 이해해주지 못해. 그냥 힘들다고 하면 이해가 안 되는 거잖아."
의사 김현아 교수가 쓴 '딸은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에서 딸 안나가 한 말이다. 딸이 아프다는 걸 알았을 때 이 책을 처음 읽었고, 아이를 잃고 난 후 다시 읽었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두 아이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두 번째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난 속에서부터 고장 났다
천천히 날 갉아먹던 우울은 결국 날 집어삼켰고
난 그걸 이길 수 없었다
:
왜 힘든지를 찾으라니 몇 번이나 얘기해 줬잖아
왜 내가 힘든지 그걸로는 이만큼 힘들면 안 되는 거야?
더 구체적인 드라마가 있어야 하는 거야?
좀 더 사연이 있었으면 하는 거야?
김현아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딸이 한 말과 똑같다고 쓴 이 글은 세상을 떠난 샤이니의 멤버 종현의 유서이다. 내 딸은 '난데없이 찾아온 우울에 잠식되었다'고 표현했고, 안나와 종현은 '우울이 집어삼켰다'고 했다. 질식할 정도의 우울에 고통스러워했던 나의 딸, 안나, 종현이 하는 말이 모두 같다. 우연일까?
그저 지나가는 바람에 잠시 흔들리는 줄 알았던 딸은 사춘기가 아니라 우울증에 조금씩 침몰하고 있었다. 그래도 스스로 죽음을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수험생활을 시작하며 아이는 완전히 변해갔다. 한국의 입시 스트레스는 아이가 견뎌낼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