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지영 Nov 04. 2024

정신과에서 시대의 아픔을 마주하다

금요일 오후 4시, 딸과의 공식 데이트 시간이다. 사실 데이트로 생각하는 건 나뿐이고 딸은 학교에서 외출증을 끊고 가기 싫은 병원을 가는 날이다. 선천적인 질병을 가진 자녀를 키우는 엄마가 진료를 보러 가는 길이 아이에게 즐거운 시간이 되도록 맛집을 열심히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딸에게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따뜻한 시간이 되길 원했다. 딸의 상태가 조금 나을 때는 2주 치 약이 처방돼 병원에 안 가도 되는 주가 생기는데 그때 아이와 카페나 맛집을 다녔다.  


어여쁜 봄날, 호수가 보이는 전망 좋은 카페에서 나는 커피를 마시고 아이는 연신 카메라로 사진을 찍던 날이 생각난다. 딸에게 봄볕이 얼마나 포근한지 알려주고 싶었다. 얼음 같은 마음속의 동굴에도 빛이 통과하길 바랐다. 사진 동아리에 들 정도로 사진 찍는 걸 좋아했던 딸은 모처럼 밝은 표정으로 좋아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셔터를 눌러댔다. 나는 그 아이를 내 마음에 담았다. 금요일 오후 4시가 그렇게 추억으로 모여있다. 우리의 땡땡이가 선물처럼 남아 이제 나는 딸이 찍은 사진을 보며 추억한다.

     

심리검사를 한 첫 병원에서는 딸이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렸지만 약이 전혀 듣지 않고 아이는 자살충동이 더 심해졌다. 종합병원 진료가 전공의 파업으로 대기가 한없이 길어지며 딸이 다니는 학원 근처로 병원을 바꿨다. 새로 다니게 된 곳은 최고 학군지에 있는 가장 부유한 동네의 정신과였다.  대기실을 가득 채운 환자의 99%가 학생들이다. 대부분 교복을 입고 무표정한 얼굴로 음악을 듣거나 졸면서 진료를 기다린다. 숙제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 아이 또래의 고등학생들이 많았다.

 

무엇이 이 많은 아이들을 병들게 했을까. 우리처럼 부모와 함께 대기 중인 아이도 있지만 대부분은 혼자 다. 5시가 예약시간이지만 한 시간 대기는 기본이다. 6시 진료 마감이라고 해놓고 6시가 넘어야 진료실에 들어갈 수 있다.  매주 금요일 진료를 보러 가는데 신기하게도 늘 다른 아이들로 대기실은 채워져 있다.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다 그렇듯 아이들은 그저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아이들이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지 않는 이상, 보기에는 그저 사지육신 멀쩡한 평범한 고등학생들일뿐이다. 간혹 어리게 보이는 초등학생과 그보다도 더 어린아이도 눈에 띄었다.    


질병관리청의 2022년 청소년건강행태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4명 중 1명이 우울감을 경험한다고 한다. 그리고 청소년 10명 중 한 명이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한 경험이 있으며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비율이 높다. 또 16.1%가 평생 한 번 이상 정신장애를 경험한다. 그중 불안장애가 9.6%로 가장 높고 파괴적 충동조절 및 품행장애는 4.4%으로 뒤를 이었다. 우리가 사춘기로 부르는 나이인 12세부터 17세 사이에 두드러졌다. 내 자식은 아니길 바라지만 내 자녀가 우울감과 자살사고를 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나도 딸이 아프기 전에는 나에게 벌어질 일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딸은 고2가 되면서 통학을 했다. 처방약을 먹으면 잠이 온다는 이유로 먹지 않고 자해가 늘어 기숙사에 둘 수가 없었다. 학교는 딸에게 친구들이 있는 제2의 집이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친구들이 생겼고 친구들 속에 있고 싶어 했다. 의존적 성격 때문에 혼자 있을 때 더 우울해진다고 했다. 그래서 자퇴나 휴학의 의사가 전혀 없었다. 남편이 있는 지역의 학군은 4시 하교에 야간자율학습도 자율이고 여러모로 학업 스트레스가 아이의 학교보다 낮아 전학을 권유했지만 아이는 친구들과 떨어지기 싫어했다. 그래서 나는 학교를 다니고 싶으면 기숙사를 나와 외할머니 집에서 통학하라고 선포했다.  딸은 눈물을 머금고 기숙사를 나왔다. 아침 6시 30분 기상, 하교 후 밤 11시 도착을 하는 통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사실 약을 복용하면서 강도 높은 학교의 일과를 모두 해낸다는 게 불가능했지만 딸은 해내고 싶어 했다. 모든 정신질환 치료의 기본은 뇌를 쉬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약을 먹고 잠이 오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아이는 학교에서 내내 자는 자신을 증오했다. 딸은 쏟아지는 잠 때문에 뭘 할 수가 없다며 좌절했다. 급기야 내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하는 일들이 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다고 분노했다. 딸을 살리기 위해 애를 쓰면 쓸수록 우리 사이는 멀어져 갔다. 어떤 것이 아이를 진정으로 위하는 것인지 길을 잃은 채 깜깜한 터널 속에 멈춰서 있는 날이 지속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