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아름다웠고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빛나고 있었던
어리고 어리고
몹시도 수줍은 많았던 아가야
폭죽처럼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게 피어올라
아무런 흔적 없이
떠나버린 너의 어린 날을
통곡한다
나비가 되었다가
강아지가 되었다가
어여쁜 목련화로도 피었다가
아침 이슬로도 찾아왔다가
너를 기억하는 친구의 꿈에서
다시 태어나거라
아가야
딸의 친구의 엄마이자 나의 벗이 아이의 생일날 시를 보내주었다. 눈 뜬 후부터 잠이 들 때까지 왜 아이가 떠나야 했나는 의문과 우리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기도를 보내 준 벗이다. 우리는 해외살이 동안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함께 봤고 고등학교도 같이 보내며 입시 뒷바라지의 애환을 나눈 동지였다. 그래서 그녀의 충격과 슬픔은 가족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7개월의 투병기간 동안 나도 아이도 별다른 내색을 안 해서 딸의 부고는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실제로 치료가 필요한 친구와 지인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자살생존자가 되었다.
자살생존자는 자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아니라 주변인의 죽음에 영향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송인한 연세대 교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1명이 약 6명의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고, 평균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우리나라처럼 인구 밀도가 높고 관계지향적인 사회에서는 자살생존자의 범위가 더 넓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매일 36.6명, 38분당 1명이 스스로 삶을 끝내고 있으며 10세부터 49세까지 손상 사망자 중 70% 이상은 자살로 인한 죽음이다. 나도 나에게 닥친 문제가 되어서야 얼마나 심각한 수치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가까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의 문제였다. 우리 동네에서, 아이의 학교에서, 건너 건너 아는 누군가가 38분당 1명에 속했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고전이 된 그의 저서 <자살론>에서 자살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뒤르켐으로 인해, 사회 구조와 환경이 개인에게 과도한 압력을 가해 죽음으로 내모는'사회적 타살'의 개념이 공론화되었다. 정끝별 교수의 <투신천국>이란 시가 이것을 잘 이해하게 한다.
투신천국
정끝별
재벌 3세가 뛰어내렸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출근한 아침
그날 하루 부산에서만 십 대 세 명이 뛰어내렸다는
인터넷 오후 뉴스를 보다가
이런, 한강에 뛰어내렸다는 제자의 부음 전화를 받고
저녁 강변북로를 타고 순천향병원에 문상 간다
:
학비 벌랴 군대 마치랴 십 년 동안 대학을 서성였던
동아리방에서 맨발로 먹고 자는 날이 다반사였던
졸업 전날 찹쌀콩떡을 사들고 책거리 인사를 왔던
임시취업비자로 일본 호주 등지를 떠돌다 귀국해
뭐든 해보겠다며 활짝 웃으며 예비 신고식을 했던
악 소리도 없이 별똥별처럼 뛰어내린 너는
그날그날을 투신하며 살았던 거지?
발끝에 절벽을 매단 채 살았던 너는
투신할 데가 투신한 애인밖에 없었던 거지?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여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딸은 자신이 스피노자인 듯 늘 하던 데로 성실하게 기말고사를 끝내고, 새 학기 방학특강을 천연덕스럽게 등록한 후 생을 마감했다.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라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어요'라는 말을 남겼다. 가족들과 외식을 하고, 절친과 산책을 한 마지막 하루는 아이만의 작별의식이었다. 딸은 마지막까지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고 싶었던 걸까.